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권 1화
"흐음?!"
유재원은 거의 하루를 IDDC 98 행사장 점검을 위해 다 보냈다.
많은 시간을 쓴 만큼 꼼꼼한 눈 으로 살펴보았다. 부대마다 꼭 있 는 행보관님들처럼 하얀 면장갑을 끼고 창문 틈새 하나까지 모두 다 점검한 건 아니지만, 눈에 보이는 인테리어나 각종 부스의 준비 상태 를 세세하게 챙겨 보면서 피드백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점적으 로 점검한 건 당연히 메인 스테이 지 무대였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PC세계
천하통일로 인해 이젠 존재하지도 않는 일이 되었지만, 과거 MS윈도 우가 대세이던 때가 있었다.
윈도우 98 발표회에서 플러그앤 플레이 기능의 시범을 보이던 게이 츠는 생각지도 못한 망신을 당했다. 스캐너를 PC에 연결하자 뭔가 윈 도우가 불안해지더니 블루스크린이 떠버린 것이다. 쇼맨십의 달인이었 던 게이츠답게 그 상황에서도 당황 하지 않고 위기를 넘겼지만, 그 모 습이 인터넷에 박제가 되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
"보스, 미진한 부분이 있습니 까?"
흐음 하는 소리에 레밍턴이 민감 하게 반응했다.
유재원과 함께 행사장을 돌아보 면서 체크 중인 레밍턴은 지금도 긴장의 끈은 놓치지 않았다. 식당 부터 체험관 그리고 메인 스테이지 까지 모두 체크하면서 수정해야 할 것들이 수두룩하게 나왔던 탓이다.
더욱이 유재원이 언급한 것은 단 순히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나오는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혹여 모 르고 지나쳤을 경우엔 문제가 발생 할 수도 있는, 대규모 행사 현장에 대한 노하우가 있는 사람만이 지적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단적으로 종교적 상징물이 들어 간 배너라든가, 준비된 식단에서 할랄푸드나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 뉴 등등, 당사자들에겐 매우 민감 한 사안들을 유재원은 빼먹지 않았 다.
사실 유재원도 개인적으로는 이 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다. 그렇지만 기업인의 입장에서 괜한 오해를 사는 것보다는 미리 준비해 논란을 피하는 게 좋았다.
하여튼, 메인 스테이지 점검을 마친 유재원의 입에서 좋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기에 레밍턴은 괜히 걱 정이었다.
"아뇨, 확실히 메인 스테이지 준 비에 엄청나게 공을 들인 게 보이 네요."
선명한 대형 프로젝터 스크린에 조명도 완벽했다. 마이크와 연결된 스피커의 세팅도 좋아서 거대한 메 인 스테이지의 끝까지 웅웅거리는 것 없이 목소리가 잘 전달되었다.
다만 걱정인 것은 유재원 본인이 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살짝 떨렸다.
어렸을 때, 컴덱스 무대에 서서 에그 PC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발표했을 땐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떨리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는데 이번엔 뭔가 좀 다른 느낌이다. 아 무래도 단독으로 IDDC 98을 개최 하는 것이고, 다양한 서비스와 신 제품을 소개하는 행사이다 보니 옛 날과는 좀 다른 부담감이 있는 것 같다.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아요."
유재원은 디데이가 되면 거짓말 처럼 자신감이 가득 찰 거라 믿었1998년 8월 1일. 토요일.
유재원은 아침 일찍 일어나 평소 와 같은 루틴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집안 피트니스룸에서 간단한 운동 을 했고,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 아침을 간단히 먹었다.
메뉴는 든든한 된장국.
한국 사람들의 밥상에서 기본 메 뉴라 할 수 있는 단순한 음식이지 만, 토요일이라고 쉬는 티파니가 직접 와서 끓여준 것이라 각별했고 맛도 있었다. 유재원이랑 교제를 막 시작할 때만 해도 티파니는 한 국 음식은 전혀 몰랐던 사람이었는데, 이젠 웬만한 미국의 한식당에 서 나오는 것보다 더 잘하게 되었 다.
물론 유재원도 티파니가 좋아하 는 음식들 몇 가지는 뚝딱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유재원이 가진 재산만 해도 365 일을 셰프를 초청해 요리를 만들어 달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지 금도 평소엔 그렇게 하고 있다. 대 신 티파니가 집에 찾아올 때만큼은 예외였다. 유독 자신이 만든 음식 을 먹이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건 티파니가 본인의 어 머니를 보고 절로 체득한 것으로 생각된다. 마리나 핑크 여사님의 음식 솜씨는 전문 요리 프로그램을 단독으로 진행해도 될 만큼 좋았으 니 말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밥을 차려 주는 티파니의 마음이 느껴져서 좋 았다.
그렇게 든든한 한식으로 차려진 아침을 먹은 유재원은 서재로 가서 밤새 쌓인 뉴스들을 보았다. 당연 히 종이 신문이 아니라 넥스트컴의 뉴스 페이지와 ID톡의 메시지함에 쌓인 비서들의 스크랩을 보는 것이 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전명헌 대
통령께 감사
-북한, 미국 제안 수용하지 못할 이유 없다!
-한반도의 대립 역사 종식되나? 판문점 종전 선언 곧 가시화!
-일본, 강력 반발! 북핵뿐만이 아니라 미사일 프로그램도 해체 필 요!
제일 먼저 보이는 건, 유재원을 통해 급물살을 타게 된 종전 선언 이야기였다.
저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명헌 대통령이 북한과의 공동 제안을 클 린턴에게 전했고, 클린턴이 이에 몇 가지 조건으로 화답하면서 공은 다시 북한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클린턴의 친서를 가지고 북한으 로 들어갔던 메신저는 김대중 총리 였다. 원칙적으로는 통일부 장관을 보내도 괜찮았다. 하지만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서 김대중 총리가 직접 움직인 것이다.
그렇게 북한에 간 지 거의 한 달 정도가 지나서, 다들 기다림에 지 쳐갈 무렵. 바로 어제 북한에서 위 와 같은 답변이 온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조건이 달려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한반도 평 화체제를 위해서라면 100번이라도 선언할 수 있어.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건 그냥 들 으면 평화롭게 지내자는 이야기 같 지만, 여기에는 주한 미군에 대한 논의가 들어가 있는 단어였다. 평 화처럼 좋은 단어에 이상한 의미를 섞어 놓는 게 북한이 잘하는 일이 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논 의가 가능한 사안이었다. 큰 틀에 서는 합의가 나왔으니, 디테일은 나중에 잡아도 충분하다.
그렇지만 이 점을 놓치지 않고 강력히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민주한국당 사람들이었다. 한 국 정치 세력 중에 가장 보수적인 이들은 북한과의 극한 대립이 있어 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북한과의 종전 선언, 이면에 개 헌 야심 있다!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야합 이 있어서 안 된다!
놀랍게도 민주한국당에서는 전명 헌의 큰 그리을 읽은 것처럼 개헌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종전 선언 후, 개헌이라는 로드 맵은 유재원이 그리고 있는 21세기 새로운 한국으로 가는 가장 큰 관 문이었다.
다들 종전 선언에 관심을 두는
중에 뜬금없는 개헌 타령인지라 이 들의 주장에 아직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없다. 하지만 종전 선언 후에 개헌이 시작되면 이 포석이 뭔가 변수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봐야 역사의 큰 수레바퀴는 진작에 굴러가기 시작했는데 말이 지."
사마귀가 제 딴에는 용감하게 수 레바퀴 앞을 막아도, 수레는 묵묵 히 앞으로 갔다. 그걸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마귀처럼 밟혀 죽는 것 밖에 답이 없다.
"뭐가 그리 재미있어?"
유재원이 컴퓨터 앞에서 혀를 찰 때, 티파니가 옆에 앉으며 물었다. 주방 정리를 이제 막 마쳤는지 손 에는 물기가 좀 남아 있었다.
"시대가 바뀐 것도 모르고 헛소 리하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티파니의 물음에 유재원은 한국 의 정치 상황에 대해 짧게 설명해 줬다. 티파니에게 한국이란 유재원 의 고향 나라였고, 그것만으로도 미국 다음으로 관심을 주기엔 충분 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관심을 보이었기에, 짧은 유재원의 설명에 한국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엔 충분했다.
"그래! 뉴스는 이제 다 본 거 지?"
"응? 웅!"
"그럼, 이제 출발할 시간이야!"
설명을 다 들은 티파니가 다시금 유재원을 잡아끌었다. 유재원도 두 말없이 컴퓨터를 종료하고 자리에 서 일어났다.
오늘이 바로 결전의 날이었다.
실제 행사의 시작은 오후였지만, 호스트인 유재원과 티파니는 할 일 이 많았다. 스타일링부터 리허설까 지. 당장 아침 8시부터 본격적인 스케줄의 시작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뉴스를 챙기는 것까 진 평소와 같지만, IDDC 98이 열 리는 앞으로 3일 동안은 정신없이 바쁠 예정이다.
"나오셨습니까. 그럼 출발하겠습 니다."
밖으로 나가니 김대석도 완벽하 게 대기 상태였다. 준비된 자동차 에 오르자 유재원은 집에선 느끼지 못했던 긴장감과 함께 심장이 다시 뛰었다.
-신사숙녀 여러분. ID 그룹 유재 원 회장입니다.
묵직한 중저음의 아나운서가 가 장 단순한 소개로 유재원의 등장을 알렸다. 그러자 어두웠던 메인 스 테이지 왼쪽 가장자리에 스포트라 이트 하나 뜨면서 유재원을 비췄다. 거기엔 스니커즈에 청바지, 그리고 하늘색 스웨터를 입은 유재원이 있 었다.
장내에 가득한 이들이 그 모습에 박수와 환호를 했고, 유재원은 한 손을 들어 화답하며 무대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메인 스테이지 무대 중앙 에도 옅은 조명이 들어왔고, 거기 에 원래 자리하고 있던 간소한 소 품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의 어느 집에나 하나씩 있는 카우치 소파, 그리고 맞은편에는 평범한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유재원입니 다."
메인 스테이지 중앙에 와서 허릴 꾸뻑 숙이며 예의바르게 인사부터 하는 유재원이다. 그러면서 작게 한숨을 쉬자 긴장감을 푼 유재원은 박수와 함께 멘트를 이어나갔다.
"다들 아시다시피 IDDC 98의 첫 번째 날 발표할 것은 바로 텔레 비전과 관련이 있는 혁명적인 서비 스죠. 긴 말 필요 없이 바로 보여 드리죠."
유재원은 곧장 소파에 앉았고, 뭘 찾는 듯 좌우로 두리번거렸다.
"텔레비전을 켜야 하는데, 리모 컨이 어디 있죠? 음, 레밍턴 총회 장님! 무대는 잘 만드셨는데 리모 컨을 빼먹으신 거 같아요! 리모컨 좀 가져다주실래요?"
도저히 못 찾겠다 싶은 표정이 된 유재원은 목소리를 높였다. 평소의 말투가 아닌, 누가 들어도 연 극 톤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목소리 였다.
곧이어 스포트라이트가 하나 더 켜지면서 이번엔 무대의 오른쪽 가 장자리를 비췄다. 곧이어 카트를 밀면서 들어오는 레밍턴 총회장이 있었다.
ID 그룹에서 유재원이 진행하는 발표회마다 빠지지 않는 상황극이 이번에도 등장한 것이다. 장내엔 작은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터졌다.
IDDC 98가 본격적으로 시작되 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카트로 쏠렸다.
이제껏 유재원의 발표에서 카트 에 실린 물건은 바로 발표회의 주 인공이었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레 밍턴이 끌고 오는 카트에는 은색 접시에 레스토랑에서 쓰는 둥그런 덮개가 덥혀 있는 상태였다.
무대 중앙까지 온 레밍턴은 유재 원에게 고개를 꾸뻑 숙이더니 바로 덮개를 열었다. 상황극이라 가정하 고 몇 마디 대사를 주고받을 수도 있었지만, 의외로 무대 울렁증이 있는 레밍턴에게 그 정도는 무리였 다.
모두의 시선이 카트 위로 쏠렸 다.
그러나 허무함이 확 느껴질 만 큼, 반전은 없었다. 카트 위에 있던 물건은 유재원이 찾았던 리모컨, 바로 그것이었다.
정확하게는 넥스트컴캐스트 마크 가 찍힌 신형 셋톱박스의 리모컨이 었다.
"겨우 찾았네요."
유재원은 리모컨을 익숙하게 잡 았다.
"이 리모컨이 익숙한 분들이 참 많을 겁니다. 북미에서 넥스트컴캐스트, 아니 이제는 타임워너넥스트 컴의 케이블을 보시는 분들은 거의 700만 가구에 달하니 말입니다. 자 랑은 아니라 사실만 이야기해드리 는 겁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