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권 6화
고등학교 때까지 너드라고 놀림 을 받았던 길버트였다.
그저 수줍음이 좀 있어서 활동적 이지 못했고, 운동보다는 컴퓨터를 좋아했을 뿐이었다.
덕분에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애 가 본인에게 잠깐 관심을 보였을 때도,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 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길버트는 공부에 소질이 있었다.
여러 대회에 나가 상도 탔던지 라, 선생님들도 길버트에게 관심이 많았기에 따돌림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 길버트의 진로가 스탠퍼드 컴퓨터공학과가 되는 건 자연스러 운 일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길버트의 진로 를 완전히 바꿔버릴 유재원을 만났 다.
유재원의 경우 밀레니엄 문제 해 결이라는 전설을 쓰며 패스트트랙 에 통과한 뒤로 학교를 드문드문 다녔지만, 그래도 학교에 갈 일이 있으면 길버트와 자주 보긴 했다.
그때부터 길버트는 유재원에게 푹 빠져버렸다.
사실 길버트뿐만이 아니라 스탠 퍼드 사람이라면 모두 유재원에 호 의적이었다.
스탠퍼드가 배출한 동문 중에 가 장 성공한 사람이 유재원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학교에 돈을 쓰는 것도 인색하지 않았다.
유재원의 기부는 장학금, 학교 발전기금, 건물 헌납 정도로 끝이 아니었다.
스탠퍼드의 컴퓨터는 항상 최신 형이었는데, 이는 유재원이 i웍스 시리즈를 출시하고 나서 정점을 찍었다. 이전까지는 스탠퍼드의 컴퓨 터실에 뉴에그가 깔렸다면, 이후로 는 i웍스 워크스테이션이 들어갔으 니 말이다.
길버트도 당연히 유재원처럼 되 고 싶었다.
유재원처럼 거대한 그룹을 일궈 내는 건 무리일지라도, 매력적인 인터넷 아이템으로 창업해 유재원 과 파트너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 다.
길버트에겐 기프티콘이라는 번뜩 이는 아이템이 있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1년, 2년 미뤄졌다.
스탠퍼드에는 재학생들의 창업을 돕는 자문기구는 물론 투자 계약서 를 검토해주는 법무팀까지 있었다.
자문기구에서는 기프티콘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을 표했다.
서양에서는 선물을 주고받을 때, 그 자리에서 개봉하고 기쁘다는 리 액션을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그 런데 멀리서 마음만 보내는 건 딱 히 매력적이지 않다는 조언이었다.
게다가 바코드로 물건 값을 대신 치러야 하는데, 이를 지원하는 최 신 버전 POS기기의 보급률이 형편없었다.
길버트는 절망했다.
바코드로 티켓이나 물건을 선물 한다는 발상 하나로 앞만 보고 달 렸지, 현실적인 문제에는 완전히 무지했으니 말이다.
상당한 완성도 있는 시스템을 만 들고서 투자를 받기 위해 여러 캐 피탈을 돌아봤지만, 자문기구와 비 슷한 답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길버트는 좌절할 수 없 었다.
길버트는 혼자서 기프티콘 시스 템을 만든 게 아니었던 탓이다.
다들 스탠퍼드 재학생 혹은 출신 으로 다섯 명 정도 되는 동료들과 함께 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혼자였으면 포기하고 학업에 집 중한다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팀을 이끌고 있다 보니 책임감 때문에 손을 털 수가 없었다.
두 번째 도전은 기프티콘 시스템 을 만들면서 쌓았던 기술 중 하나 를 재활용하는 것이었다.
바로 결제 대행이다.
기프티콘의 메커니즘은 사실 매 우 간단했다.
기프티콘을 선물하는 사람은 선불로 돈을 내고 바코드를 발급받는 다.
그렇게 받은 바코드를 본인이 나 중에 쓸 수도 있고, 선물할 수도 있다.
만약 선물 받은 이가 특정 가게 에서 바코드를 제시하고 POS기기 가 이를 인식하면, 길버트네 회사 로 물건 값의 청구가 들어오고 이 를 즉각 지급하는 방식이다.
길버트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단 순히 기프티콘에 쓰는 게 아니라, 안전 거래는 물론 다양한 쇼핑몰에 활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특히 요즘 개인 간 상거래 분야 에서 우뚝 선 P마켓의 경우 사기 피해 호소도 그만큼 많았다.
물건을 받았는데, 벽돌 따위가 들어 있었다는 건 이미 인터넷에선 유명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결제 대행 서비스를 이용 하면 사기를 당할 일이 없어진다.
물건을 받은 후 확인을 해줘야 거래가 완료되니 말이다. 판매자 역시 마찬가지다. 물건을 보냈는데, 돈을 받지 못할 일이 없어진다. 다 만 구매자가 물건을 받은 후 확인 을 해줘야 거래가 완료되니 판매자가 돈을 좀 늦게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돈을 떼이는 일은 없다.
게다가 길버트는 신뢰도 시스템 을 만들었다.
거래 성공 횟수가 많이 쌓이면 신뢰도가 높아지고, 신뢰도가 높아 지면 수수료나 대금 입금에 혜택을 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결제 대행 서비스에서 는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신용카 드 번호나 계좌번호를 알려줄 필요 가 없다.
길버트의 시스템이 중간에 있으 니, 서로의 금융 정보를 몰라도 거래가 가능하다.
개인정보에 민감한 북미 소비자 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좋은 요소 였다. 게다가 수수료 면에서도 이 득이었다.
P마켓이나 다양한 쇼핑몰 사이트 에 적용된 원클릭 구매 서비스는 카드사와 쇼핑몰에 입점한 소규모 판매자를 다이렉트로 연결했다.
거대한 카드사는 자영업자가 다 수인 판매자들에게 가장 높은 수수 료율을 강요했다.
하지만 결제 대행으로 길버트의 시스템이 자영업자들을 대리해 카드사나 은행과 대면하게 되면 규모 의 경제를 통해 수수료율을 대기업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
엑설런트!
기프티콘 다음에 만들어진 결제 대행 서비스에 대한 스탠퍼드 대학 교 자문 기구는 최고라는 말을 아 끼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투자 회사들 과 연결을 해주겠다고 난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북미의 전 자상거래 시장의 성장률은 그야말 로 무시무시했다.
매년 수십, 수백 퍼센트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당연히 온라 인 결제 시장의 크기도 커졌다.
길버트의 결제 대행 서비스는 그 런 온라인 결제 시장의 불안 요소 를 깔끔하게 잠재울 막강한 무기였 다.
더욱이 사이트를 가리는 것도 아 니고, 어느 사이트든 클릭 버튼 하 나만 넣으면 길버트의 시스템을 즉 시 이용할 수 있다.
문제는 자본금이었다.
결제 대행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자금이 필요했다.
이를 알아본 스탠퍼드 자문 기구 가 투자자를 연결해주려고 했던 것 이다.
길버트는 자문 기구가 호들갑에 도 외부 투자는 일단 보류했다.
당연히 유재원에게 먼저 보여주 기 위함이었다.
기프티콘은 일단 보류였지만, 거 기서 나온 결제 대행 시스템은 스 스로 보기에도 그럴 듯했다.
길버트는 바로 미팅 요청을 했 다. ID 그룹 비서실까지 갈 것도 없이, ID톡에 저장된 유재원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냈다.
사실 그때만 해도 길버트는 조금 떨렸다.
팀원들에게 유재원과의 인맥에 대해 마구 자랑을 했고, 그 증거로 본인의 ID톡 친구 리스트를 보여주 기도 했으니 말이다.
문제는 최근 들어 서로 바쁜 탓 에 이야기가 뜸해졌다는 것이었다.
혹시 메시지를 보냈는데 유재원 이 읽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이 있었다.
다행히도 길버트의 우려는 기우 였다.
유재원으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이라고 반갑다는 답신이 바로 왔고, 미팅 날짜도 정해졌다.
그런데 문뜩 결제 대행 시스템 하나만 들고 가기엔 뭔가 좀 썰렁 한 느낌이었다.
결국 길버트는 몇 년 동안 놀고 있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는 마음 과 유재원의 냉정한 평가를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을 모아 결제 대행 시스템 말고도 이것저것 벌여놓았 던 아이템을 다 들고 유재원과 만 나러 갔다.
그 결과, 지금처럼 유재원과 나 란히 IDDC99의 피날레를 장식하 게 된 것이다.
다만 유재원을 따라 허겁지겁 무 대 중앙에 선 길버트는 스포트라이 트를 받으면서도, 어째서 결제 대 행 시스템이 아닌 톡톡이 메인에 서게 되었는지는 몰랐다.
톡톡은 팀원끼리 프로젝트 처리 나 일상의 이야기 등등을 짧은 메 시지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만든 문자 시스템이었으니 말이다.
톡톡을 보여준 다음 깜짝 놀란 유재원의 반응이 만족스럽긴 했는 데, 아직도 이게 그렇게나 대단한 것인지에 대한 자각은 무대에 선 지금도 미미했다.
그저 모든 게 얼떨떨한 길버트였 다.
페이 팔!
며칠 전, 보여줄 게 있다며 미팅 약속을 잡은 길버트가 i웍스 노트 북에 주섬주섬 펼쳐 놓은 아이템 중에 결제 대행 서비스를 보고서 외친 단어였다.
페이팔은 유재원의 전생에서 가 장 유명한 결제 대행 서비스였다.
원래 이름은 칸피니티였는데, 벤 처캐피탈인 블루런 벤처스의 투자 를 받으면서, 페이팔이라는 이름으 로 개명했다.
이후 2000년 초에 그 유명한 일 론 머스크의 온라인 뱅킹 회사인 엑스닷컴과 합병하면서 잠깐 그 이 름을 내려놓았다가, 20()1년 그 유 명한 피터 틸에게 엑스닷컴을 넘겨 주었다.
피터 틸은 다시금 페이팔을 전면 에 내새웠고, 송금 서비스 강화에 공을 들였다.
이후 페이팔은 승승장구했고,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2002년 주 당 23달러라는 높은 가격으로 이베 이에 인수되었고, 그 길로 전설이 되었다.
길버트의 결제 대행 서비스는 그 런 페이팔보다 훨씬 진화된 모델을 갖추고 있었다.
기프티콘의 실패에서 뼈저린 깨 달음을 얻고 수익 모델 완성을 위 해 칼을 갈았던 모양이다.
덕분에 유재원은 살짝 망설여졌 다.
길버트 팀에 투자를 결정하면 일 론 머스크의 미래에도 영향을 크게 주는 것이니 말이다.
일론 머스크는 유재원의 오리지 널 마스터플랜에도 제법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전기 자동차와 재활용하는 로켓, 하이퍼루프와 같은 거대한 프로젝 트가 속속 현실화 될 수 있었던 것 은 일론 머스크의 황소 같은 추진 력 덕분이었다.
특히 기술특이점을 크게 앞당긴 오픈AI 프로젝트는 일론 머스크의 후원 덕에 안착할 수 있었다.
당연히 유재원은 일론 머스크와 협조를 하는 게 기본 방침이었다.
최근 크게 수정된 마스터플랜에 서는 일론 머스크의 존재감이 오리 지널보다는 조금 약해졌다.
ID 그룹이 본인의 예상보다 훨씬 성공적으로 안착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남의 손을 빌리지 않더라도 ID 그룹이 직접 처리하는 게 훨씬 나았다.
그러다가 유재원의 마음이 확 돌 아선 건 길버트가 조금 부끄러운 얼굴로 꺼낸 톡톡이라는 플랫폼을 보고서였다.
'이건 트위터잖아!'
유재원은 길버트의 설명을 듣고서 바로 떠오른 단어가 트위터였다.
최대 140의 짧은 문장을 주고받 을 수 있는 SNS 서비스였다. 하지 만 길버트의 톡톡은 트위터의 초기 형태보다 훨씬 진보된 모습이었다.
140자 제약도 없었고, 문자는 물 론이고 이미지 파일이나 링크, 심 지어 1분 이내 분량의 동영상 파일 도 첨부할 수 있었다.
웹페이지의 형태로 PC에서 접속 할 수도 있고, 티파니폰2와 라이브 팟, T터치폰용 클라이언트 애플리 케이션도 만들어 놨다.
길버트는 톡톡을 업무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팀원들이 학생들인지라 한자리에 오래 머물면서 작업을 하기가 힘들 었다.
ID톡의 경우엔 1 : 1에 초점이 맞 춰져서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게 힘들 었다.
그렇기에 짧은 아이디어나 문서 파일, 이미지를 팀원끼리 돌려볼 수 있는 걸 간단하게 만들어 봤는 데, 꽤 괜찮았다.
다만 팀원들이 소유한 휴대폰이 제각각이라서 애플리케이션을 다따로 만들어야 했던 게 번거로웠을 뿐이다.
그렇게 톡톡을 만들고 나서 보 니, 팀원들과의 소통이 한결 편해 졌다. 톡톡 덕분에 결제 대행 서비 스도 수월하게 완성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길버트는 톡톡을 뭔가 대단한 아이템이라 생각하진 않았 다.
그저 효율적인 업무 처리를 위한 도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길버트의 고정관념이 깨진 건 유 재원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이게 뭔지 모르겠어? SNS잖아.
길버트 네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SNS 플랫폼을 만든 거라고."
"내가?"
어리둥절한 길버트와는 달리 유 재원은 톡톡을 보자마자 그 본질을 꿰뚫어봤다.
딱 하나 부족했던 건 팔로우 기 능, 해시태그 기능이 없었다는 것 뿐이다.
그것도 유재원의 기술 지원으로 가볍게 해결되었다.
타임라인이란 개념을 잡고 팔로 우한 사람들의 게시물만 보여 주도 록 하는 기능을 구현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팔로우 기능이 추가되고, 게시되는 글이나 이미지, 동영상에 해시태그가 부착되면서 톡톡은 완 벽해졌다.
길버트는 몇 시간 만에 확 달라 진 톡톡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게다가 유재원의 격한 반응을 보 니 투자를 유치하는 건 훨씬 쉬워 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서렸다.
반면 톡톡의 문제를 해결한 유재 원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톡톡 자체에 대한 고민이 아닌, 외적인 요소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것은 바로 독식의 문제였다.
유재원은 길버트와 같은 케이스 가 앞으로 더 있을 거라고 보았다.
ID 그룹이 IT 업계의 태양이라 는 건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는 사 실이다.
그렇기에 뛰어난 아이디어를 가 진 이들이 투자 유치를 위해 제일 먼저 두드려보는 건 ID 그룹이 되 었다.
유재원은 이러한 현상이 과연 자 신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섣불 리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불현듯 떠오른 한 줄의
문구 덕에 길버트와 함께 IDDC 99의 피날레 무대에 오를 수 있었 다.
식상하지만 너무도 유명한 바로 그 문구.
사악해지지 말기 (Don't Be Evil) 였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