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93화 (493/1,007)

25권 2화

3층에 올라가자마자 추리닝에 슬 리퍼 차림의 남자가 그들을 경계하 며 용무를 물었다. 덩치는 상당했 지만, 억지로 몸을 불린 것처럼 탄 력은 없어 보이는 그런 몸이라 위 압감은 하나도 없었다.

안종철 팀장이 유재원에게 신호 를 줬다.

유재원은 사전에 받은 정보대로 도장을 보여줬다.

"돈 찾으러 오셨군요."

추리닝 남자는 유재원이 보여준 도장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막 고 있던 문을 열어줬다. 안으로 성큼 들어가 보니 작은 사무실이 나 왔다. 그 안에서는 조금만 텔레비 전을 켜놓고 짜장면을 맛있게 먹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딱 봐도 형님 할 것 같은 사람들 이다.

"어떻게 오셨수?"

이번에도 똑같은 물음이었고, 유 재원은 다시 한 번 도장을 보여줬 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며 돈 찾 으러 왔냐는 말이 나왔다. 그러더 니 웬 장부 하나와 인주를 가져왔 다. 인주를 묻혀 장부에 도장을 찍 으라는 것이었다.

유재원은 이번에도 순순히 하라 는 대로 했다.

"6735?"

장부에 찍힌 숫자를 보더니 캐비 닛 중 하나를 열었다. 슬쩍 보니 캐비닛 안에는 열쇠만 한가득 있었 다. 게다가 보기와 달리 숫자대로 정리도 잘 되어 있어서 6735번 열 쇠도 단번에 찾았다.

그렇게 찾은 열쇠를 유재원에게 넘겨주는데, 응대를 했던 떡대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 렸기더니, 질문했다.

"음? 근데 가방은 안 챙겨 왔습니까?"

전에 왔던 사람을 가방을 늘 챙 겨왔던 모양이다. 유재원이 대답을 하려는데, 옆에 있던 안종철 팀장 이 한 발 더 빨랐다.

"고객의 용무를 묻는 건 예의가 아닐 텐데?"

안종철 팀장과 떡대 사이에 살짝 눈싸움이 일어났다.

"아, 실수. 여기 돈 찾으러 오는 분들은 다 가방을 가져 왔거든. 당 신네들처럼 몸만 온 사람은 처음이 라 좀 특이해서 말이야."

떡대는 순순히 실수를 인정했다.

다행히 안종철의 경고에 더는 관 심을 보이지 않았다. 모자를 눌러 쓰고 마스크까지 하고 있는 유재원 이 특이한 모습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누가 금고를 열 람하든 도장만 확실하면 상관이 없 는 모양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용 무를 다 보면 벨을 누르고. 열쇠는 꼭 반납하시고."

곧 열쇠를 전해주면서 간단한 지 침도 알려줬다. 엘리베이터의 위치 도 턱으로 가리켰다. 진짜로 사무 실 안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 었다.

타 보니 층수를 선택하는 버튼은 지하, 3층 이렇게 딱 두 개였다. 그 러니까 금고는 지하에 있고, 거기 기까지 가려면 이 사무실을 지나쳐 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생각 이상 으로 훌륭한 구조였다.

그렇게 지하로 내려와 보니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긴 복도 가 나왔고, 복도마다 똑같은 문이 똑같은 간격으로 양쪽에 달려 있었 던 것이다. 문짝 하나가 금고 하나 라면, 적어도 100개의 금고가 이 안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6735라는 번호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유재원은 난관 에 봉착했다. 문짝마다 번호가 달 려 있긴 했는데, 6735라는 번호 자 체가 없었다. 문짝에 달린 번호들 은 세 자리 숫자였다.

잠깐 당황했지만, 답은 가까이 있었다.

돼지금고 명함에 206이라는 숫자 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까 위쪽 사무실에서 열쇠를 지키는 떡대들이 열쇠 주인은 도장으로 매 칭을 시킬 순 있어도, 열쇠를 꽂을 금고의 위치는 이용자만 알 수 있 었던 것이다.

"겉으론 허름했는데, 보안 의식 은 철저하네요."

덕분에 유재원의 보안 의식도 다 시 한번 상기되었다. 사설 금고도 이렇게 철저한 보안을 지키는데, 최근엔 할아버지의 일 때문에 긴장 의 끈이 살짝 놓인 것 같았다.

206번 금고는 어렵지 않게 찾았 다.

사무실에서 받은 열쇠를 두툼한 철문에 넣고 돌리자 철컥하는 묵직 한 소리가 나며 잠금 장치가 풀렸 음을 알렸다.

두꺼운 철문도 부드럽게 열렸다.

복도의 불빛도 어두웠고, 금고는 아예 조명도 켜있지 않아 안이 하 나도 보이지 않았다. 안종철이 먼 저 안으로 들어가 조명 스위치를 찾았고, 곧 불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유재원의 입에서 헉 하는 소리가 절로 터졌다.

마치 조폐공사 출고장처럼 현금 뭉치가 팔레트 단위로 쌓여 있는 모습에서 헉 소리가 나오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유재원은 부자다.

그것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부 자였다. 보유한 자산이 어느 정도 투명하게 공개된 사람들로 부의 순 위를 매기는 포브스지의 부자 순위 에서는 1등을 하기도 했다.

덕분에 세상에서 제일 부자인 젊 은이라는 타이틀도 얻게 되었다. 그렇다고 포브스지의 부자 순위에 서 1등을 해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것은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 같은 비상장 회사라든가 전 통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유럽 왕실 이나 자본주의가 태동했던 초기에 독점이나 과점으로 어마어마한 돈 을 쌓은 이들은 파악조차 힘들다.

대신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그렇게 포브스지에도 잡히지 않는 거대한 부자들보다 유재원의 현 금 동원력은 최강이라고 말이다. 막말로 당장 현금 100억 달러를 가 져다 쓸 수 있는 개인은 전 세계에 서 유재원뿐이었다.

"와."

그렇지만 유재원이 가지고 있는 돈은 전산망에 있는 돈이었다.

모니터로 보면 어마어마한 자릿 수를 자랑하고 있지만, 그 돈이 현 금은 아니었다. 현금으로 찾고자 하면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괜히 일만 복잡해지고, 그럴 이유 도 없어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현금을 찾지는 않았다.

덕분에 이곳 금고 안에서 팔레트 단위로 쌓여 있는 현금 덩이를 보 니 상상 이상의 비주얼 충격을 받 았다.

안종철 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지의 금고에 혹시나 이상한 것 이 있을까 경계하고 있다가 불이 켜지면서 드러난 비주얼적 쇼크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유재원에게 발탁되었고, 한국 지 역 정보 팀장에 올라 수십 명의 부 하 직원을 거느리게 된 안종철은 이후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리 고 유재원에게 발탁되기 전엔 어둠의 세계에서 온갖 잡일을 다 해보 기도 했다.

그런 안종철이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다행히 경험이 많은 만큼, 냉정 함도 상당히 일찍 찾았다. 팔레트 가 5개 있고, 한 팔레트마다 현금 으로 100억 원씩 쌓여 있다는 것도 곧 파악했다. 4개의 팔레트는 조폐 공사에서 막 만든 것처럼 사용 흔 적이 하나도 없는 신권이었고, 1개 팔레트의 100억 원은 사용 흔적이 많고 일련번호가 연속되지 않은 손 때 묻은 돈으로만 모아놓은 것이라 는 것도 한눈에 파악했다.

유재원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부피의 현금 뭉텅이에 입 이 떡 벌어지긴 했지만, 그 가치가 어느 정도 머릿속에서 계산이 되자 충격이 빠르게 완화되었다.

"이렇게 부피가 큰데도 다 해서 겨우 500억 정도뿐이네요."

"아, 아! 저도 500억이라고 파악 했습니다만."

유재원의 말에 안종철은 동의했 다. 다만 '겨우'라는 말은 좀 아니 었다.

현금 500억이 '겨우'가 붙을 액 수는 절대 아니었다.

ID 그룹의 정보 팀장인 안종철은 어디 가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자 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 안 종철도 500억을 모으려면 본인의 연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00년을 모아야 하는 거금이었다.

그렇지만 안종철은 유재원의 말 에 토를 달지 않았다.

안종철 본인의 입장에서는 어마 어마한 거금이었는데, 유재원이 보 면 겨우라는 말은 전혀 허언은 아 니었으니 말이다.

ID 인베스트먼트가 올해 일본에 서 400억 달러를 넘게 벌었다고 했다. 한국 돈으로는 50조 원이 넘는 돈이었다. 이걸 365일로 나눠보면 하루에 1천억 원 이상을 벌어들였 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이기도 했 다.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500억 원 정도면 반나절이 충분했다. 현 자타임이 절로 일어나는 안종철 팀 장이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산더미 같은 현금도 좀 시시해졌다.

덕분에 주변을 보는 시야도 더 넓어졌고, 특이한 것이 눈에 들어 왔다.

"회장님, 저기에 또 금고입니다."

이 공간 자체가 금고다. 엘리베 이터가 지하로 내려온 깊이나, 벽 면에서 느껴지는 단단함을 따져 봤 을 때 웬만한 은행 금고보다 튼튼 할 것 같다. 그런 금고인데 또 금 고라니.

" 진짜네요."

안종철 팀장이 가리킨 곳을 보니 작은 선반 위에 놓인 금고가 있었 다. 그 금고는 가로 40센티, 세로 50센티에 깊이는 60센티 정도의 아 담한 크기를 자랑했다.

금고의 잠금 방식은 다이얼이었 다.

겉으로는 작은 흔적도 없어서 비 밀번호가 뭔지 짐작도 되지 않지만, 유재원은 열 수 있을 것 같다는 느 낌이 왔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이종철 팀장을 돌아보게 됐다.

"아, 네. 용무가 끝나시면 부르십 시오."

유재원의 눈빛을 받은 안종철 팀 장은 바로 뒤로 물러서더니 금고 밖으로 나섰다.

안종철 팀장도 눈치가 보통은 아 니었다.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남아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가 장 큰 힘은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날카로운 촉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유재원이 잠깐 자리를 피해달라는 눈빛도 바로 알아보고 움직인 것이 다.

혼자가 된 유재원은 가지고 온 수첩을 펼쳤다.

수첩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가득 했지만, 의미 없이 큼지막하게 써 진 숫자도 있었다. 유재원은 그중 에서 206과 함께 적혀 있는 숫자 4개를 금고 다이얼에 입력했다.

찰칵.

역시나 할아버지의 수첩은 단순 명쾌했다. 꼬아 놓는 것 하나 없이, 매우 직관적이었다. 206이 여기 금 고의 번호라면, 함께 적힌 4개의 숫자는 금고 안에 있는 작은 금고 의 비밀번호이지 않을까 하는 유재 원의 직감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유재원은 바로 금고의 문을 열었 다.

"CD, 스테레오테이프, 베타 비디 오테이프, 필름?"

CD는 음악용 컴팩트디스크를 말 하는 게 아니라 한 뭉치의 증서를 말하는 것이다. 바로 양도성 예금 증서다. 증서 한 장을 가지고 은행 에 가면 5천만 원이 든 통장을 만 들어준다. 무기명라서 누구나 만들어준다.

그런 증서가 100장짜리로 두 묶 음이 있으니, 합쳐서 100억 원이다.

스테레오테이프나 비디오테이프 의 라벨에는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사람들이 적혀 있었다. 스테레오테 이프는 전화 통화나 도청된 대회일 것이고, 베타 비디오테이프는 무슨 내용인지 짐작은 되지만 보고 싶진 않았다.

유재원은 마지막으로 필름을 들 었다.

마이크로필름도 한 통 있었고, 대중적으로 많이 쓰는 35mm 롤필름도 있었다. 현상이 끝난 필름이 라서 유재원은 바로 불빛에 비춰봤 다.

"음, 이건 문서 모음이네."

마이크로필름이 애초에 문서를 담기 편하게 만든 물건이었다. 수 표를 비롯해서 몇 가지 민감한 내 용을 담고 있는 서류들이 담겨 있 었다. 35mm 필름의 경우엔 사람들 이 만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흐음, 돈과 폭탄이구나."

유재원은 돼지금고 안에 든 것들 을 돈 그리고 폭탄, 두 개의 단어 로 요약했다. 동시에 할아버지가수첩과 함께 금고 명함, 도장을 준 이유를 이제 확실히 알았다.

수첩과 작은 금고에 있던 걸 폭 탄으로 써도 되고, 아니면 전명헌 이 했던 것처럼 떡값을 주면서 영 향력을 유지해도 된다는 것이다.

특히 팔레트에 쌓인 현금으로 떡 값을 준다면 추적을 당할 확률은 지극히 낮아진다. 물론 돈을 전달 할 때가 문제인데, 그것도 큰 장애 물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본인의 오른팔인 김 광일을 유서에 언급한 이유가 다 있었다. 김광일 전 비서실장에게 물어보면 방법은 쉽게 나올 것이다.

남은 문제는 유재원의 선택이지 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서 작은 금고 를 닫으려는데, 이상한 게 보였다. 금고 문짝에도 서랍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쪽지 하나와 도장이 있 었다. 쪽지를 펼쳐보니 이번엔 LK 뱅크라는 단어 5252라는 숫자가 있 었다.

돼지 금고를 열기 위해 필요했던 준비물과 똑같은 물건들이다.

"뭐야? 이런 금고가 여기 하나가 다가 아닌 모양이네. 그러면 거기 도 여기랑 비슷하려나 몰라?"

실제 유재원은 나중에 사람을 보 냈을 때 LK뱅크 역시 꼬리에 꼬리 를 물고 이어지듯 또 다른 도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이어 진 게 15개쯤 되었기에 전명헌의 비자금 스케일에 혀를 내두를 수밖 에 없었다.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유재원은 굳은 표정으로 금고를 나섰다.

"볼일 다 보셨습니까?"

금고 앞에서 경계 중이던 안종철 팀장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 였다. 둘은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 고 들어왔던 때와는 반대의 절차로 돼지금고를 벗어났다.

금은방 거리로 나서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어둠의 세계에서 빛 의 세계로 나온 기분이라고 할까. 할아버지 덕에 이런 신기한 경험도 다 해보는 유재원이었다.

금은방 거리에 대기하고 있던 차 에 오른 유재원은 티파니 폰으로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내용은 일이 있어서 서울로 올라왔고, 출 국 전까지 지내야 할 것 같다는 이 야기였다. 그렇게 집과 통화를 마 친 유재원은 바로 다이얼을 돌렸다.

김광일 전 비서실장이었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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