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59화 (459/1,007)

23권 18화

일본의 현재 총리는 오부치 게이 조였다.

역대 일본 총리 중에서도 그나마 상위권에 있는 사람으로, 인품의 오부치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적을 만들지 않은 온화 한 인품과 특유의 근성으로 여러 위기를 돌파했다. 하지만 최근의 일본에 닥친 경제 위기는 그런 오 부치 총리의 인기도 바닥을 치게 했다.

경제계에서 빵빵 터진 스캔들에 서 정치권 인사들의 비호도 밝혀졌 고, 때늦은 조치로 인해 손실이 걷 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게다가 일본 공적 연금의 천문학적 손실의 은폐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수령자 의 지급액에 수십엔, 수백엔 대의 오류가 나오도록 한 것에 대한 국 민들의 실망감도 이만저만이 아니 다.

그래도 일본은 일본이었다.

클린턴에게 무슨 카드를 내밀었 는지 모르겠지만, 일본의 뜻대로 클린턴이 유재원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으니 말이다.

"설마 저 혼자 일본에 투자하고 있다고 알고 계시는 거 아니죠?"

정확히는 투자가 아니라 공략이 지만, 클린턴에게 일본 공략 중이 라고는 말할 수 없는 유재원이었다. 덕분에 투자라고 말할 때, 그렇게 나 어색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회 사 그리고 한국을 위해서 얼마든지 얼굴 가죽이 두꺼워질 수 있는 유 재원이었다.

-그럼! 소로스 회장이나, 자네의 장인이 될 블랙스톤의 핑크 회장에 게도 먼저 전화를 했다네. 아, 엘리 엇도 있었지. 하여튼 자네가 제일 마지막이야. 그리고 키스톤이기도 하지.

역시 미국 대통령은 모르는 게 없다.

일본 공략에 가장 큰 주체들은 다 알고 있는 모양이다.

조지 소로스는 당연했고, 여기에 장인의 블랙스톤도 있었다. 블랙스 톤은 일반적인 뮤추얼 펀드이긴 했 지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상 품도 있었다. 해당 상품의 운영 자 금 중 일부를 일본에 들여왔다.

프레더릭 테일러 2세의 존재감에 가려져 있긴 했지만, 장인어른도 보통은 아니었다. 블랙스톤을 세계 최고, 최대 규모의 뮤추얼 펀드로 키운 저력은 과감하고도 놀라운 결 단력에 있었다.

"제가 키스톤이에요? 제가 그만 두면 다른 사람들도 그만하겠다고 해요?"

-그럼! 다들 자네만 보고 움직인 다는데. 음, 아닌가?

"당연히 아니죠."

말도 안 된다.

블랙스톤이라면 모르겠지만, 조 지 소로스나 다른 투기 자본들도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움직이는 것 이었다. 공유하는 것도 없었다. 그 냥 주어진 상황에 따라 각자 가진 노하우로 최대한의 이윤을 위해 움 직였을 뿐이다.

-하여튼, 이쯤에서 멈추는 게 어 떻겠나?

클린턴의 재차 권유에 유재원은 고민이 깊어졌다. 그렇게 충분히 생각해본 다음 유재원은 입을 열었 다.

"잘 아시겠지만, 지금 저희가 움 직이고 있는 자본은 레버지리를 극 대화한 상태거든요. 환율이나 닛케 이 지수가 한틱 움직일 때마다 생 겼다 사라지는 수익금은 억 단위에 요. 끝장을 내놓으면 지금 벌었던 것에 2배는 더 벌 수도 있고요. 그 리고 이러한 수익금이 커진 만큼 세금도 많이 발생할 거예요. 그래도 그만둬요?"

ID 인베스트먼트의 세금 계산은 복잡했다.

한국에 크게 낼 때도 있고, 미국 에 크게 낼 때도 있었다. 한국에 내는 세금이 커질 때는 유재원이 수익금의 개인 배당을 실시해 소득 세가 크게 잡히는 경우였고, 미국 에 세금을 크게 낼 때는 미국 내의 기업을 인수한다거나,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뿌릴 때였다.

-자네와 같은 친구가 국익에 커 다란 일조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대신 이것만 알아주게. 이번 부탁을 받으면서 일본으로부터 그 이상 의 양보를 얻어냈네. 자네나 한국 에게도 틀림없이 좋은 거라고 장담 하지.

클린턴의 말에 유재원은 딱 감을 잡았다. 일본이 확실히 클린턴이 혹할 대가를 제시했구나 하는 느낌 이 왔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세한 느낌 은 아니었다. 한국에도 좋을 거라 고 하는 말이 빈말은 아닐 거라는 직감이었다.

"흐음, 이번이 진짜 다시 없을 기회인데 말이죠."

그대로 수락하기에는 조금 그랬 기에 살짝 빼봤다.

-후후, 약한 소리군. 자네 같은 천재에겐 기회는 항상 열려 있을 걸세. 그리고 이번에 신세를 진 나 도 열심히 도와주겠네. 이번 일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악연에 대해 공부를 좀 했으니 말이야.

"알겠어요."

클린턴의 확답에 유재원은 고개 를 끄덕였다.

르윈스키 스캔들로 청문회를 앞 둔 양반이지만, 그래도 미국 대통 령이었다. 게다가 며칠 후면 한미정상회담이 있고, 북한과의 종전 협정 논의도 코앞에 있었다. 이 자 리에서 정해지는 것들은 결코 돈으 로 살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일 본으로부터 미국이 받아냈다는 것 도 보통의 것은 아닐 것이다.

이후로도 몇 분간 잡답을 더 나 눴던 유재원은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서 아직도 일본에 있는 빈센 트 그린힐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응?"

그런데 통화벨 소리만 울리고 전 화를 받지 않았다. 특이한 일이었 다.

빈센트 그린힐은 유재원의 전화 를 놓치는 적이 없었다. 아무리 늦 어도 전화벨이 3번 나기 전에는 전 화를 받았었는데, 지금은 사서함으 로 넘어갔다.

그때, 유재원의 ID톡이 울렸다. 신일본 투자은행의 임원이었다.

-회장님! 대장성 증권 감독국에 서 주가조작 혐의를 조사한다고 사 무실을 뒤지고 있습니다. 빈센트 사장님이 대응 중입니다!

쪽지의 내용은 심각했다.

대장성 증권 감독국은 한국으로 치면 금융감독원과 같았다. 의심스 러운 거래를 조사하고 단서가 잡히 면 바로 검찰에 고소할 수 있는 권 한이 있었다.

"어쩐지 일본의 내각 정보 조사 실에서 움직이고도 한동안 조용하 다 했다. 그런데 이 공교로운 타이 밍은 뭐지?"

클린턴 대통령의 전화와 증권 감 독국 조사단의 출동 시간이 짠 것 처럼 착 맞아떨어졌다. 마치 북한 의 화전 양면술을 보는 듯한 기시 감이 들 정도였다.

따르릉.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유재 원의 핸드폰아 다시 울렸다. 발신 인은 빈센트 그린힐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뒤늦게 출동 해 뒷북이나 치고 말았습니다. 물 론 저희는 불법적인 거래를 한 적 은 없으니 털릴 것도 없습니다.

얼른 전화를 받아 보니, 빈센트 그린힐의 목소리는 전과 다르지 않 았다.

-아, 그렇군요. 아쉽겠습니다. 하 지만 과식은 늘 체하는 법이죠. 약 간 아쉬울 때 멈추는 것도 좋습니 다.

클린턴 대통령과의 대화로 이쯤 에서 그만둬야 한다고 하니, 현자 와 같은 말도 해주었다. 하긴, 막차 기다리다가 못 떠날 수도 있었다. 헤지펀드들의 자금 운영은 예측 불 가였으니 미리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쓰리고를 외쳐도 될 만큼 좋은 상황에서 스톱을 해야 한다는 게 아쉬움을 남겼을 뿐이다. 게다 가 간이 명세서를 보면 더 벌어들 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 서 안 보고 있었다.

"에? 진짜로 까맣게 잊고 있던 거야?"

설명을 모두 들은 티파니는 입이 떡 벌어졌다.

"묵혀놨던 일도 좀 있었지. 한미 정상회담도 코앞이고, 터치폰과 DAP, 넥스트 뮤직과 같은 신제품 발표회도 조만간 해야 하잖아."

"늦게 본다고 이미 딴 돈이 사라 지는 것도 아니고. 그럼, 지금 확인 해볼까?"

티파니의 말에 유재원은 곧장 컴 퓨터 앞에 앉아서 ID톡을 실행했 고, 개인 문서 보관함에서 신일본 투자은행 2분기 특별 수익률 보고 서라는 IDW 파일을 열었다. 그러자 유재원의 모니터 위로 무수한 숫자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초기 일본 공략에 사용된 자금은 100억 달러였다.

유재원의 나스닥 투자 수익금은 백호 펀드와 IMF출자 등에 통 크 게 쓰였다. 그중에서 행방이 묘연 했던 일부 자금이 있었는데, 바로 그 돈이었다. 그렇다고 딱 100억 달러만 사용하고 말았던 건 아니다. 상황에 따라 운영 자금의 규모를 추가하거나 줄이는, 탄력적인 방식 으로 융통성을 최대한 살렸다.

당연하게도 어떤 액수로 운영을 하든, 레버리지는 항상 극대화했다.

이를테면 닛케이 지수 공략에서 는 공매도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증거금을 좀 넣으면 보유 액수 이 상으로 공매도를 칠 수 있는데, 지 수가 하락 중일 땐 그야말로 땅 짚 고 헤엄치는 것처럼 쉽게 수익을 냈다.

" 와아."

유재원이 불러오기를 한 IDW 파일에는 시간 순서에 따라 자금이 어떻게 운용되었는지, 얼마의 수익 을 냈는지 일목요연하게 담겨 있었 다. IDW 파일 안에 스프레드시트 로 만든 표와 입체 그래프가 있어 서 숫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사람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체적 인 수익률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첨부된 그래프를 하나로 붙여서 재생시키면 아예 짧은 애니 메이션으로 수익률이 자라나는 게 딱 보였다.

모습은 마치 하늘을 향해 무섭게 머리를 드는 뱀처럼 위협적인 형상 이었다.

"클린턴 대통령만 아니었으면 천 장을 뚫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참 아쉽네."

"천장? 그래프가 더 올라가면 y 축 숫자만 바뀌는 거 아니야?"

티파니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공대 감성 이 충만한 티파니인지라 기술적인 이야기는 참 잘 되는데, 감성적인 면에서는 살짝 핀트가 맞지 않을 때가 있다.

하여튼, 클린턴에게 전화를 받고 청산을 시작했고, 청산은 하루 만 에 끝났다. 클린턴의 전화가 오기 전부터 일본 공략의 끝은 얼마 남 지 않았다고 인식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쉽게 발을 뺄 수 있는 상품 들로 대부분 교체를 해놓은 상태였 다.

"그래서 수익률은 유재원은 티파니에게 어디서 어 떻게 돈을 벌었는지, 시시콜콜하게 설명하진 않았다. 항목이 수백 가 지가 넘는 것이 제일 큰 이유였지 만, 두 번째 이유로는 티파니가 '왜'라는 질문을 잘했기 때문이다.

어디에 무슨 상품을 투자했는지 말하면 왜 그랬냐고 이유를 물어보 는데, 그걸 설명하기 시작하면 끝 도 없었다.

유재원은 페이지 다운 버튼을 꾹 눌러 문서의 제일 마지막 부분을 모니터에 띄웠다. 그러자 딱 보이 는 하나의 그래프, 하나의 숫자.

"최종 수익률은 434.41%."

434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가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 세 달 만에 434억 달러를 벌었다는 거야?"

티파니의 호들갑도 뒤따랐다.

전체 잔고는 원금 100억 달러에 수익금 434억 달러가 더해져서 534억 달러라는 빛나는 숫자를 자 랑하고 있었다. 티파니도 이 숫자 까지는 예측하지 못한 모양인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가 조금은 위화감이 드는 표정이 뒤늦 게 떠올랐다.

"이거 세상이 너무 이상한 거 같 아."

그도 그럴 것이 자기는 무더운 텍사스에서 모래바람 맞아가면서 유정 채굴을 해서 그나마 대박을 터트릴 수 있었다. 그야말로 열악 한 환경이라 공주님처럼 자랐던 티 파니에겐 생고생이나 다름이 없었 다.

천만 다행히 유정에서 검은 황금 이 솟구쳤고, 덕분에 외할아버지로 부터 큰 보상을 받았다. 그런데 유 재원은 샌프란시스코에 가만히 앉 아서 본인의 수백 배를 벌어들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티파니에게 유 재원은 434억 달러라는 수익률을 벌어들일 수 있는 이유에 대해 간 단히 설명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잖아!"

모든 투자의 본질은 하이 리스 크, 하이 리턴이다.

이번 일본 공략도 예외는 아니었 고, 유재원에게도 큰 모험이었다.

원래 이때 닛케이 지수가 좀 내 려오긴 해도, 후지산이 무너진 것 처럼 가파르게 떨어진 것은 아니었 다. 유재원은 본인이 알고 있던 일 본의 굵직한 스캔들을 엮어서 일본 이 가지고 있던 허상 같은 신용도 의 실체를 세계만방에 알리면서 어 마어마한 폭락이 일어났다.

닛케이 지수는 고점대비 40%가 하락했다.

2만 포인트 대에서 하락을 예측 하고서 풋옵션을 산 사람이 있다면 몇 백 퍼센트의 수익이 아니라, 수 천수만 퍼센트에 달하는 수익을 낼 수도 있었다. 물론 완전 이론적인 이야기인지라 실제 그런 사람이 있 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능했 다.

"나는 일이 까딱 잘못되었으면 100억 달러 다 잃을 수도 있었어.

아니, 최악이었다면 빚이 생겼을 수도 있고."

유재원의 설명에 티파니의 의문 은 조금 해소되었다. 그러다가 다 시 눈빛이 강렬해졌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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