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권 3화
다음 날.
-선관위, 대통령 서거에 의한 궐 위로 대선일 확정-개헌으로 인해 대통령 임기 변 경으로 보궐 선거가 아닌 정식 대 선.
-임기는 4년이고 재선도 가능
-선거일은 1999년 3월 2일
-다만 정권인수위원회 활동 기간 은 없음-1월 31일까지 후보 등록 가능. 이후 정식 선거 운동 시작!
권력에는 공백이 없어야 한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이러한 절대 명제에 따라서 대통령 선출을 위한 모든 절차를 확정하고 공표했다.
가장 논쟁의 쟁점이 되었던 것은 전명헌의 남은 임기를 대신하는 보 궐 선거냐 아니면 정식 대선이냐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불꽃처럼 화려하게 살았던 전명 헌이었다. 임기 중엔 IMF도 어느 정도 극복했고, 종전 선언도 했고, 최근엔 개헌까지 했다.
덕분에 대한민국 사람들은 전명 헌이 대통령에 몇 년은 있었던 것 처럼 느껴졌지만, 실제 전명헌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보낸 시간은 아직 1년도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보궐 선거로 남은 임기 를 대신하더라도 그 임기는 4년보 다 조금 길었다. 하지만 개헌으로 인해 대통령 권력 구조도 바뀐 만 큼, 선관위에서는 이번부터 아예 10차 개헌안을 바탕으로 하는 대통 령 선거를 치르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임기도 4년으로 확정되었 고, 재선도 가능해졌다.
대통령 선거가 본격적으로 궤도 에 올랐고, 각 정당은 후보 선출을 위해 바빠졌다. 일자가 너무도 촉 박했던 탓에 대부분 날림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으로 보자면 이런 상황에서도 준비가 어느 정도 된 사람이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 이 있었다.
가장 준비가 잘된 사람은 민주당 의 김대중 전 총리였다.
전명헌과의 연정으로 총리에 올 랐고, 행정부의 이인자로서 그 존 재감을 확실히 알렸다. 북에도 다 녀왔고, 경제 정책도 담당했으며, 전명헌이 위독할 때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서 안정감도 확실히 했다.
더욱이 총리직에서 내려온 덕에 이번 대선에 출마하는 것도 문제가 반면 본인이 그리고 있던 큰 그 림이 완전히 어그러진 사람은 통일 국민당의 이인제였다. 대통령 권한 대행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보 장된 기간은 겨우 두 달 남짓이었 다.
무엇보다 가장 큰 타격은 이번 대선에 나가지도 못한다는 점이었 다. 10차 개헌안에는 고위 공무원 이 대선에 나가려면 60일 전에 직 을 내려놔야 하는데, 이미 지나버 렸으니 말이다.
이인제가 이러한 위험 요소(?)를 감지하지 못하고 총리직을 수락한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빠 르게 전명헌이 고인이 될 줄은 몰 랐다. 이인제는 적어도 여름까지는 살아 계실 줄 알았고, 그러한 기간 동안 대통령 권한 대행을 열심히 수행해 2% 부족한 인지도를 쌓으 면 차기 대선은 따 놓은 당상이라 는 계산이었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김대중 전 총리 추대-통일국민당, 이번 대선은 후보 내지 않을 것-통일국민당, 고 전명헌 대통령 과 교감 있었나?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고 전명헌 대통령과 김대중 전 총리 사이에 차기 정권에 대한 교감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졌다.
"교감? 당연한 거 아니야?"
유재원은 김광일 비서실장을 만 나러 가는 길에 노트북으로 넥스트 컴 뉴스 페이지를 보며 누구보고 들으라는 듯 말했다.
전명헌 할아버지가 대통령을 하 면서 가장 큰 조언을 받은 건 유재 원이지만, 김대중 전 총리 역시 그 에 못지않았다. 그러면서 김 전 총 리의 인격이나 능력도 확실히 인정하게 되었고, 차기 권력으로 그를 점지를 한 것이다.
전명헌의 입장에선 통일국민당의 정권 연장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 만 본인이 사랑하는 대한민국을 전 보다 좋게 만들 능력이 있는 김 전 총리를 마지막 승부수로 띄운 것이 다.
그렇다고 통일국민당을 완전히 손을 놔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 니까 이인제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유재원에게 준 것이다. 물론 당권 이라는 게 당 대표에게 있긴 했지 만, 수첩과 자금이 유재원에게로 오면서 당권은 자연스럽게 유재원에게로 왔다.
전명헌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은 곧 증명되었다.
대선 준비로 정신없는 국회였지 만, 만에 하나 수가 틀리면 김창완 변호사의 공수처장 임명에 난항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주당 이 전력으로 협조하면서 별 탈 없 이 공수처장에 임명되었으니 말이 다.
유재원도 김광일을 만나서 전명 헌의 유지에 따르기로 했음을 밝혔 다.
"다행이로군요. 어르신께서는 혹시나 회장님께서 실망하지 않으실 지 걱정이 많았습니다."
전명헌의 오른팔답게 김광일은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 짐 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상자를 직접 준비한 사람이 김광일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김광일 비서실장님."
"예, 회장님. 아, 그런데 저는 이 제 비서실장이 아닙니다."
유재원의 부름에 답하던 김광일 은 비서실장이란 칭호에 살짝 머쓱 한 듯 머리를 긁었다. 덕분에 유재원의 시선은 김광일의 머리로 갔다 가 용감하게 전진하고 있는 이마의 기세로 눈을 돌렸다.
대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여튼, 앞으론 무얼하고 지내 실 거예요?"
유재원의 물음에 김광일은 난감 한 표정이 됐다. 지금 직위는 붕 떠버린 상태였다. 대통령 권한대행 이 된 이인제는 자기와 함께 했던 보좌진을 데려왔고, 본직이었던 미 래 그룹에서도 전명헌의 흔적들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왕자들의 싸움이 시작됐던 탓이다. 거기에서도 김광일의 자리는 없었다.
"ID 그룹에 커뮤니케이션 총괄이 사 자리를 신설하려고 해요. 김광 일 실장님을 그 자리에 모시고 싶 은데, 어떠세요?"
"예? 저를요?"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할아버지가 내놓으셨다는 말이 이런 식은 아니었던 걸까?
어쨌든 김광일은 꽤 놀란 모습이 었다. 반대로 유재원의 눈빛은 단 단했다.
할아버지는 잡을 수 있으면 잡으라고 했다. 이를 따르기로 한 유재 원이었으니 김광일도 당연히 손에 잡아놓겠다는 생각이었다.
" O "
"5三김광일의 고심이 길어졌다.
둘 사이에 말이 없어진 시간이 1 분은 쉽게 넘어갔다. 유재원은 그 모습이 살짝 답답하긴 했지만 재촉 하진 않았다.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ID 그룹의 이사 자리는 청와대 나 미래 그룹보다 훨씬 대우가 좋 았다.
기본적으로 연봉이 10억 원이 넘 었고, 비서와 기사는 물론 ID 글로 벌헤드쿼터빌딩의 높은 자리에 특 별한 사무실도 주어진다. 별도의 업무 추진비도 있다.
유재원은 김광일에게 이러한 사 항을 굳이 설명하진 않았다. ID 그 룹의 파격적인 대우는 이미 유명한 것이어서 일일이 언급할 필요도 없 었다.
그렇기에 김광일이 고심하는 건 금전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람 사이 에 풀어야 할 문제, 혹은 유재원이 아직 파악하지 못한 무형의 가치들 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1분 1초가 바쁘신 회장님을 앞에 두고 지체하고 있었군요."
침묵의 시간이 거의 3분 가까이 되었을 때, 김광일이 시계를 보더 니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과분한 제안은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운을 뗀 김광일의 첫 문장을 듣 자마자 유재원은 일단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이어질 이야기가 바로 그려지는 탓에 실망감을 감춰야 했 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국말은 원 래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언어였다.
"아직 마침표를 찍지 못한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김광일의 청와대 커리어는 이미 끝났고, 미래 그룹에서도 돌아갈 자리가 정리되는 중이었지만, 둘 중에 아직 공식적으로 해임 절차가 진행된 건 하나도 없었다.
전명헌이 없는 청와대엔 미련이 없었지만, 미래 그룹에는 아직 마 음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김광 일의 삶에 등대와도 같았던 전명헌 이 남긴 말도 있었다. 일단 청와대 에서 나온 다음, 미래 그룹에 한 번은 가봐야 했다.
"그럼, 찍고 오세요. 커뮤니케이 션 총괄 이사 자리는 계속 비워놓 고 있을 거니까요."
긴 고심 끝에 어렵사리 입을 열 었던 김광일을 향해 유재원은 얼마 든지 기다릴 수 있다는 것처럼 이 야기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100% 진심이었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그런 유재원을 향해 김광일도 감 사를 표시했다. 그가 아는 다른 재 벌집 패밀리였다면 이 대목에서 화 를 크게 냈거나, 두 번의 제안은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을 텐데, 역시 유재원은 달랐다.
유재원이란 조커를 얻은 김광일 은 보다 빠르게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한 저택에 서는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형제 가 있었다.
전재구, 전재근, 전재준 삼형제였 다. 삼형제가 오랜만에 모였음에도 분위기는 딱히 좋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에서 정해지는건 바로 전명헌이 남긴 유언을 확 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화목하게 지내기를 당부했 고, 분란은 절대 용서치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삼형제 앞에서 제일 먼저 운을 뗀 사람은 김광일이었다.
구두로 남긴 유언이었기에, 직접 전해주는 것이었다. 당연한 이야기 지만 이 말을 마음에 담아두는 사 람은 없었다.
만약 전명헌이 생전이 엄포를 놓 았다면 삼형제의 반응은 180도 달 랐을 것이다. 열심히 따르는 척이라도 했을 터인데, 지금은 듣는 등 마는 둥 하는 반응이었다. 이들의 생각은 이런 시시한 이야기는 나중 에 하고, 진짜 유언이나 빨리 말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런 삼형제의 반응에 김광일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서는 함 께 온 변호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변호사 역시 김광일과 함께 오랫동 안 전명헌의 개인 법률 서비스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면 재산 분할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시큰둥한 모 습이었던 삼형제도 살짝 표정이 변했다.
변호사는 가방에서 i웍스 노트북 을 꺼냈다. 그리고 탁자에 놓고 삼 형제가 잘 볼 수 있는 자리에서 펼 쳤다.
"이게 뭡니까?"
삼형제는 적잖이 당황했다. 첫 장과 마찬가지로 종이 유언장이 나 올 줄 알았던 모양이다. 덕분에 미 래 건설 회장인 전재구가 대표로 형제들의 당황스러움까지 담아 물 었다.
"어르신께서 두 번째 유언은 멀 티미디어로 남기셨습니다."
전재구의 물음에 변호사는 가방 에서 CD 한 장을 꺼내 보이며 말 했다.
"이 안에는 어르신이 직접 녹화 하신 동영상 파일, 그리고 유산 분 배 방침이 담겨 있습니다. 밀봉이 완벽한지 살펴보시지요."
그러면서 CD를 전재구에게 먼저 전해줬다.
얼떨결에 CD를 받아본 전재구는 이리저리 돌려 보면서 날카로운 눈 으로 살펴보았다. 투명한 CD 케이 스는 열어볼 수 있는 부위에 종이 띠가 단단히 붙어 있었다. 종이 띠위에는 너무도 익숙한 아버지 전명 헌의 사인이 있었고, 날짜도 적혀 있었다. 작년 11월이니 그리 오래 되지도 않은 물건이었다.
CD 안에 든 내용물이 문제겠지 만, 겉으로 보기만 하면 아버지의 사인이 담긴 밀봉을 그대로 두고 CD만 바꿔치기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위조지폐 감별사가 된 것 처럼 CD를 꼼꼼하게 살핀 전재구 는 동생에게 그것을 전해줬다. 동 생들 역시 꼼꼼하게 보았고, 이상 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변호사 에게 다시 넘겨줬다.
"그럼 개봉하겠습니다. 이의가 있다면 지금 말씀해주십시오. 없습 니까?"
딱 3초만 기다린 변호사는 곧장 CD 케이스에 둘러진 봉인지를 조 심스럽게 제거했다. 극소 절개 수 술을 하는 것처럼 최소한의 부분만 찢어서 CD를 꺼낸 변호사는 일찌 감치 부팅이 끝난 i웍스에 CD를 넣었다.
그러자 부응하는 비행기 이륙하 는 소리와 함께 CD가 i웍스에 인 식이 되었고, 바탕화면에 CD롬 아 이콘이 생성되었다.
CD롬 아이콘을 클릭하자 파일 관리자가 열리면서 CD 안에 들어있는 파일들이 나타났다. 파일은 모두 2개. 하나는 동영상 파일이었 고, 다른 하나는 ID 스프레드시트 파일이었다. 변호사는 먼저 동영상 파일을 클릭했다.
그러자 미디어 플레이어가 매끄 럽게 실행되었고, 곧 화면 가득히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청와대 집무실에 빈자리가 먼저 보였다. 곧이어 면바지에 셔츠 차 림의 전명헌이 의자에 앉았고, 카 메라 앞의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더 니 곧 카메라를 보고서 입을 열었 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