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권 18화
11월의 마지막 주말, 저녁.
대전의 한 고급 아파트 거실로 어슬렁거리며 나오는 중년의 남자 가 있었다.
이름은 강찬호였고 ID 디스플레 이 생산총괄이사라는 직책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80년대 말 어께 너머로 배운 디 자인 기술을 살려보고자 여주에 정 착했다가, 우연한 행운으로 유재원 에게 발탁되어서 전공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중이었다.
"아빠, 꿀물 줄까?"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딸아이가 피곤에 절은 강찬호를 보고 물었다. 웬일인가 싶었다.
다른 집 딸들과 달리 본인의 딸 은 평소 용돈을 받을 때만 친하게 굴던 녀석이니 말이다.
"그, 그래? 그럼 부탁하마."
오늘 새벽까지 술자리를 갖은 탓 에 피로가 남았던 강찬호는 딸아이 의 호의를 받기로 했다.
그 말에 딸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달려갔고, 강찬호는 소파 에 풀썩 앉았다.
평소엔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그였지만, 최근에는 유독 술자리가 많아졌다.
바로 ID 디스플레이 제2 공장 중설건 때문이었다.
이미 대전으로 거의 확정이 된 상태였는데, 미련을 못 버린 지자 체장들이 많았다.
유치만 하면 세수는 물론 엄청난 숫자의 고급 일자리까지 만들어지 니 어떻게 해서든 변수를 만들어보 고자 했고, 공장부지 선정에 별 힘 도 없는 강찬호까지 귀찮게 한 것 이다.
높으신 양반들이라 박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내년 봄이 와서 첫삽을 뜰 때까지는 감수해야 할 일 이었다.
고개를 절래 흔들며 진저리를 친 강찬호는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변 경했다.
곧 방송을 시작한다는 특집 음악 회 따위보다는 뉴스가 취향이었으 니 말이다.
"아빠!"
채널이 바뀜과 동시에 꿀물을 들 고 오던 딸아이의 목소리가 터졌다.
"아이참! 오늘 오빠들 컴백한다 고요!"
어쩐지 딸아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꿀물을 타온다 했다.
알고 보니 이건 채널 변경을 말 아달라는 뇌물이었다.
목이 말랐던 강찬호는 어쩔 수 없이 리모콘과 꿀물을 교환할 수밖 에 없었다.
-다함께 만들어 가는 지식의 꿈 나무, 넥스트 엔서!
-세계 최고의 속도를 경험하라, 데이콤 VDLS!
-새 천년을 대비한 현명한 선택, 안드로이드 ME!
"응?"
강찬호의 입에서 의문의 소리가 났다.
쇼 프로그램 앞에 달린 광고만 거의 20개에 가까운데 그중에서 반 이상이 ID 그룹 관련 광고였으니 말이다.
참 많기도 하다 싶으면서, 이렇 게 집중적으로 쏟아지니 자부심이 절로 들었다.
안타까운 점은 ID 디스플레이 광 고는 없었다는 점이다. 디스플레이 는 B2B기업이라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그렇기 긴 광고가 끝나고서 드디어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HxT 컴백 기념 특집쇼, 지금부 터 시작합니다.
역시나 특집 프로그램의 정체는 딸아이가 몇 년 전부터 그렇게나 좋아했던 아이돌 그룹 HxT의 컴백 기념 쇼프로였다.
텔레비전에 HxT가 등장하는 순 간, 딸아이는 어디서 사왔는지 몰 라도 요란하게 반짝거리는 봉을 들 더니 응원을 시작했다.
강찬호는 본인의 존재감이 잊혀 진 것 같아 슬펐다. 그러나 연초에 풀이 죽어 있던 것보다는 지금이 훨씬 보기 좋았다.
"아빠, 이 특집 쇼가 얼마나 대 단한지 모르죠?"
다행히 강찬호의 존재감은 완전 히 사라지지 않았다.
강찬호의 딸은 넘쳐나는 덕심(?) 을 주체하지 못했는지, 옆에 앉은 강찬호에게 HxT의 위대함(?)에 대 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컴백을 한다고 1시간 반짜리 특 집 쇼를 공중파에서 만들어주는 건 그 어떤 아이돌그룹도 해내지 못했 다는 것부터 시작이다.
이번 컴백 앨범에 얼마나 대단한 작곡가와 안무가들이 참여했는지, 지금 입고 나온 의상들이 얼마나 비싼 명품들인지 등등.
"역시 우리 유 회장님이야!"
그렇게 한껏 자랑을 늘어 놓던 강찬호의 딸이었는데, 갑자기 회장 님이라니.
딸아이의 입에서 '우리 유 회장 님'이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알고 봤더니 저 HxT라는 아이돌 그룹과 강찬호는 한 식구였다. 바 로 유재원 회장님이란 공통분모 덕 이었다.
"세상에."
강찬호에게 있어 유재원은 은인 이상이었다. 그렇기에 강찬호도 HxT를 응원하는 건 당연했다.
다음 날.
일상으로 돌아온 유재원이 가장 먼저 챙긴 건 한국의 현안이었다.
-HxT, 빅쇼와 함께 화려한 복 귀!
-RATM과의 파격적 콜라보
한국의 현안도 상당했지만, 거의 첫 순위에 오른 건 바로 HxT의 복귀 쇼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복귀를 위 해 쓴 돈은 10억 원을 가뿐하게 넘 었다.
그중에서도 화룡점정은 무려 1시 간 반짜리 공중파 특집 프로그램이 었다.
빅쇼라는 이름으로 방영된 특집 프로그램은 단독 콘서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이는 문화 대통령이라는 서태지 와 아이들에게만 있었던 특혜였다.
그것도 오랜 침묵 속에 있다가 은퇴 앨범을 가지고 복귀하자 성사된 특집 쇼였다.
HxT의 안티 세력은 논란 후 1 년도 안 되는 짧은 자숙 기간을 거 치고 복귀하는데, 주말 공중파에서 1시간 반짜리 특집 콘서트를 해주 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난리였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인터넷으로 실시간 반응을 보던 유재원이 피식 웃었다.
방송국도 결국 비즈니스 논리도 돌아가는 회사였다.
ID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으 면 주말 프라임 타임에 1시간 반짜 리 복귀 콘서트를 넣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은 건 HxT 안티 세력의 가장 큰 공격 무기인 RATM과의 콜라보 무대였다.
HxT의 디스코그라피에서 3집의 표절은 지울 수 없는 역사가 되었 다. 3집 앨범의 타이틀이 부활이었 는데, 부활은커녕 완전 사망해버렸 다.
그렇다고 4집에 있는 곡을 다 비 릴 이유는 없다.
표절을 결정한 건 이승만 사장과 프로듀서였고, 그들은 죗값을 받는 중이었다.
또한 RATM에는 유재원이 천문 학적 배상금을 확실히 계산해주었 다.
한국저작권협회의 전산망에 해당 곡의 저작권자로 RATM이 올라갔 고, CD 앨범도 저작권이 새롭게 갱신된 것으로 재발매 되었다.
그렇기에 공중파에서 해당 곡을 부르는 것에도 문제가 없었다.
유재원은 여기에 RATM을 모셔 와 HxT와의 콜라보 무대를 만들었 다.
RATM 멤버들도 HxT에게는 유 감이 없었고, 배상금을 받으면서 그나마 있던 유감도 풀어졌다.
게다가 HxT의 표절 논란으로 인 해 RATM의 인지도도 한껏 올라 갔고, ID 그룹에 호의도 생겼다.
덕분에 유재원의 부탁에 흔쾌히 수락했다.
유재원도 RATM을 위해 전세기 까지 동원한 성의를 보였기에 한국 행은 문제가 없었다.
당연히 HxT와 RATM의 합동 무대는 큰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화제가 된 건 확 달 라진 HxT 멤버들의 퍼포먼스였다.
자숙 기간 동안 HxT 멤버들은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피지컬 능력을 키우는 데 전력을 다했고, 그 결과 노래를 라이브로 부르며 격한 칼군무를 추는 게 가 능해 졌다.
1990년대 후반부터 가수는 노래 를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크게 힘 을 받기 시작했고, 음악 프로에서 립싱크와 라이브를 표시하게 되었 다.
칼군무 퍼포먼스가 주력인 남자 아이돌 그룹에는 치명타였지만, 부 단한 노력으로 라이브와 칼군무를 동시에 잡는 거짓말 같은 일이 현 실화된 것이다.
일명 드림 퍼포먼스의 초연이었 다.
당연히 드림 엔터테인먼트 소속 아이돌에게는 HxT 의 퍼포먼스가 기준이 되어 모두가 갖춰야 할 기 본기가 되었다.
-IT 기술로 거듭난 팬클럽 문화-클럽 HxT 뉴제너레이션 1기, 앞으로 차원이 다른 아이돌 팬덤 문화 이끌 것!
컴백 쇼와 함께 화제가 된 건 확 달라진 팬클럽 문화였다.
1세대 아이돌 그룹이라 할 수 있 는 이 시기의 팬덤 문화는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다.
초기였기에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었다. 그렇기에 거대 팬덤이 다 른 아이돌 팬덤을 대대적으로 디스 하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다.
이번 표절 사태가 터지면서 그야 말로 그것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HxT 팬덤이 마냥 피해 자라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1 년 전만 해도 클럽 HxT만한 폭군 팬덤은 또 없었으니 말이다.
여성 아이돌 그룹에 저지른 사건 사고는 그야말로 몇 페이지를 써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되로 주고 말로 돌려받는다는 속 담이 딱 맞았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이 시점에서 과감한 단절을 선택했다.
기존의 클럽 HxT는 해체하고 새 로운 클럽 HxT를 출범한 것이었 다.
가입비가 있는 정식 팬클럽이다.
가입비는 3만 원으로, 분탕질을 위해서 선뜻 가입할 수 없는 가격 대를 설정했다.
대신 가입한 이들에게는 다른 팬 클럽과는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 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주어지는 건 한국 최 대의 포털 사이트인 넥스트컴 팬클 럽 전용 카페의 가입 코드였다.
팬클럽 회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 은 물론이고, HxT 멤버들이 직접 셀카나 글을 올리는 전용 페이지도 있었다.
익명으로 접할 수 있는 톡톡도 좋은 소통 수단이지만, 어그로와 안티에 취약한 것이 특징이기도 해 서 우호적인 이들과 만나는 통로로 새로운 팬클럽 카페만한 게 없었다.
다만 이러한 팬카페는 다른 아이 돌 그룹도 다 있는 것이었다.
중요한 건 콘텐츠였다.
멤버들의 일상을 담은 3?5분 분 량의 영상이 매주 2개 씩 올라온 다. 21세기에 크게 활성화되는 N로 그였다.
또한, 팬클럽 회원에게만 공개되 는 비공개 톡톡 계정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셀카 혹은 짧은 톡을 올리 도록 했다.
이런저런 스케줄이 많은 아이돌 들에게 상당히 귀찮은 일이기도 한 데, 아이돌은 팬덤이 있어야 존재 의의가 생기는 직업이었다.
게다가 HxT 멤버들도 회사가 뒤집어지는 표절 사태 속에서 팬덤의 지지 덕에 힘을 낼 수 있다는 걸 체감했기에 다들 열심이었다.
여기에 유재원의 넉넉한 지원도 빠질 수가 없다.
팬클럽 가입비가 아깝지 않을 혜 택이 주어졌다. 바로 고급 퀄리티 를 자랑하는 멤버쉽 카드와 응원봉, 그리고 포토북이었다.
멤버쉽 카드는 단지 클럽 HxT의 멤버라는 걸 증명하는 것에서 그치 지 않고, 다양한 곳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바로 공연과 사인회, 공방 등에 대한 응모권이다.
클럽 회원들에게 먼저 응모를 받 고, 빈자리가 남으면 공개 모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번 컴백 무대로 선택된 빅쇼의 방청석 역시 그런 식으로 모집된 행사였다.
당연히 클럽 회원들만으로도 분 배가 끝나서 공개 모집 자체가 없 었다.
여기에 큰 호평을 받은 건 응원 봉이었다.
이제까지는 아이돌마다 선점한 컬러의 풍선을 흔드는 게 전부였다.
일부에선 색색의 야광 막대를 사용 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응원봉 이 선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퀄리티로 만 들어졌기에, 유료 팬클럽에 가입한 이들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았고, 다른 아이돌 팬덤으로부터는 부러 움을 자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팬들은 아이돌에 게 애정을 갖는 대가로 기획사에 착취를 당하는 게 이 바닥의 생리 였다.
굿즈라는 게 막 나오기 시작했는 데, 허접하고 딱히 쓸모도 없는 제 품인데 아이돌 얼굴이 박혔다는 이유로 바가지를 쓰며 구입해야 했으 니 말이다.
물론 아이돌 상술의 최고를 달렸 던 건 LSM이었다. 반면 새롭게 출 범한 드림 엔터테인먼트는 이번 정 식 팬클럽으로 그 우려를 단번에 벗었다.
가입비 3만 원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는 설마 했는데, 가입 후 배송되는 멤버쉽 상품과 이어지는 정책들을 보고 그 우려는 말끔하게 해소되었다.
역시 대기업이 좋다는 소리가 절 로 나올 정도였으니, 고객 만족도 수치 같은 건 계산해볼 필요가 없었다.
반면 소수의 의견으로 폐쇄적인 팬클럽 운영으로 외연 확장을 포기 한 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지 만, 대중성과 확장을 포기한 건 절 대 아니다.
이미 새로운 공식 팬클럽 가입자 수만 10만 명이 넘었다. 게다가 가 입 혜택이 어마어마하다는 소문이 난 이후로 가입자 증가 추세는 더 욱 탄력을 받았다.
결정적으로 앨범의 퀄리티가 너 무 좋았다.
가수는 뭐니뭐니해도 음악이 좋아야 하는데, 이번엔 제대로 터졌 다.
4집 앨범의 타이틀곡은 힙합이었 고, 10대의 감성에 공감하며 사회 비판적인 가사를 담아냈다.
수록곡의 경우엔 서정적인 발라 드부터 댄스까지 다양한 취향을 반 영했다. 당연히 수록곡이라고 수준 낮은 곡을 쓰지 않았다. 전문적인 A&R팀을 구성해 최고의 퀄리티를 자랑했으니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을 노래들이었다.
유료 팬클럽이 작은 장애물이긴 했어도, 확장성은 조금도 줄지 않 았다.
조심해야 할 건 딱 하나. 표절 논란에 다시 빠지는 것이었다. 3집 표절 사태는 유재원만이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유재원이라도 2번 은 무리다. 그렇기에 앨범의 퀄리 티보다 더 챙긴 건 혹시나 모를 표 절 논란 차단이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것은 물 론이고, 넥스트 뮤직의 데이터베이 스와 직접 비교까지 해봤을 정도다.
자본과 기술력 그리고 멤버들의 피나는 노력이 더해져서 만들어진 4집 앨범이었다.
여기에 언론들의 스포트라이트에 보다 정교하게 집중된 팬덤이 모였 다.
안티들의 반응까지도 하나의 이 슈였으니 흥행에 실패하는 게 불가 능한 상황이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