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권 17화
"ID 일렉트로닉스의 사장으로 황 창규를 임명하겠습니다."
-황창규? 아! 일성 전자 반도체 사업부 사장이었던 사람 말씀이시 죠?
"예, 바로 그 사람입니다."
유재원은 ID 일렉트로닉스 정상 화라는 주제로 최강욱 부회장과 ID 톡 화상 미팅을 진행 중이었다. 사 장을 누구로 할 거냐는 최강욱의 물음에 유재원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황창규라는 이름을 불렀다.
최강욱도 역시라는 표정으로 고 개를 끄덕였다.
황창규라는 사람은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를 세계적인 수준으 로 끌어올린 장본인이었다. 그는 세계 최초 64MB디램 개발 성공을 이끈 장본인으로, 메모리 반도체 개발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었다.
일성 전자가 100원에 ID 그룹에 팔린 이후에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임원진 대학살이 일어나는 중에도 살아남았다. 더욱이 황창규는 최현 희 회장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고, 일성 전자가 자동차 중심으로 개편 될 때 마음만 먹으면 일성 그룹의 최고 권력 집단인 전략기획실로 보직 이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창규는 그러지 않았다. 본인이 키우다시피 한 일성 전자 반도체 사업부였다. 게다가 반도체 통이라서 전략기획실로 가봐야 딱 히 전문성을 발휘할 것도 없었다. 결국 황창규는 남았고 어제까지는 일성 전자 반도체 공장의 리빌딩을 책임지고 있었다.
살인 공장 수준으로 엉망이었던 공장을 다 뜯어고치면서 동시에 고 밀도 메모리 반도체 제조를 위해 공정 전체를 바꾸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를 위해서 ID 테크놀로 지, 그리고 ASML 같은 세계적 반도체 설비 기업들이 기술을 지원해 줬고, 작업은 큰 문제없이 진행 중 이다.
황창규는 그 작업이 끝나면 토사 구팽이 될 줄 예감하고 있었지만, 유재원은 ID 일렉트로닉스의 사장 으로 황창규만한 사람은 없다고 생 각했다.
-확실히 황창규라면 충분히 능력 이 있습니다.
구조조정 없이 인수한 탓에 ID 일렉트로닉스의 가전 부문도 상당 히 거대했다. 하지만 주력 사업은 역시 메모리 반도체였으니 말이다.
물론 가전 부문도 유재원은 놀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ID 그룹의 계 열사들이 만드는 가전제품은 많았 다. ID 테크놀로지에서 내놓은 각 종 모바일 디바이스나 안드로이드 사에서 내놓는 뉴에그, i웍스 시리 즈도 있었다.
이밖에도 일반 소매 시장에는 나 오지 않는 물건이지만, 수천, 수만 대의 블레이드 서버를 연결해 구성 하는 클라우드 컴퓨팅 서버 역시도 ID 그룹의 주력 상품이었다. 이제 까지는 TG컴퓨터와 같은 회사에 외주를 주었지만, 앞으로는 ID 일 렉트로닉스에서 자체 생산을 하면 가전 부문도 쉬는 일은 없을 것이 다.
"황창규 사장에게 이 말을 꼭 전 해주세요."
-네, 어떤 말씀이십니까?
"메모리 반도체의 집적도를 1년 주기로 두 배씩 늘려 달라고 말입 니다."
-예? 1년에 두 배라고 말입니 까?
요즘 나오는 메모리 칩 중에 가 장 용량이 큰 것이 512메가비트다. 그러니 유재원의 주문을 실행하자 면 당장 내년쯤에는 1기가비트짜리메모리칩의 상용화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매년 두 배씩 성장해야 하니 언뜻 들으면 불가능 한 주문이었다.
그렇지만 황창규는 이를 해냈다.
1년 주기로 메모리반도체의 용량 이 두 배로 늘어났고, 이를 황의 법칙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1년 6개월마다 컴퓨터의 성능이 두 배 로 향상되면서도 가격의 변화는 없 다는 무어의 법칙에서 따온 말이었 다.
- 알겠습니다.
최강욱은 유재원의 말이 무리 같았지만, IT 최고 전문가인 유재원 이 틀린 소리를 하진 않을 거라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 그리고 동아시아 사업장 관 련해서 내린 결정이 있어요."
-예, 회장님.
황창규의 ID 일렉트로닉스 사장 임명으로 모든 용무가 끝났다고 생 각했던 최강욱이지만, 유재원의 말 이 다시 이어지자 화면에 집중했다. 특히 동아시아 사업장이라고 정확 히 지칭한 탓에 혹시 본인이 인지 하지 못한 사고라도 생겼나 하는 긴장감도 서렸다.
"그전에 난센스 퀴즈 하나 낼게 요."
-난센스 퀴즈요?
갑자기 난센스 퀴즈라니 최강욱 은 맥이 탁 풀렸다. 그러거나 말거 나 유재원은 기어이 퀴즈를 내고 말았다.
"직장인의 스트레스 완화에 제일 좋은 차는 뭘까요?"
-차…… 말씀이십니까? 음, 최고 선호라면 커피겠죠. 한국에선 직원 용 믹스커피 구입비로만 매달 수억 을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는 굳이 난센스라고 하셨으니……. 벤츠 아닐까합니다. 벤 츠를 타고서 드라이브 한 번 다녀 오고 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리겠죠.
참으로 최강욱다운 답변이었다.
"땡! 반차, 월차, 연차입니다."
그런 최강욱을 보면서 유재원은 거침없이 땡을 외쳤다. 이어진 정 답에 최강욱은 아 하는 표정이 되 었다.
열심히 일한 직장인들이 최고로 좋아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휴가 였다.
"ERP로 보니까 한국의 근무 시 간이 다른 지역 사업장과 비교하면 너무 많아요."
하루 8시간 근무라는 게 ID 그 룹의 기본 방침이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ERP에 기록된 직원의 출퇴근 로그 기록을 분석해 보면 한국이 유독 높았다.
전명헌의 일로 과로사에 대한 걱 정이 컸던 유재원이었으니 경고등 이 켜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곧장 원인을 따져봤다. 놀랍게도 쉽게 답이 나왔다.
근무 형태의 근본적 차이 때문이 었다.
미국이나 유럽은 주5일제 근무가 1930년대부터 정착된 상태였다.
분업, 컨베이어벨트, 모델T로 자 동차 대중화를 이끌면서 근대를 마 감시키고 현대를 열었던 인물이 헨 리 포드였다. 노조 탄압에서 2등이 라고 하면 서러울 양반이기도 했지 만, 의외로 주5일 근무제를 정착시 킨 사람이기도 했다.
반면 한국은 토요일에도 일을 했 다.
그나마 반공일이라고 해서 오전 까지만 일하는 문화는 있었지만, 일이 바쁘면 그런 건 당연히 무시되었다.
덕분에 유독 한국에서만 근무 시 간이 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한 국의 생산성이 미국이나 유럽에 비 해 높은 것도 아니었다. 소프트웨 어 개발이건, 가전제품 생산이건 미국이 더 높았다.
"늦어도 2000년 이후로 주5일제 를 할 거니까 준비해주세요."
-설마 토요일도 그냥 쉰다는 말 씀입니까?
"내 식구들이 과로사로 죽었다는 소식은 이젠 듣고 싶지 않네요."
-회장님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만…….
최강욱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6일 일하다가 5일을 일하면 단순 계산으로 능률이 16%나 떨어지는 것이다. 떨어진 만큼 인력을 충원 해야 하는데, 이게 다 돈이었다. 그 렇지 않아도 ID 그룹이 치르는 비 용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인건비였는데, 이게 더 커진다 고 하면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 다.
"그리고 반차, 월차, 연차를 사용 하려고 하는데, 계획서 같은 건 왜 받나요? 그런 요식적인 서류 단계 는 과감하게 삭제하고, 팀원이 팀장에게만 보고하면 바로 쓸 수 있 게 해주세요."
유재원의 마음은 이미 바위처럼 확고했다.
-알겠습니다.
최강욱은 유재원의 의지가 확고 하다는 걸 인지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그 지시를 옮겨 적었다.
"마지막으로 집을 지어볼까 하는 데요."
- 집이요?
유재원은 최강욱의 물음에 고개 를 크게 끄덕였다.
집이라고 한다면 서울에도 있고, 덕진리에도 있고, 지금 유재원이 최강욱과 화상미팅 중인 샌프란시 스코에도 있다. 하지만 유재원이 말하는 집이란 이런 종류의 집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혼집이었 다.
티파니와 교제를 한 지도 이제 5 년은 훌쩍 넘었다. 이미 약혼식까 지 했고, 둘의 애정 전선에도 아무 런 문제가 없었다. 티파니는 유재 원의 태평양을 넘나드는 거대한 스 케일의 비즈니스 활동을 완벽히 이 해해줬다.
마찬가지로 유재원도 티파니가 셰브롱에서 일을 한다고 몇 주씩 출장을 다니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다만 전통적 인 사고관을 지니고 계신 부모님이 조금 우려의 이야기를 하셨을 뿐이 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이런 식으로 연애가 이어지다가 언젠가 때가 되 면 결혼도 하겠지라는 마음이 있었 다.
나이브한 마음이 달라진 원인은 이번에도 전명헌이었다.
전명헌이 남긴 말에는 잡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잡으라고 했다. 덕 분에 돼지 금고, 김광일을 잡았지 만, 잡을 수 있는 건 더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거대한 존재감 을 발휘하는 사람이 바로 티파니였 다.
-축하드립니다!
티파니에게 청혼을 할 거라는 이 야기에 최강욱이 바로 축하를 해줬 다.
ID 그룹의 최대 취약점은 자연재 해, 경제 위기 따위가 아닌 유재원 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재원에 의해 굴러가는 그룹이었다. 이는 중세의 절대왕정이라고 봐도 무방 했다. 유재원의 부재가 생기면 그 룹에 변고가 생기는 건 당연했다.
최강욱은 대놓고 말은 못해도 경 영 구도가 안정되는 것이 중요하다 고 생각했다. 그것을 이루는 데에 티파니와의 결혼은 상상 가능한 최 선의 방법이었다.
유재원은 최강욱의 속마음을 아 는지 모르는지, 파일관리자를 실행 해 스케치 형태의 그림파일을 전송 했다.
"장소는 샌프란스코 서쪽 해안가 에 이렇게 생긴 집을 짓고 싶어요."
파일을 전송받은 최강욱은 바로 이미지 뷰어로 내용을 확인했다. 곧이어 최강욱의 감상이 나왔다.
-음, 원반형 우주선이 절벽에 반 쯤 걸쳐 착륙한 모습이네요. 그나 저나 규모가 상당합니다. 절벽을 타고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엘리 베이터와 바로 연결되는 항만 시설 에 요트까지. 꽤나 화려하군요.
아쉽게도 최강욱은 유재원의 스 케치를 보고 무얼 오마주한 것인지 알아보진 못했다. 하긴 지금은 아 직 마블 만화는 소수 문화였으니 당연했다.
-대호 건설에 스케치를 보내 견 적과 설계를 받아보겠습니다.
거느리고 있는 회사가 많으니 부 담스럽기도 했지만, 필요한 게 있 으면 뭐든 회사 내에서 조달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 아이언맨의 말리부 맨션보다 훨씬 크고 화려한 저택이라도 이렇게 마음만 먹으면 만들어낼 수 있다.
"네, 부탁해요. 돈은 얼마든지 들 어도 좋으니 꼼꼼하게 만들어주세 요."
덤으로 누구나 하고 싶은 말지 만, 실제로는 쉽게 할 수 없는 말까지 여유롭게 곁들이는 유재원이 었다.
시간은 흘렀다.
3월이 되었고, 제15대 대통령 선 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 선되었다. 궐위에 의한 선거였던 만큼, 인수위원회의 활동도 없이 당선되자마자 바로 대통령에 올랐 고 대통령으로서의 임기를 시작했 다.
김대중 후보의 당선은 한국이 보수 세력에서 민주 세력으로 확실한 정권 교체를 했음을 의미했다. 김 영삼 전 대통령이 비록 민주 세력 출신이었지만, 삼당합당으로 빛이 바랬고, 전명헌은 회색이었다. 반면 김대중 대통령은 정통 민주 세력이 었으니 대한민국 헌정 역사에서 가 장 극명한 정권 교체였다.
당연히 보수 세력 일색의 행정부 와 취임 초부터 마찰이 일어났고, 이는 내각 구성부터 많은 말이 나 오게 했다.
한국이 이렇게 정권 교체로 떠들 썩한 사이, 태평양 건너 유재원은 오랜만에 티파니와 함께 공식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1999년 초 기대작인 매트릭스의 할리우드 시사회 참석이었다.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메카 코닥 극장이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꾸며 졌다.
세계 최대의 영화 배급사 워너브 라더스의 최신작인 매트릭스가 첫 시사회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미래의 시작을 위한 싸움!
매트릭스의 주제를 담은 의미심 장한 문구에 네오, 트리니티, 모피 어스라는 주인공과 조연의 전신 모 습이 담긴 포스터가 코닥 극장 위에 크게 걸렸다. 남자 배우는 검은 색 코트로 멋을 냈고, 여자 주인공 은 반들반들한 라텍스 재질의 달라 붙는 옷으로 육감미를 자랑했으며, 동시에 차가운 사이버 세상을 표현 한 포스터였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