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56화 (456/1,007)

23권 15화

"네, 유재원입니다!"

-회장님, 저 최강욱 부회장입니 다!

"아, 부회장님, 아침 일찍 무슨 일이에요?"

아침이라는 건 한국을 말하는 것 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이제 오후 4시를 막 넘기고 있으니 서울은 아 침 8시에 불과했다. 시차 계산 정 도는 이제 순식간에 끝나버리는 유 재원이었기에, 이 정도는 그냥 감 각적으로 결과가 나왔다.

이어진 최강욱의 말은 놀라웠다.

-시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일성전자 놈들이 사고를 쳤습니다!

놈들?

최강욱은 매우 점잖고 매너가 넘 치는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어린 유재원을 액면가만 보고 무시하지 않았고, 인격적으로 대해주었다. 거기에 좋 은 인상을 받은 유재원이 최강욱을 파트너로 점찍었던 것이기도 하다. 같이 일을 하고 나서 최강욱이 욕 을 하는 걸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 다.

감사실이나 정보팀이 올리는 보 고서에도 최강욱에 대한 직원들의 신망은 대단히 높았다. 그런 그가 일성 전자에 대고 '놈들'이라고 하 는 것은 진짜 큰일이었다.

"사고요? 무슨 사고라는 거예 요?"

-일성 전자 상태가 지금 빚만 잔 뜩 남은 빛깔 좋은 개살구라는 내 부 증언이 조금 전 들어왔습니다.

최강욱이 마치 속사포를 쏘듯 빠 르게 말을 했다. 순간 유재원은 랩 을 듣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전화를 걸어준 최강욱은 다급한 데, 정작 유재원은 순간적으로 딴 생각이 들었던 것은, 예측 범위 안에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성 전자 측에서 채권 연장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부터가 좀 이 상한 일이었다. 채권이라는 건 협 상에 따라 연기, 혹은 변환이 종종 이루어지는 물건이었다. 이를테면 이자를 좀 더 많이 약속하고 만기 를 미루는 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일성 전자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도, 소극적이었다. 유재 원과 만날 때마다 손해를 보니 껄 끄러워 하는 것 같았는데, 역시나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일성 전자의 주요 자산들은 대 부분 빼돌려졌다고 합니다. 심지어땅이나 공장을 담보로 크게 빚을 졌고, 비싼 가격에 다른 일성 계열 사의 재고를 사기도 했답니다.

"속 빈 강정이라는 말이죠?"

-속 빈 강정? 정확합니다!

매물로 나오길 기대하던 물건이 하자품이라는 것에 최강욱은 크게 분노 중이었다. 하지만 유재원은 이런 경우를 전생에 많이 봤다. 중 고천국에서 거래하다가 조금만 한 눈을 팔면 사기꾼을 만나는 건 기 본이었다.

다만 일성 전자의 경우엔 국내 최고의 전자 업체가 중고천국 사기 꾼 짓과 같은 걸 했다는 게 충격이 었다.

"그런데 부회장님은 이걸 어떻게 알아내셨어요?"

정보팀의 활동이었다면, 최강욱 보다 유재원에게 먼저 보고가 왔을 것이다. 하지만 유재원의 ID톡에는 정보팀의 알람이 없었다.

-일성 전자 소속이지만, 우리에 게 회유된 사람들이 좀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일성 전자 핵심 관 계자로부터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최강욱의 말에 유재원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배가 침몰할 때 같이 죽는 사람 도 있지만, 살기 위해 짐을 싸고 뛰어내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굵은 동아줄인 최강 욱에게 선을 대고 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기회주 의자의 전형이지만, 나빠 보이지 않는 유재원이다.

의리보다는 실리!

그것이 유재원의 생각이었다. 다 만 능력도 없이 눈치만 빠른 사람 들은 별로였다. 이런 사람들에겐 제보해준 정보의 값만 좀 치러주는게 좋다.

"제보자가 있다면 대부분 사실이 겠네요."

-그렇습니다. 회장님의 큰 그림 에 누가 될까 걱정입니다.

그나마 긍정적인 점은 대놓고 일 성 전자의 자산을 빼돌리진 못했다 는 점이다. 외환위기 이후 자본의 유출을 감시하는 눈이 많아졌고, 법원과 세무서 등등도 빡빡해졌다. 공수처법이 통과되었기에, 예전처럼 끼리끼리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 면서 대충 묻고 가는 일을 더는 못 한다.

대놓고 배임이나 횡령을 저지르 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덩 치가 큰 반도체 공장이라든가, 다 른 자산들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의혹 하나는 풀렸다.

일성 전자가 부도가 났는데도, 일본에서 자본을 댄 투자자들로부 터 별 반응이 없었던 이유를 이제 는 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내부 자산을 팔아 치워서 만들어진 돈은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보면 최씨 일 가의 주머니 아니면 일본의 투자자 들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뮬레이션을 끝낸 유재원이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실사 작업을 최대한 빨리해서 배임이나 횡령으로 관련자들을 다 고소하세요. 최씨 일가도 빼놓지 말고요. 그리고 채권단과 협력해서 반도체 부분은 ID 테크놀로지가 인 수하는 걸로 하고, 나머지 가전 부 분은 백호 펀드가 인수해 회생 작 업에 돌입하고요. 대신 좀 느긋하 게 해요. 부실이 발견될 때마다 부 정적인 발언도 하고, 발도 빼는 척 도 하시고요. 다른 업자들에게 넘 어가는 것만 막을 정도에서요."

-예, 회장님!

유재원의 방침은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대신 이번 일을 활용해서 페이크 를 잔뜩 넣기로 했다. 배임과 횡령 등이 알려지면 다급해지는 건 채권 단 쪽이다. 빌려준 돈을 받아내지 못하면 곧 은행의 부실로 이어지고, 그러면 IMF 체제로 인해 예전보다 강화된 지급 준비율과 부실 채권 비율을 맞추지 못해 통폐합 당할 위험이 수직 상승이다.

그나마 일성 전자 부도가 난 상 황에서 빌려준 돈을 그나마 받을 수 있는 루트는 ID 테크놀로지나 백호 펀드에 인수되는 것밖에 없다.

"오! 이제 일성 전자는 ID 테크 놀로지 반도체 사업부가 되는 거 야? 그러면 이제 CPU만 만들면 ID 그룹의 부품만으로 컴퓨터를 만 들 수 있겠다!"

옆에서 숨죽이며 유재원의 통화 를 다 들었던 영식이가 전화가 종 료되자 크게 호들갑을 떨었다. 이 제 다 큰 영식이는 일성 전자의 인 수가 ID 그룹에 어떤 역할을 할지 도 제대로 알고 있었다.

"후후, CPU도 만들고 있단다!"

유재원은 리사 수 팀이 계속해서 개발을 이어가고 있는 모바일 애플 리케이션 프로세서를 예로 들면서 짐짓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시제 품 완성 이후에도 리사 수의 개발 팀은 해체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개발비, 더 많은 인력을 투입 했다.

꾸준한 성능 개량을 이뤄내기 위 함이다.

"에이, 그건 PC엔 못 쓰잖아. 겨 우 터치폰이나 돌리는 정도잖아."

영식이가 터치폰을 말했다.

티파니폰 터치 버전은 아직 공개전이긴 한데, 양산품은 DAP와 함 께 다 완성된 상태다. 영식이의 보 안레벨로도 시제품 정도는 직접 만 져 볼 수 있었기에, 터치폰이 언급 되는 건 자연스러웠다.

"과연 그렇게 쉽게 확신할 수 있 을까? 그건 모르는 거지."

영식이의 말에 유재원은 손가락 을 까딱거리며 두고 보자는 식으로 말했다. 이미 미래의 기술발전 테 크트리에 대해 알고 있는 유재원에 겐 미래에 대한 장담은 어려운 일 도 아니었다.

"아. 진짜? 근데 그렇게 되면 되 게 심심하겠다. 고도의 작업은 무리잖아."

"야야, MAP의 성능이 보통의 CPU보다 더 높아질 거라는 상상은 못 하냐?"

"응? 그게 가능해? MAP의 구조 는 너무 단순한데. 부동소수점 연 산도 일반 CPU보다 더 여러 번 계 산해야 하잖아."

이제 머리가 여물었다고 전문 용 어가 막 나오는 영식이었다.

그렇지만 영식이의 지적은 확실 한 팩트 폭행이었다. 논리회로 구 조가 간단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는 부동소수점 연산과 같은 정밀하고 복잡한 계산에서는 성 능이 많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대신 작동 속도를 쉽게 올릴 수 있지. 그리고 똑같은 코어를 여러 개 박아서 병렬 연산도 쉽게 할 수 있도록 할 거야."

그것 말고도 속도를 올릴 수 있 는 방법은 상당히 많았다. 멀티코 어에 작동 속도를 올리는 건 기본 중 기본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유재원과 영식이가 아옹 다옹하는 사이에 검색 로봇의 결과 가 나왔다. 먼저 알람을 울린 건 의외로 영식이가 세팅한 검색 로봇 이었다. 유재원은 그보다 30분 정 도 더 늦은 시간에 완성되었다.

"자, 이제 보자."

먼저 알람이 울렸다고 해서 내기 에 이긴 건 아니었다.

검색 내용의 밀도와 정확성이 내 기의 승패를 좌우한다. 그렇기에 결과물을 보는 유재원과 영식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다음 날.

내기의 승자가 밝혀졌다. 영식이 었다.

작업 완료 속도도 빨랐고, 빅데 이터 검색 결과의 정확성도 유재원 보다 더 높았다. 유재원은 본인의 패배를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내기의 상품이었던 클라우드 시스 템 사용권 한 달짜리를 영식이에게 주었다.

내기로 걸었던 건 소원 들어주기 였다. 승자인 영식이는 ID 테크놀 로지 본사의 연구용 클라우드 시스 템을 한 달만 써보고 싶다고 했다.

유재원은 기꺼이 영식이에게 한 달 짜리 마스터 아이디를 만들어줬다.

직접 이곳에 오지 않더라도 학교 나 집에서 원격으로 접속해 클라우 드 시스템의 컴퓨팅 파워를 이용할 수 있는 아이디였다.

마스터 아이디를 받자 자동차를 받았을 때보다 더 좋아하는 영식이 를 보면서 유재원은 패배의 원인을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인은 간단했다.

운이 나빠서였다.

21세기 최신의 알고리즘을 알고 있던 유재원이지만, 현재의 시스템에 그걸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검색 로 봇에 들어간 알고리즘은 영식이가 만든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신 검색 시작 지점이나, 동시 에 여러 개의 서버에 접속해 검색 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발생했는데, 영식이는 처음부터 왕건이 줄기를 잡았고, 유재원은 실고구마만 찾았 다는 게 차이였다.

대신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그나저나, 일본 사람들 참 이상 하네."

일본 사람들이 참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고베 강철 품질 조작 스캔들로 일본 증시에 커다란 폭락이 있었다. 이후에 하락과 상승을 반복하고 있 지만, 하방 압력이 더욱 강해지면 서 닛케이 지수는 하락하고 있었다. 여기서 발생한 손해도 상당했을 텐 데, 아베에 대한 분노는 생각보다 적었다.

"한국이었으면 적어도 온라인에 선 분노가 폭발했을 텐데."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일부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사이트나 좀 격한 반응이었고, 나머지는 밋밋했다. 댓글을 다는 게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 인터넷이란 공간에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게 낯설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유재원의 눈에는 너무 수동적이었 다.

"계획을 바꿔야 하나?"

오죽하면 일본 공략 계획을 바꿔 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재원의 일본 공략은 두 개의 트랙으로 이뤄져 있었다. 하나는 환율, 다른 하나는 증권 시장을 공 격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엔화 환율은 엔 캐리트레 이드로 인해 이미 왜곡될 만큼 왜 곡된 상태였다. 일본의 경제가 안 정적이었다면, 엔화는 제2의 기축 통화 가치를 가지고 안정적으로 수 익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스닥 이 무너지고, 일본 경제에 커다란 스캔들이 터지며 엔 캐리트레이드 의 청산은 이제 시작된 상태였다.

여기에 유재원과 조지 소로스 그 리고 수많은 핫머니들이 끼어들면 서 일본 환율 시장에 왜곡을 가하 고 있는 중이다.

-오늘자 엔화 환율, 1달러당 108엔!

닛케이 지수가 대폭락하는 와중 에도 엔화의 가치는 계속 오르는 중이었다. 전 세계에 뿌린 엔 캐리 트레이드가 청산되면서 달러화를 팔고 엔화를 사는 거래가 폭증했다. 일본 대장성은 비정상적인 상황임 을 인식하고, 엔화를 급히 풀어내 고 있지만, 왜곡된 시장의 수요를 감당하진 못했다.

그야말로 대장성의 통화나 외환 담당 관료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 릴 정도였다. 그나마 일본의 외환 보유고는 세계 최상위권이라서 한 국과 같이 IMF 긴급 구호를 받을 필요는 없지만, 과감하게 대응해야 할 타이밍을 관료제의 한계로 매번 놓치면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 나는 중이었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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