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권 8화
다만 싱크탱크라고 해도 동아시 아 전략 연구소에 대해 잘 아는 ID 그룹의 임원들은 그렇게 많진 않았 다. 사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연구 조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미국의 상 하원 의원들 그리고 행정부 관료들 에게 ID 그룹의 이익이 되는 방향 으로 리포트를 내거나 전략을 내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직이다.
"여기 리포트입니다."
에드 로이스 소장은 유재원에게 문서가 띄워진 노트북을 전했다. 유재원이 북한에 가기 전 주문해 놓았던 리포트였다.
"제목이 아주 좋네요."
노트북 화면에 큼지막하게 띄워져 있는 타이틀은 바로 '중화인민 공화국의 부상과 주북미군에 대한 심층연구'였다.
1998년 지금의 미국에겐 적수가 없었다.
오랜 숙적 소련은 해체되었고 소 련의 유산을 물려받았던 러시아는 다시 모라토리엄이 터지면서 경제 자체가 붕괴했다.
숙적을 잃은 미국은 전 세계 IT 혁명을 이끌며 놀라운 경제적 성과 를 이뤄내고 있었지만, 국가 안보 적인 차원에서는 크게 방심 중이었 다.
중국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 지만, 과소평가가 심했다. 러시아가 무너졌으니, 중국 공산당도 무너질 거라고 나이브하게 생각하는 인식 이 워싱턴 DC에 공감대가 깔려 있 을 정도였다. 그저 세계의 공장으 로 노동 집약적인 공산품들의 생산 기지 이상으로 여기진 않았다.
이렇게 손을 놓고 있다가 나중에 크게 당했다.
유재원은 동아시아 전략 연구소 를 통해 중국의 위험성을 먼저 경 고하고, 이와 동시에 미국의 전통 적인 동아시아 전략의 변화를 유도 하고자 했다.
주북미군이라는 건 이제까지 미 국이 상상해보지 못했던 단어였다.
동시에 너무도 매력적인 이야기 였다. 리포트에는 개마고원에 해병 대 1개 대대만 놔도 1개 항모전단 이상의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되어 있다. 단순히 말로만 써놓은 게 아니라 고도의 시뮬레이 션을 통한 여러 가지의 증거도 뒷 받침되어 있었다.
중국의 위협도 구체적으로 적시 했다.
무역전쟁부터 해서 실질적인 무 력 충돌까지의 시나리오를 체계적으로 완성한 고도의 리포트였다.
당연히 유재원의 입김이 반영된 결과였다. 중국의 위협에 대해 단 순한 상상만이 아니라, 전생에 직 접 겪었던 일들을 에드 로이스 소 장에게 ID톡을 통한 대화로 전달해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재원의 이야기는 매우 생생했다.
에드 로이스 소장 역시 러시아 다음으로 미국에 위협이 될 나라는 중국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유재원의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 았다. 당연히 지금 보는 리포트에 도 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제까지 나온 동아시아 전략에 대한 리포트 중에 이보다 더 정확 한 건 없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 다.
다만 관건은 북한의 태도 변화였 다.
북한에 미해병대 1개 대대를 주 둔시키려면, 그야말로 엄청난 정치 적 결단과 혁신이 필요했으니 말이 다.
그걸 한국이 나서서 해결하겠다 고 하고, 그러기 위해선 종전 선언 과 평화 협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리포트의 핵심이다.
"이대로만 되면 미국도 좋겠죠?"
"네. 그야말로 신냉전을 준비하 는 최고의 포석이 될 겁니다. 하지 만 쉽진 않겠죠."
유재원의 물음에 에드 소장이 혼 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냉전이란 이번 리포트에서 중 요하게 다루는 개념이다.
미국과 소련이 했던 냉전은 첩보 전과 우주 경쟁으로 대표된다고 하 면, 미국과 중국이 펼칠 신냉전은 경제 전쟁이라 정의했다. 경제 전 쟁이라고 해서, 무력이 존재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고도의 군사력 을 바탕으로 하는 과격한 경제 전쟁이었기에 중국의 수도 베이징까 지 순식간에 진격할 수 있는 주북 미군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회귀 전 21세기라면 중국의 힘이 제한 없이 폭발했기에 주북미군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만, 이제 막 경제 개방을 시작한 상태라면 가능 하다. 더욱이 중국에서도 경제 개 발을 해야 할 이 시점에 북한을 지 원하는 것에 대해 반감이 가진 사 람들이 많았다. 북한은 그 일로 인 해 김정일의 마음이 크게 상했다.
새로운 독재자로 올라선 지금 경 제적 성화를 발휘해야 하는데, 중 국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경제 성과가 예상보다 훨씬 바닥을 치고 있 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적기였다.
더욱이 미국이 직접 하라는 것도 아니고, 위험은 한국이 감수하겠다 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자체를 수정 하겠다는 게 유재원의 큰 그림이기 도 했다.
북한이 새로운 교두보가 된다면, 북한과 이어진 한국이 지금의 일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고, 일본은 미국의 저금통으로 전락할 테니 말 이다.
"빠듯한 시간이었을 텐데 완벽하 네요!"
리포트를 다 본 유재원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일을 한 지도 벌써 4년차입 니다."
에드 로이스 소장은 별것 아니라 는 듯 칭찬을 받았다.
연구소 출범 이후 꾸준하게 하던 일이 동아시아 전략을 연구하는 것 이었고, 청사진도 다 그려준 상태 이니 갑작스러운 요구에도 퀄리티 있는 리포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전략이 알려지면 낙동강 오리알이 될 일본이나, 중국에서 견제가 들어올 게 확실했기에 극한의 보안을 요구했다.
덕분에 유재원에게 전자우편으로 간편하게 보내 검수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완전한 오프라인 환경에 서만 제작된 덕에 이렇게 직접 와 서 열람을 한 것이다.
"발표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앞으로 몇 십 년을 좌우할 미래 전략이 담긴 리포트였기에, 발표도 임팩트가 있어야 했다.
더욱이 워싱턴 DC에는 동아시아 전략 연구소와 같은 싱크탱크가 수 도 없이 활동하고 있었고, 매일 같 이 리포트를 쏟아내고 있었다. 다른 연구소가 하는 것처럼 의원실에 몇 부 돌리고 인터넷에 올리는 것 처럼 하면 공들여 만든 이 리포트 도 예전에 냈던 것처럼 스팸 처리 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음, 좋은 생각이 있으신지요?"
"책으로 내보는 게 어때요?"
"책이요? 저널은 건너 띄고 말입 니까?"
에드 소장에겐 책이 매우 의외였 던 모양이다.
"아, 저널에 리포트도 내고요. 책 도 내자는 거죠. 예전에 냈던 동아 시아 관련 리포트도 다 합쳐서 하나로 엮으면 책 하나 분량은 나오 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제목으로는 라이징 차이나 어때 요?"
한국을 무조건 띄우는 게 아니 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의 지정학적, 정치적 존재감을 극대화 하는 것이다.
동아시아 전략 연구소에 쌓인 라 이브러리의 양도 제법 상당했으니 책 하나 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동아시아에 상식이 없는 평범한 미 국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게 쉬운 문장과 중국의 부상을 예견한다면 나중에 가서 재조명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출판 기념회에 저도 올게요. 여 기에 유력 정치인들이나 셀럽도 많 이 참석하면 더더욱 좋겠죠?"
"물론입니다!"
유재원이 좋겠다고 하면, 대부분 그대로 이뤄졌다.
로스엔젤레스 출신인 에드 소장 이 워싱턴 DC에 입성하긴 했지만, 이제까지 그다지 존재감은 크지 않 았다. 그런데 유력 정치인들이 대 거 참석하는 출판 기념회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가능성은 100%다.
아무리 참고할 게 많아도 책을 쓰는 게 힘든 일이라는 걸 잘 아는 에드 소장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에드 소장을 뜨겁게 달궈 놓은 유재원은 다음 스케줄로 이동 했다.
백악관이 었다.
백악관 웨스트윙.
이곳은 세계 최강 대국 미국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 곳의 주인인 클린턴은 예전과는 좀 달라진 모습이었다. 르윈스키 스캔 들 이후로 영부인 힐러리 클린턴에 게 매일 시달리는 게 사실인 모양 인지, 주름도 늘었고 흰머리도 많 아졌다.
더욱이 국제적인 여러 가지 난제 로 인해서 고민할 거리가 한가득이 었다. 그나마 클린턴의 확실한 우 군이라 할 수 있는 유재원이 오랜 만에 찾아온 덕에 미소가 올라오긴 했다. 그럼에도 얼굴에 수심이 가 득한 게 보일 정도다.
단적으로 지금 클린턴을 가장 괴 롭히는 문제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개발 레이스였다. 핵 확산 금지 조약 같은 건 인도와 파키스탄에겐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았다. 미국 도 두 나라의 핵 경쟁을 막아보려 고 노력 중이지만 실패였다.
이미 미국의 정보 조직은 조만간 인도가 핵 실험을 강행할 것임을 파악했고, 이에 맞춰 파키스탄도 핵 실험과 탄도 미사일 실험을 할 거라 예고한 상태다.
미국 내의 문제도 있었다.
나스닥이 붕괴하고 있긴 해도,
실업률은 4.3%로 1970년 2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할 만큼 활황이었다. 벤처기업들이 많이 무너지는 만큼 새롭게 생겨나는 기업도 많았다. 더욱이 ID 그룹처럼 제대로 된 수 익 모델이 있다는 게 확인되면 IT 버블 붕괴의 영향력을 크게 받지도 않았다.
최근에는 FDA에서 발기부전 치 료제인 비아그라가 승인되었고, 덕 분에 제약 관련 주식들이 폭등 중 이었다.
이렇게 미국의 경제는 좋았지만, 클린턴은 본인이 자초한 스캔들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중이었다. 조만간 미국 국회에 불려가서 청문회 를 할지도 모르고, 이 때문에 탄핵 을 당할 위험도 매우 높게 점쳐지 고 있는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유재원이 북한의 종전 선언 카드를 가지고 온 것이 다.
당연히 유재원은 전명헌에게 미 리 클린턴을 만나서 종전 선언 이 후의 한반도의 정세와 동아시아 전 략에 대해 설명하겠다고 말했다. 전명헌도 유재원이 클린턴과 각별 한 관계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흔쾌히 동의했다.
다만 공식적인 특사 같은 건 아니었다.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준 비는 외교부에서 공식 라인을 통해 이뤄질 것이고, 유재원은 그런 이 야기가 잘될 수 있게 기름칠을 쳐 주는 역할이었다.
"축하해! 텍사스에서 유전 대박 을 터트렸다면서?"
자리에 앉은 클린턴이 텍사스 이 야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네가 찍어준 자리에 꽂은 채 굴기에서 검은 기름이 수십 미터씩 뿜어졌다지?"
"예? 무슨 원유가 수십 미터씩 뿜어져요?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후후,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나 저나 텍사스 유전 탐사는 끝난 줄 알았는데, 자네가 한 방 크게 터트 리면서 제2의 블랙골드 러시가 시 작될 수도 있겠어."
최악의 스캔들 상황이지만, 클린 턴 특유의 유쾌함은 아직 그대로 있었다.
"컴퓨터로 시작해, 미디어 업계 의 공룡을 집어삼키더니, 이제는 석유까지 터트리는군. 참 대단해. 자네가 어디까지 커나갈지 지켜보 는 사람이 아주 많다고.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고."
덤으로 은근한 경고의 말도 빼먹 지 않았다.
"석유까지라니. 그건 좀 무리네 요. 티파니에게 제가 잘하는 데이 터 분석을 도와준 거지, 그쪽으로 나갈 생각은 전혀 없거든요."
유재원도 잘 알고 있는 사안이었 다.
단지 관심만 둘까? 이를 가는 사 람들도 제법 있다. 특히 텍사스 자 본이 중심으로 모인 론스타의 경우 에 한국의 외환위기를 이용해 큰돈 을 벌어볼까 하고 있는데, 유재원 의 백호 펀드가 시장에 나온 매물을 싹쓸이하면서 론스타 같은 헤지 펀드가 맥을 못 추고 있었다. 그러 다가 이젠 그들의 앞마당인 텍사스 에서 유전까지 터트렸다.
일부러 그들의 먹을거리를 가로 채고, 앞마당에서 도발하는 건 아 닌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알겠네. 그렇다고 해두지."
클린턴은 마치 다 안다는 듯 고 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말해도 설 득되지 않을 얼굴이라 유재원은 본 론으로 들어갔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