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권 10화
-공수처는 이제 설명해드리지 않 아도 되겠지요?
"그럼요."
전명헌 정부의 헌법 개정안에는 당연하게도 공수처 설립 조항도 들 어가 있었다. 이른바 헌법에서 존 재를 증명하는 헌법 기관이라는 것 이다. 공수처장 임명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회에서 인준을 받는 형식이다. 그리고 임명 전에 인사 청문회를 하도록 했다.
아직은 장관들 임명에는 인사 청 문회 절차는 없는데, 공수처장에게 만은 적용토록 한 것이었다.
-그리고…… 국가원로자문회의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를 폐지하는 대신에 과거사 위원회가 헌법 기구 로 격상되는 게 특이합니다.
국가원로자문회 의는 군사정 권의 잔재 중 하나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결단으로 형 장의 이슬로 사라진 전두환의 꼼수 였다. 국가원로자문회의의 의장은 직전 대통령이 되는데, 이를 통해 전두환의 후임으로 대통령이 된 노 태우를 꼭두각시처럼 다루려고 했 다.
그런데 이 국가원로자문회의에는 결정적 결함이 있으니, 법조문에 '자문을 둘 수 있다.'라고 되어 있 어서 선택권을 후임자에게 준 것이 다. 강제성이 없으니 노태우 대통 령은 당연히 국가원로자문회의를 설치하지 않았고, 상황 정치의 욕 망도 간단하게 무마되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역시 마찬 가지다.
이곳은 남북 평화 통일 달성에 필요한 모든 정책 수립에 관여하여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자문에 응하 기 위해 만들기로 한 헌법 기관이 다. 하지만 통일부의 업무와도 중 복이 되고 그간 남북 관계에서 딱히 도움이 되는 일은 없었기에 전 명헌은 과감하게 해체하는 걸 선택 한 모양이다.
대신 신설되는 건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 시작한 역사 바로 세우기의 강화 확장판인 과거사 위원회였다.
-생각보다 권한이 막강합니다. 조사 범위도 5.18이나 6.10, 4.3을 넘어서 일제강점기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민족 배신자들에 대한 기본권을 제한한다는 조항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대통령께서 친 일파들의 재산 환수도 추진하실 모 양입니다.
친일파 재산 환수는 전명헌의 생각이 아니라 유재원의 의견이었다.
명분은 간단했다.
IMF로 국가가 어려운 상황인데, 친일 매국노들이 축적한 재산을 환 수하면 정의도 구현하고 나라에도 큰 보탬이 될 거라고 말이다.
"와, 괜찮네요."
유재원은 당연히 반색했다.
곧장 컴퓨터를 조작해서 화면에 띄워진 개정안에서 관련 내용을 바 로 찾아봤다.
유재원 혼자서 아무리 세금을 많 이 내도, 사람들 여럿 모이면 이보 다 더 큰돈을 만들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특히 친일파들은 나라 팔아먹은 돈으로 어마어마한 재산 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라 경제에 보탬이 될 거라는 건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다만 유재원이 바란 건 친일파 재산환수 특별법 정도였는데, 통이 큰 전명헌은 아예 헌법에 박아 넣 어버린 모양이다.
"내일 대한 일보가 어떻게 나올 지 궁금하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사회주의 개헌이라고 프레임을 잡았던 대한 일보는 사주부터 신문사까지 친일 전력이 화려한 곳이었 다.
대한일보는 제딴엔 준비된 한 방 을 날렸다 생각했을터인데, 친일파 재산환수라는 크로스카운터가 터져 버렸다. 앞으로 그들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매우 궁금해지는 유재원이었다. 어서 빨리 내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로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대통령 전명헌입 니다.
전명헌 대통령이 밝은 표정으로 모니터 속에 등장했다. 바로 한국 넥스트컴의 대통령과의 대화 페이 지였다.
정권 창출 초기에는 종종 사용했 던 대통령과의 대화 홈페이지였는 데, 남북 정상회담부터 시작해 판 문점에서의 남북미 정상의 합동 종 전 선언이 있을 때까지 총알처럼 달리면서 넥스트컴의 대통령과의 대화 페이지는 휴점 상태가 되었다.
그곳에 다시금 불이 들어왔고, 전명헌 대통령이 등장한 것이다.
-전명헌 정부의 헌범 개헌안이 어제부로 전격 발표되었습니다. 그 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드리기 위해서 오랜만에 이 자리를 만들었 습니다.
"음? 응?"
유재원도 서재에서 정자세로 앉 아서 지구에서 제일 빠른 개인용 컴퓨터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 다.
참고로 세상에서 제일 빠른 컴퓨 터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인텔 에서 신제품 샘플을 보내주었는데, 펜티엄 IV에 RDRAM을 채용한 시스템이었다. 펜티엄 IV의 기본 작동 속도는 무려 1.6GHz였고 하 이퍼쓰레드라는 1개의 물리 프로세 서가 2개의 쓰레드를 지원하는 기 술도 채용되었다.
기존의 펜티엄 아키텍처를 버리 고 넷버스트 아키텍처라는 걸 사용 했는데, 넷버스트 아키텍처의 특징 이 고클럭과 하이퍼쓰레드였다. 기 존의 펜티엄 아키텍처로는 아무리 해도 고클럭 달성이 어려우니, 작 동 속도를 높일 수 있는 방식으로 CPU 구조를 바꾼 것이다.
전문적인 요소로 들어가 보자면 RISC CPU의 구조를 적극 채용했 고, 슈퍼스칼라 구조의 파이프라인 을 대거 채용했다. 파이프라인 스 테이지가 훨씬 길어져서 작동 속도 를 올리는 데 수월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도 있었다.
파이프라인 단계가 깊어질수록, CPU 내에서 처리를 기다리는 명령 어들이 쌓이게 된다. 만약 이렇게 미리 채워놓은 명령어의 적중이 실 패하면, 파이프라인을 몽땅 비우고 새로운 명령어를 쌓아야 한다.
덕분에 작동 속도는 높은데, 쉽 게 그 속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른바 클럭당 처리 능력 IPO} 좀 낮아졌기 때문이다.
게임과 같은 다양한 연산을 하는 프로그램이라면 1.6GHz짜리 펜티 엄IV는 1.2GHz짜리 펜티엄3와 비 슷한 속도가 나와 버린다.
그렇지만 인코딩이나 디코딩 같 이 분기 예측이 잘 적중되는 작업 에서라면 넷버스트 아키텍처가 큰 힘을 낼 수 있다. 게다가 하이퍼쓰 레드라는 기술까지 더해지면 경쟁 사인 AMD의 최신 제품보다는 확 실히 더 뛰어난 성능을 보여준다.
여기에 RDRAM이라는 것도 대 단히 진보적인 메모리였다.
1990년 창업한 램버스사에서 만 든 메모리로 일반적인 메모리보다 두 배의 전송 속도를 뽐내는 어마 어마한 물건이었다. 램버스사 자체 적인 공장은 없고, 기술 개발만 하 는 회사인데,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특허 괴물이었다.
특허가 많으면 많은 것이지, 괴 물이라고 칭하는 건, 램버스사가 본인들의 기술과 조금만 관계가 있 다 싶으면 무조건 소송을 거는 것 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과거형이라는 거다. 특허 괴물이었다라고 한 것은, 지 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97년부 터 램버스사의 경영 실적은 매우 악화되었다. 그걸 알고서는 일성 전자에서 접촉해 인수 협상을 시작 한 상태였는데, 일성 전자가 부도 가 나면서 협상도 올스탑이 되었다. 하지만 ID 테크놀로지의 인수가 끝나고 나서 재협상이 시작되었고, 이제는 램버스사도 ID 그룹의 일원 이 된 것이다.
당연히 유재원은 비슷하기만 하 면 무조건 소송을 걸 생각도 없고, 라이센스 비용을 높게 받을 생각도 없었다.
실리콘 반도체 기반의 컴퓨터는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유재원의 성에 차지 않다. 유재원의 바람은 실리콘 반도체 컴퓨터의 시대가 어 서 끝나고 양자 컴퓨터의 시대가 왔으면 하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 라는 걸 잘 안다.
대신 해줄 사람도 없으니 양자 컴퓨터 개발에 대해 가장 많은 돈 을 투자할 사람도 유재원이니 말이 다.
하여튼 새로운 펜티엄IV와 RDRAM 시스템은 기존의 펜티엄3 보다는 확실히 빨랐다. 그래서 기 존에 사용하던 AMD 시스템을 내 려놓고 펜티엄IV 기반의 i웍스가 유재원의 주력 시스템이 되었다.
당연히 AMD도 반격을 준비 중 이다. 유재원은 편견 없이 기다리 는 중이다. AMD의 반격이 펜티엄 IV를 능가한다면 당연히 그쪽으로 쉽게 옮겨갈 수 있다. 사적으로는 AMD가 좀 더 호감이지만, 공적으 로는 인텔이든 AMD든 안정성이 확보되고 속도만 빠르면 된다. i웍 스의 최고사양 모델에 기본 채용되 고 싶다면 최고의 CPU를 내놓으라 는 것이 유재원의 방침이다.
하여튼 그렇게 잘 갖춰진 컴퓨터 로 전명헌의 대통령과의 대화 페이 지를 보고 있는데 유재원의 얼굴에 살짝 의문이 생기면서 '응?'하는 소 리가 절로 난 것이다.
"김 비서님, 잠깐 서재로 와보실 래요?"
-예, 회장님.
급기야 유재원은 김대석 비서실 장을 서재로 불렀다.
김대석은 서재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개인 사무실에서 근무 중이었 기에, 호출을 받자마자 바로 등장 했다.
"부르셨습니까?"
"여기 전명헌 대통령님이요. 얼 굴이 좀 달라지지 않았나요?"
유재원의 물음에 김대석은 모니 터 가까이 와서 헌법 개정안의 골 자에 대해 열띤 설명을 하고 있는 전명헌의 모습을 꼼꼼히 살폈다. 초당 1Mbps나 되는 고화질 스트리밍인지라 전명헌의 주름 하나까지 도 보였기에 가까이 다가갈 필요는 없었지만, 유재원의 가벼운 질문이 라도 확실히 대답하기 위해서 그렇 게 했다.
그렇게 몇 초간 모니터에 집중한 김대석이 입을 열었다.
"음, 주름이 느신 것 같고, 조금 피곤한 기색도 보입니다."
"그렇죠?"
유재원은 혼자만 알아보거나, 잘 못 본 게 아니었다.
확실히 전명헌은 좀 수척해진 모 습이었다. 유재원이 가장 마지막에 봤던 게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 국에 오셨을 때였다. 불과 3달도 지나지 않았던 때인데, 그 사이에 많이 수척해지셨다. 아무래도 종전 선언에 개헌 준비까지, 해야 할 일 이 많아서 과로를 많이 하신 모양 이다.
-누구는 통일이 어림없다 하는 데, 오히려 정부의 개헌안이야말로 통일을 가장 확실히 준비한 개헌입 니다.
다만 힘찬 목소리는 그대로셨다.
스피커를 통해 재생되는 전명헌 의 목소리는 ID 테크놀로지 본사에 서 만나 들었던 목소리와 큰 차이는 없었다.
-통일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분들 이 생각하는 통일의 방식이 무엇인 지 말입니다. 국군에 진격을 명령 해 위로 치고 올라가야 한단 말인 지, 아니면 북한이 스스로 무너지 길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지, 확실 히 입장을 표명해주길 바랍니다.
수척해진 모습과는 별개로 전명 헌 할아버지는 대통령에 임명된 지 아직 1년도 되지 않았지만, 벌써 3, 4년차 대통령의 모습이었다.
한마디가 정곡을 찔렀고, 핵심을 관통했다.
-오히려 그러한 생각이 세상 물 정을 잘 모르는 천진한 생각입니다. 전쟁은 생각해 볼 것도 없습니다. 평화를 위해 전쟁에 대비해야겠지 만, 이 좁은 땅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면 치명적이란 말입니다. 현 대전에서 안전한 후방이라는 건 없 습니다. 전 국토는 6.25때보다 더 초토화 될 것이고, 애써 이룩한 우 리의 경제성과도 6.25직후로 돌아 갈 겁니다.
정답이었다.
전쟁은 절대 불가다. 북한이야 생각이 좀 다를 수도 있지만, 한국 은 잃을 게 북한보다 훨씬 많았다.
아무리 외환 위기로 IMF가 터졌다 고는 해도, 북한과는 비교도 안 될 경제력이었다.
전쟁이 터지면 이게 다 사라지는 것이고, 북한이 붕괴하면 그건 그 것대로 문제였다.
중국의 남하, 대규모 난민들의 발생, 그리고 북한 군부의 돌발 행 동 등등.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으 로 돌입하면서 같이 망한다.
-결국, 답은 경제입니다. 우리와 북한의 경제적 격차가 줄어드는 만 큼, 통일의 비용도 크게 절약합니 다. 또한, 북한의 경제 발전에 우리 도 크게 기여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는 말 입니다. 그렇게 경제적 격차가 줄 어들고, 남북 간의 왕래가 쉽게 가 능해지면 문화의 차이도 줄 것이고, 그러면 통일도 쉽게 가능합니다.
전명헌은 본인의 통일론을 확실 히 밝혔다.
우파의 것도, 좌파의 것도 아닌 전명헌만의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안이 실행하려면 북한 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 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헌법에 그 문구를 넣어서 확실히 못을 박 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가지고 사회주의라고 말하는 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지요.
전명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채 팅창에 폭풍이 쳤다.
당연하게도 전명헌의 주장에 적 극 동의하는 네티즌들의 폭풍 채팅 이었다. 물론 절대 받아들이지 못 하겠다는 일부의 사람도 있었지만, 90% 이상은 전명헌의 의견을 지지 하는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대통령 비서실에서 직접 모니터링 중임을 항상 고지하고 있 었기에, 채팅의 내용에는 상스러운 표현은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해도 필터링 시스템에 의해 '***'로 대 체되기에 전명헌이 욕을 볼 일은 없었다.
-종전 선언이 이뤄진 마당에 이 제 와서 사회주의니 반공이니 하는 말을 하며 국민 여러분의 눈과 귀 를 현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들이 가장 불편해하는 건 바로 과거사 위원회와 친일파 재산 환수일 겁니다. 과거에 친일 부역 자들이 그들의 과오를 숨기기 위해 더욱 반공에 몰입했다는 건 익히 아는 사실이지요.
그러면서 전명헌은 살며시 준비 한 자료를 하나 꺼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