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41화 (441/1,007)

22권 25화

한국에서 출산율이 급감하는 변 곡점이 IMF였다. 본인 혼자 살기 도 어려운데 무슨 결혼이고, 무슨 출산이란 말인가. 하지만 전명헌이 나 김대중을 비롯한 이 자리에 있 는 사람들 모두 유재원의 말이 잘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본인의 원대 한 계획 중 '치국'에 해당하는 과제 들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 보는 지표로써 출산율을 선택했을 만큼, 가장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데이터 였다.

하여튼, 국민연금 전면 시행에 대해 유재원은 확실하게 부정적인 의견을 표시했다.

차라리 국부 펀드를 만드는 게 더 좋겠다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 다. 연금의 경우 투자 상품에 한계 가 있지만, 국부 펀드는 오로지 수 익률만 쫓을 수 있으니 말이다. 게 다가 유재원은 엄청난 치트키를 많 이 보유하고 있는 만큼, 걸프전 당 시 석유 선물에 투자해 대박을 터 트린 것 이상의 수익률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심지어 유재원은 본인의 의견에 따라준다면, 아예 수익률 보장도 해줄 수 있다는 마음이었다. 하지 만 관료라도 소속에 따라 이해관계가 저마다 다르고, 전명헌이나 김 대중은 아예 소속 정당이 다르니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날지는 미지수 였다.

"고생했다."

"할아버지가 고생이죠."

지금은 만찬이 끝나고, 전명헌과 단둘이서 만나는 독대 자리였다. 덕분에 할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 고, 전명헌도 유재원을 백호 펀드 와 ID 그룹의 오너가 아닌 손자로 대우해주었다.

"간단한 자리를 만들 생각이었는 데, 김 총리를 비롯해서 다들 너랑 만나고 싶다지 않느냐. 그래서 판 이 좀 커졌다."

전명헌이 호화로운 만찬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유재원의 등을 토닥여 줬다.

확실히 조금 전 끝난 만찬은 전 명헌 스타일은 아니었다. 원래 전 명헌은 밥에 국 하나, 김치 하나 정도로 수수하게 먹는 스타일이었 다. 어렸을 때의 식습관이 재벌이 되어서도 바뀌지 않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대통령이 된 지금도 아침밥은 저렇게 먹는다고 한다.

유재원도 전명헌과 사석에서 처 음 만났을 때, 몇 천원짜리 설렁탕 을 먹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런 전명헌인데, 유재원이 메인 게스트 였고 김 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 과 하는 만찬이라서 스타일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만찬장에서 제가 좀 주제넘게 나댔죠?"

"무슨 소리냐? 그게 주제넘은 거 면, 바른 소리 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다."

전명헌은 마치 무조건 유재원 편인 것 같았다.

애정 때문인지, 아니면 조언을 줄 때마다 무조건 적중해서 그런 건지 몰라도 이번 국민연금에 대한 사안도 유재원의 편을 들어줬다. 어쩌면 이번 일로 김대중 총리가 자신을 더 안 좋게 생각할 수도 있 을 것 같다.

"게다가 김 총리를 그리 밀어붙 인 사람은 네가 최초일 거다. 그 양반 화술을 듣고 있으면 절로 정 신이 팔린다니까. 국민연금 말고도 많단다."

"그래요?"

전명헌 할아버지는 김대중 총리 에게 뭔가 좀 많이 시달린 사람처 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본 인이 뭔가 꽂힌 게 있으면 불도저 같이 밀고 나가는 전명헌에 비해,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특기인 김대중 총리는 궁합이 그닥 좋지 않은 사이였다.

"얼마 전에는 여성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얼마나 곤란한지 넌 모를 거다."

아, 그 여성부.

70년생까지라면 여성에 대한 차 별이 분명히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니 여성 인권 신장을 특 별히 챙겨야 하는 것도 정답이다. 그런데 80년대부터는 확실히 개선 이 이뤄졌고, 21세기 이후부터는 확실히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 니다.

그런데 70년대 이전의 감성을 21세기에 적용하면서 문제가 났다. 단순히 트러블이 생겼다는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인 갈등이 크게 생겼 을 정도다.

"그래서 만드실 거예요?"

"난 아니라고 했다. 경제 살리기 바쁜데 무슨 여성부란 말이냐. 그 런 일은 내가 우리나라 경제 살리고 나면 하라고 했다."

역시 전명헌 할아버지는 원조 불 도저 였다.

최대의 목표는 한국 경제 재건이 었고, 이를 위해서라면 웬만한 일 은 뒤로 밀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 었다.

이어서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탓에, 유재원도 그렇고 전명헌도 그렇고 할 이야기가 많았다.

전명헌의 식구들 이야기부터, 유 재원의 최근 사업 동향까지 딱히 숨기는 것 없이 이야기했다.

"프랑스 월드컵은 누가 우승할 것 같으냐?"

당연히 대화의 소재로 개막이 이 제 얼마 남지 않은 프랑스 월드컵 이 화제에 오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레블뢰 군단 아니겠어 요. 홈그라운드 이점에 지단이라는 신예도 있고."

"우리 한국은? 1승이라도 할까?"

"그건 좀."

프랑스에 대해서는 과감히 우승 도 말하는 유재원이지만, 한국에 대해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현재 한국 국가대표들은 차범근 이라는 리빙레전드가 이끄는 축구 대표팀이었다. 예선전에서도 돌풍을 일으켰다. 전국민의 기대가 한껏 올랐다. 정작 본래의 실력을 보여 줘야 할 본선에서는 쫄딱 망했다.

네덜란드를 맞이해 기록적인 점 수 차이로 패배를 했고, 그 일로 인해 차범근 감독은 16강 예선이 다 치러지기도 전에 경질되는 수모 를 겪는 대회였다.

일명 마르세유의 치욕이라고나 할까.

"월드컵 준비는 잘되고 있어요?"

이렇게 프랑스 월드컵 이야기가 나오니 당연히 2002 월드컵 이야기 도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북 공동 유치로 일본을 떨쳐내고 쟁취 한 2002 월드컵의 정식 이름은 바 로 2002 남북 월드컵이다. 영어로 는 2002 KOREA WORLD CUP 이다.

"음, 아직은 설계 단계지."

2002 남북 월드컵에서 가장 중 요한 사업은 무려 7개의 국제 규격 의 축구 경기장을 짓는 일이었다. 도시마다 적어도 2000년부터는 첫삽을 떠야 2002년에 맞춰 개장할 수 있었다. 아직 약간의 여유가 있 는 건 사실이지만, 여유를 부릴 정 도는 아니었다.

서울에 하나 들어가는 건 당연했 다.

나머지 지자체들은 저마다 자랑 하는 도시에 월드컵 경기장을 유치 하기 위해 그야말로 총력전이었다.

이권은 이뿐만이 아니다.

경기장 장소는 물론이고, 어느 경기장에 어느 나라 경지를 배치하 느냐, 표는 어떻게 팔것인지 결정 해야 할 것은 수없이 많았다.

유재원도 예외는 아니다.

바로 HD 디지털 방송의 표준화 전쟁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2002 월드컵이 그 전초전인데, 여기에 ID 그룹의 기술들이 최대한 많이 표준으로 정해지도록 해야 한 다. 예전처럼 무늬만 HD로 좀 화 려한 장면만 나오면 깍두기가 작렬 하는 꼴을 두 번 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덤으로 장비와 기술을 팔 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여러 사안에 대해 불만 나오지 않게 교통정리 잘해야겠네요. 특히 축구협회장이요."

유재원이 말한 축구협회장이 바 로 전명헌 대통령의 막내아들이자 사고뭉치 전재준이었다.

저번 대선에선 크나큰 삽질로 전 명헌에게 단단히 찍혔다가, 유재원 의 조언으로 축구 쪽으로 진로를 바꾼 다음 부터는 승승장구다.

남북 월드컵 공동 유치로 그야말 로 인생 최고의 황금기를 달라는 중이었다.

"그래, 마지막 기회니 잘해야지. 만에 하나 떡값 같은 걸 받았다는 소리만 나기만 해봐. 이번엔 독도 에 보내버릴 테니까."

전명헌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만 끄덕였다. 재미있는 건 이게 심한 반응도 아니라는 점이다.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 전재준에 대한 전명헌 의 앙금은 아직도 다 풀리지 않았 던 탓이다. 게다가 전대 대통령의 아들이 소통령 노릇을 하며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서 감옥에 가 있는 상태인데, 본인까지 그걸 답습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단단히 서 있었 다.

"그나저나, 북한에서는 무슨 일 이래요?"

분위기가 무르익자 유재원은 북 한 이야기를 꺼냈다. 언론에 발표되기로는 한반도 평화 체제 정착과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남북 월드 컵 등의 세부 사항 논의를 위한 남 북 정상회담이라지만 속사정이 있 다는 건 명백했다.

"아, 그거 말이냐. 북쪽에서 그러 더라. 이제 그만 전쟁을 끝낼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이번에 제대로 논의해보자는구나."

전명헌은 유재원의 물음에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덤덤한 전 명헌의 말투에 전쟁을 끝낸다는 말 을 그냥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유 재원은 아니었다.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말은 곧 종전 선언이었다. 바로 한민족 최 대의 비극이자 만악의 근원인 한국 전쟁 말이다.

"그, 그래서 해주겠다고 하셨어 요?"

"어떻게 그걸 내 마음대로 해주 냐'?"

유재원은 설마 하고 물었다가 돌 아온 대답에 살짝 안도했다.

한국전쟁은 민주주의의 한국과 공산주의의 북한이 치렀고, 그 뒤 에는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이기도 했다. 전쟁의 당사자는 우리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종전 선언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없 었다.

한국전쟁 때 대통령이었던 이승 만이 작전통제권을 미군에 넘기면 서 그것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문민정부 시절에 평시 작전통제권은 환수했지만, 전 시 작전통제권은 그대로 미군이 가 지고 있었다.

"종전 선언이라는 게 휴전 협정 의 연장이더만. 그런데 휴전 협정 에 우리 한국의 서명이 없으니 내 가 마음대로 해줄 수도 없다 하더 라고."

"저 말고 다른 누구에도 말해봤 어요?"

"김 총리가 말해주더라."

보안이 잘 지켜지려나 걱정했던 유재원은 김 총리라는 말에 조금 안심했다.

하긴, 이 제안을 북한에서 받아 온 사람이 김대중 총리였으니 알고 있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김 총리 님의 국정 능력이라면 종전 선언에 대한 프로세스는 물론이고 정치적 인 의미까지도 다 파악하셨을 것이 다.

김 총리의 말대로 종전 선언은

미국과 북한의 일이었다. 휴전 협 정에 중국의 서명도 있긴 한데, 엄 밀히 따지면 중국은 한국전쟁에 정 규군을 파견한 적이 없다고 지금껏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인해전술을 펼치며 압록강을 수복했던 UN군을 다시 38선까지 밀어낸 그 중공군들 뭐냐?

북한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의용군이라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중국 은 뻔뻔스럽게 그 주장을 밀고 있 었다. 당연히 UN군의 중국 진격과 전 세계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뻔 뻔한 면피용 주장이다. 종전 선언을 할 때 그 주장이 중국의 개입을 막는 자충수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잘 알고 계시면, 제가 딱히 해드릴 말은 없는데요."

"아니다. 있다."

유재원의 말에 전명헌이 고개를 저었다.

"김정일이란 애송이 녀석 있지. 그놈이 진심으로 하는 건지, 아니 면 기만하는 건지 네가 좀 봐주거 라."

전명헌의 대답은 유재원의 예상 을 벗어난 것이었다.

눈이 크게 떠지는 유재원을 보며 전명헌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재원이 네가 가진 능력은 어마 어마하지. 국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에이, 너무 비행기 띄워주시네 요."

"아니다. 재원이 너는 상식 밖의 존재가 맞다. 대통령을 하면서 여 러 통계 자료를 보는데, 너 하나만 추가되면 그 통계 자료가 다 엉망 이 된단다. 우리나라가 가진 1등 제품을 따져 볼 때도, 국민 소득 평균을 낼 때도, 20대 소득 자료를 볼 때도 마찬가지야."

전명헌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재원이 너를 포함하면 우리나라 는 선진국 부럽지 않지. 전 세계 1 등 제품도 수십 개가 되고, 국민 소득도 수천 달러는 더 높아지니 말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대기업 우대 정 책의 이유도 전명헌의 말에 정답이 있다.

통계 수치의 극적인 변화를 위해 선 국민 전체가 발전하는 것도 좋 지만, 대기업만 집중 지원을 해도 통계 수치가 유의미하게 변한다.

전명헌 대통령도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펴기 위해 통계를 보는데, 유재원이나 ID 그룹이 포함된 자료 를 보고 정책을 펼치면 잘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유재원의 존 재는 혼자서 통계 자료를 왜곡할 만큼 압도적인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제일 높이 사는 능력은 그런 게 아니야."

"예? 그럼 뭔데요?"

경제적 능력보다 더 좋은 게 있 나?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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