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권 16화
단적으로 알파 팀 소속 개발자가 출근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개 인용 암호 키가 담긴 사원증을 출 입문에 달린 보안 장치에 찍는 것 이었다. 출근 도장을 찍는 것과 동 시에 작업용 PC의 잠금 장치를 푸 는 역할까지 하는 사원증이었다.
그렇게 잠금 장치가 풀리면 안드 로이드 운영체제의 바탕화면이 나 왔고, 거기에서 개발용 툴을 실행 할 수 있었다. 물론 개발용 툴 역 시 로그인을 요구했는데, 본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넣으면, 개발 자에게 부여된 권한만큼 안드로이 드 운영체제의 소스코드에 접근할수 있었다.
개발 툴 왼쪽 탭에는 접속자들 리스트가 떴고, 그들이 어느 부분 에서 작업하는지도 일목요연하게 나왔다.
'보스 떴다' 라는 알람이 울린 현 상황의 경우엔 리스트 최상단에 왕 관 아이콘을 달고 있는 JW라는 두 글자가 뜬다.
그러면 지금과 같이 초긴장 상태 가 되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인정받은 최고의 프 로그래머들만이 안드로이드 사의 알파 팀에 소속될 수 있었다. 이들은 본인의 실력에 대해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 누구의 지적을 받는 걸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하 지만 그런 알파 팀 소속 프로그래 머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유재원이었다.
소프트웨어 개발 능력 하나로 지 금의 ID 그룹을 일궈낸 것 자체가 기적이었지만, 멀리 떨어진 이들에 겐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 만 본인 딴에는 이게 최선이라고 만들었던 소스코드가 유재원의 수 정을 거쳐서 더욱 간결해지고 퍼포 먼스도 더더욱 높아지는 걸 이렇게 실시간으로 보고 있으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고장을 받은 개발자는 악 소리 가 절로 나왔다. 반대로 10에 하나 둘 정도의 비율로 잘했다라는 칭찬 을 받으면 영웅이 된다.
경고장에 실질적인 페널티가 없 고, 칭찬에도 금전적인 보너스는 없었지만 알파 팀 팀원들에겐 자존 심이 달린 일이었기에, 모두가 숨 을 죽였다.
알파 팀에게 다행이라면 유재원 의 광란은 곧 사라졌다는 것이다.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가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서 JW라는 아이디 는 로그아웃했다. 그렇지만 알파팀은 한숨도 돌리지 못했다.
좋은 시절은 다 지났고, 고난의 행군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말 이다.
"무슨 일이에요?"
유재원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 셨다. 이제 막 발동이 걸렸는데, 제 대로 머리를 풀어보지도 못하고 로 그아웃을 해야 했던 탓이다.
"전재구 회장의 전화입니다. 회장님께서 전화가 오면 바로 연결해 달라고 하셔서……
경력이 쌓일 만큼 쌓인 김대석이 었기에 유재원의 집중도를 깬 것에 대해 미안해 했다.
유재원은 괜찮다는 얼굴이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전재구 회장의 연락이 오면 바로 알려달라 고 한 건 본인이었다.
"여보세요? 유재원입니다."
업무용 티파니폰을 넘겨받은 유 재원은 바로 통화를 시작했다.
-공사가 다망한 우리 조카님을 내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그러자 전재구의 정중한 목소리 가 바로 넘어왔다.
유재원을 부르는 호칭부터가 그 냥 조카도 아니고, 조카님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유재원과 전명헌의 인연이니 그 자식들과는 아무런 상 관도 없었지만, 전재구를 비롯한 삼형제는 그 인연을 놓고 싶지 않 았다.
유재원은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부자 아닌가. 심지어 성장이 끝난 것도 아니었고, ID 그룹은 아직도 상상할 수조차 없는 가능성을 가진 기업이었다. 게다가 한국의 재벌들처럼 미미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흔들리지 않는 막강 한 지분을 소유한 진짜 오너였다.
"괜찮아요. 쉬던 중이거든요. 숙 부님은 괜찮으세요?"
-조카님의 위로 덕에 저를 포함 한 미래 그룹의 식구들은 마음의 안정을 잘 찾았습니다. 무엇보다 조카님이 아버지의 마음속 깊은 곳 에 있었던 한도 풀어드린 터라 한 결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전재구 회장은 유재원에게 금칠 을 아끼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유재원도 딱히 아니라고 말하진 않았다.
실제 전명헌은 고향에 대한 끝없 는 그리움, 그리고 대통령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너무도 간절했던 소원이기도 했다. 두 가지 모두 유 재원을 만나 원 없이 풀 수 있었 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영면에 드 신 후의 얼굴은 그렇게나 편안할 수가 없었다.
"음,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다만 유재원은 전재구와 전명헌 에 대한 추억을 나눌 사이는 아니 었다. 전명헌과는 분명 남다른 관계이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전 씨 삼형제와는 딱히 친분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음, 그게 말입니다.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해 전명헌 이야기도 꺼냈던 전재구였고, 뒤에 도 추가로 준비한 말이 더 있었다. 그렇지만 예상 밖의 직설적인 화법 에 준비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조카님도 알고 있을 테지만, 우 리 아버님께서는 미래 그룹을 우리 삼형제께 골고루 나눠 주셨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고 과분한 유산입니 다.
"아니죠. 정당한 상속입니다. 숙 부님이나 다른 분들이 아니면 누가 미래 그룹을 이어 받을 수 있겠어 요."
유재원은 상속에 대해 나쁘게 보 지 않았다.
오너의 자식이 부모의 그룹을 물 려받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 말이 다. 물론 상속세를 확실히 계산해 서 납부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긴 했다. 전 씨 삼형제는 상속세를 제 대로 내겠다며 국세청과 납부 방법 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명색히 전직 대통령의 자식들이고 한국 최고의 재벌 가문인데 상 속세를 떼어먹는다는 건 감히 생각 도 못했다.
-조카님이 그렇게 말해주니 한결 마음이 편안하군요. 그런데 말입니 다. 아버님의 유언을 외곡하거나 반발하는 이들이 있어서 참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는 겁니다.
"그래요?"
유재원은 물음을 띄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 덕였다.
시골의 어르신이 물려준 자그마 한 유산 때문에 형제가 얼굴을 붉히는 일이 왕왕 벌어지는 게 현실 이었다. 하물며 한국 최고의 재벌 가문인 미래 그룹이 분할되는 것인 데 말이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한 일 이었다.
전명헌 할아버지가 아무리 칼 같 이 유산을 분배했더라도 법으로 따 지고 들어가면 파고들 여지는 충분 했다.
그룹 정보 팀에 따르면 가장 적 은 몫을 받게 된 전재준의 경우엔 유류분 반환 청구 카드를 만지작거 리고 있었고, 전재근의 경우엔 순 환 출자 고리 해체 방법을 놓고 지 금 유재원과 통화 중인 전재구와 충돌 중이란 보고가 올라온 상태였 다. 게다가 가신집단이라는 전명헌 과 함께 늙으며 미래 그룹을 이끌 었던 사장단들도 본인들의 몫을 주 장하고 있다.
-조카님, 유언이 왜 유언이겠습 니까. 아버님께서 고심해 결정하신 만큼 자식된 도리로 따라야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네, 그렇지요."
전재구가 이리 말 많은 양반이었 구나. 유재원은 오늘 처음으로 알 게 된 사실이었다. 하여튼, 길게 이 어지는 전재구의 말은 간단했다.
본인은 전명헌의 유언을 철저히 따르고 싶은데, 반발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기에 이를 관철 하기 위해서는 유재원의 도움이 필 요하다는 것이다.
"도움이라니요?"
유재원은 물어보면서도 설마 했 다.
-아버님께 들었습니다. 조카님이 그룹 지분 10%를 가지고 있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정식으로 제안을 드리지요. 제가 가진 미래 전자와 조카님의 그룹 지분 10%를 교환합 시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전재구의 말에 유재원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 다.
진짜 미래 전자의 가치를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미래 그룹 지배를 위해서 모르는 척 교환하자 고 하는 건가?
전자라면 그냥 바보고, 후자라면 욕심만 많은 바보다.
그러면 유재원 본인은 바보 같은 제안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 가?
고민은 짧았다.
"그러죠."
답도 아주 쉽게 나왔다.
그렇지만 전재구가 어떤 바보든 간에 그의 제안이 유재원에게 나쁠 건 없었다.
당장은 반도체 경기 하락으로 공 장을 돌리는 게 손해라고는 해도, 미래 전자의 생산시설과 인력의 저 력은 확실했다.
-역시, 조카님과는 말이 잘 통하 는군요.
돌아오는 전재구의 목소리도 확 밝아졌다.
"숙부님께서 이리 말씀하시는데 따라드리는 게 예의죠. 다만 제가 일이 많아서 한국에 들어가는 건 무리에요. 안드로이드 차기작도 준 비해야 하고, 러시아도 다녀와야 하고 이후에도 스케줄이 많거든요. 저 대신 최강욱 부회장을 보내겠습 니다."
-그럼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전재구는 거래가 성사되었다는 것 자체로 만족스러웠던 모양인지, 조 단위 비즈니스에도 대리인을 보 내겠다는 유재원의 말에 너그러운 사람처럼 이해한다고 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유재원은 미래 가치가 충분하다못해 넘쳐흐르는 반도체 공장을 얻 었고, 전재구는 그룹 지분을 얻음 으로써 전명헌의 적통을 이은 후계 자라는 걸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며칠 후.
한국이 오랜만에 유재원의 소식 으로 뜨거워졌다.
-단독 특종! ID 그룹, 미래 전자 인수-ID 일렉트로닉스 정식 출범, 미래, 일성, 대호 전자 통합!
-메모리 반도체 부문 세계 1위 등극-유재원 회장, 백색가전도 계속 운영할 것!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는 소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3대 전자 회사가 ID 그룹의 깃발 아래 하나 의 사업체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유재원은 반도체만 보고 인수한 것 이지만, 거기에 딸린 백색 가전 부 문과 연구소 등등을 합해서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직접 고용 인력은 10만을 거뜬히 넘었고, 1차, 2차 협력 업체 등등 간접 고용된 것까지 합치면 백만 단위는 거뜬하게 넘었다.
유재원도 그룹 지분과 미래 전자 를 교환하기로 할 때,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넘겨받고 나서 보니 한국의 3대 전자 회사는 이제 모두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이제 남은 건 금성 전자뿐인데, 덩치로 보면 ID 일렉 트로닉스의 10% 수준이었다. 그나 마 금성 전자도 백색가전부터 반도 체까지 다 만드는 종합 전자 회사 였지만, 규모 면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유재원은 조금 긴장했다.
만약 정부에서 합병 허가가 나오 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나 거대한 전자 회사의 탄생 은 곧 독점으로 이어쩔 수 있었으 니 말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정부는 ID 그룹이 미래 전자를 인수한 것을 은근히 반겼다. IMF 시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으로 3일 후에 있는 대선에서 당 선이 확정적인 김대중 후보의 경제 정책은 빅딜로 대표되는 재계의 구조조정이었다.
문어발식 확장은 하지 말고, 두 개 혹은 세 개의 주력 사업에 집중 하라는 주문이었다. 독과점의 위험 이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뭉쳐놓아 야 겨우 자력 생존이 가능할 만큼 한국의 경제 상황이 최악이었다.
지금은 유재원의 개입으로 외환 위기의 강도는 전과는 확연히 달랐 다. 그렇지만 김대중 후보의 성향 은 그대로였기에, 이번 합병에 거 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청와대에 있는 이인제 대통령 권한대행 역시 나 유재원에게 밉보일 마음은 추호 도 없었다.
더욱이 일반 기업들의 경우 합병 을 하고 나면 잉여 인력들의 구조 조정이 이어지지만, ID 그룹은 달 랐다. 무차별적인 인적 구조조정에 가장 보수적인 회사가 바로 ID 그 룹이었다. 일반 직원 혹은 생산직 은 본인의 의사대로 하고, 대리부 터 과장까지는 사회적인 물의나 범 죄를 저지른 게 아니면 웬만해선 해고를 하지 않는다.
다만 임원급 이상이 되면 이야기 가 달라진다.
유재원은 이들이 경영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룹 감사실을 동원해서 이들의 능력과 행보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덕분에 대호 전자나 일성 전자와 같은 굵직한 합병이 있을 때마다 피바람이 몰아쳤고, 크고 작은 사 건들이 터졌다. 물론 최종 단계에 서는 임원들, 혹은 사장들에 대해 비자금, 횡령, 배임 등의 범죄가 발 각되었고 고소로 마무리 되었다.
이번에도 ID 일렉트로닉스 합병 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계약 직 임원들에 대한 칼바람은 전과는 좀 달랐다.
ID 그룹의 M&A 절차가 임원들 사이에 유명해지면서 고소를 당하 기 전에 먼저 회사를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또한, 유재원이 그대로 안고 가고 싶은 능력자들의 경우엔 전재구의 수족들이 대부분이라서 남아 있기보다는 미래 그룹으로 가 는 걸 선호했다.
유재원은 떠나는 이들을 굳이 잡 진 않았다.
그룹 인재풀은 이미 어느 정도 형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