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권 21화
이런 직원들의 반응을 유재원은 예상한 것처럼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거티브 차단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키워드 관리겠죠. 인터 넷 배틀을 떠보신 분들은 잘 아겠 지만,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조 합으로 네거티브한 감정을 전달하 는 이들이 상당합니다. 우리 ID 그 룹의 필터링 시스템은 이 방면에 있어 철벽을 자랑하죠. 수백 명에 달하는 모니터링 담당 직원들의 헌 신 덕일까요? 아닙니다. 북미 지역 의 필터링 시스템을 맡고 있는 분 들은 100명도 되지 않습니다."
100명이라고 하니 많아 보이지 만, 이들이 동시에 근무하진 않는 다.
8시간 근무라는 기본 방침에 의 해 교대 근무를 하고, 각자의 사정 에 따라 근무 시간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그렇기에 상시 근무 인원은 40명 정도였다.
차단용 키워드의 관리를 담당하 는 건 바로 기계 학습이었고, 이를 인공지능이라고 칭해도 될 만큼 성 장했다.
무려 7년이 넘는 시간을 묵묵히 학습했으니, 이젠 2CH.com의 네임 드 네티즌들보다 더 인터넷 용어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이미지 검색이죠."
이미지 검색 역시 인공지능과도 높은 연관성이 있다.
넥스트컴 검색 바에 이미지 검색 버튼을 누르고, 알고 싶은 이미지 를 업로드하거나, 이미지의 URL을 입력하면 결과가 주룩 나온다.
처음엔 뭔가 싶었던 네티즌들도 이젠 자주 사용하는 기능인데, 잡초의 이름부터 몰랐던 역사적 인물 까지도 쉽게 검색되었다.
물론 네티즌들은 유재원의 의도 와는 다르게 성인용 동영상을 찾는 데 주로 활용했다.
도무지 배우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 이미지 검색을 하면 작은 인지도를 갖은 이들도 쉽게 찾아졌 으니 말이다.
"이미지 검색 역시 데이터베이스 가 중요하죠. 처음엔 사람이 일일 이 관리할 수 있겠지만, 데이터 용 량이 방대해지면 불가능합니다. 그 렇기에 기계적인 학습으로 이를 대체했는데,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습 니다."
유재원은 마치 예상치 못한 좋은 반응에 인공지능을 공식적으로 꺼 내드는 것처럼 말했다.
이미 이미지 검색용 인공지능이 도입된 알고리즘은 유재원이 한창 이던 시절에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던 골든 코드였음에도 말이다.
"혹자는 겨우 이미지 검색에 무 슨 거창한 인공지능이냐 생각하시 는 분도 계시겠죠? 하지만 이 알고 리즘의 활용 능력은 상당히 범용적 입니다."
분명 이번 비전 발표가 끝나고 나면 아직 인공지능은 때가 아니라 고 할 매스컴이 수십 곳은 될 것이 다.
이들을 위해 친절하게 보따리를 풀어주는 유재원이다.
"단적으로 예를 하나 들어보죠. 요즘 의료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학 문인 영상의학과에 이미지 해석 인 공지능이 결합되면 어떻게 될까 요?"
영상의학과는 엑스레이, 초음파, CT, MRI 등의 장비를 이용해 추 출한 이미지를 보고서 질병의 진단부터 치료 방법을 결정하고, 치료 후의 경과를 확인하는 데 요긴하게 쓰이는 학과였다.
이미지를 보고 판독하는 건 사람 이 하는 일인데, 정확한 판단을 위 해선 높은 수준의 수련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진은 종종 나왔고, 환자들에게 오진은 치명적 이었다.
이미지 해석 작업에 인공지능이 도입되어 진단을 돕는다면 의학 발 전에 엄청난 진보가 일어날 것이다.
환자들은 만에 하나 있을 오진을 피해서 좋고, 의사들은 과중한 업무에서 탈출할 수 있어 좋고, ID 그룹은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서 좋 다.
물론 선결 과제는 있다.
인공지능의 분석을 믿을 수 있는 가 하는 의구심을 완벽히 해소시키 는 일이었다.
이전 생에서 구글은 자사의 인공 지능이 우수하고 믿을 수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세기의 이벤트를 치렀다.
첫 시도가 바둑이었는데, 거기서 부터 삐끗하고 긴 길을 돌아가야 했다.
압승을 예상했던 내부의 판단과 달리 1패를 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단순한 수식어에 불과했던 신의 한 수라는 말이 진짜 존재하는 것 임이 증명된 경기였다.
이후 구글은 거의 15년에 가까운 시간을 더 투자해 인공지능의 고도 화를 진행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알파고의 실패 는 구글에 어마어마한 이득이 되었 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기 위해 부단 히 노력한 결과, 그 어떤 회사들보 다 빠르게 기술의 특이점을 넘어선인공지능 제작에 성공했으니 말이 다.
유재원의 최종 목적지 역시 특이 점을 넘어선 인공지능의 자체 제작 이었다.
그렇기에 일찌감치 인공지능에 대한 떡밥을 던져 놓기 위해 새천 년의 첫 번째 비전 선포식을 선택 한 것이다.
너무 일찍 꺼내든 것일 수도 있 다.
SNS의 경우엔 톡톡이란 서비스 로 소비자들이 빠르게 접할 수 있 었지만, 인공지능은 앞으로도 필터링 시스템과 이미지 검색을 통한 것이 전부일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앞으로 그룹이 인공지능 분야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고 M&A도 이 상해 보이지 않게 만든 것만으로 충분했다.
게다가 유재원은 당장 인공지능 의 상업적 활용을 생각하는 게 아 니었다.
당장은 통합된 시스템에 인공지 능을 결합해 사람은 제공해 줄 수 없는 다양한 데이터를 뽑아보는 것 으로 충분했다.
다음 날.
역시나 유재원은 실리콘밸리의 락스타였다.
비전 발표가 끝난 지 하루도 지 나지 않아서 관련 기사들이 쏟아졌 다.
-현재의 IT 기술로 인공지능 완 성이 가능한 일인가?
-다수의 인공지능 전문가들, 이 미지 분석 기능과 필터링 시스템에 관심-일부 전문가들, 그것만으로는 인공지능이라 정의하기 어렵다-기계학습이란 무엇인가?
인공지능은 단번에 화제의 중심 에 올랐다.
그와 함께 2CH.com에 접속해 괜히 욕을 써본다든가 넥스트컴의 이미지 검색기를 사용해보는 사람 들이 대폭 늘어났다.
심지어 나스닥에 상장된 기업 중 에 인공지능에 관한 연구를 하는 기업은 주가가 오르는 일까지 벌어 졌다.
그렇게 실리콘밸리를 뒤집어 놓 은 유재원이지만, 곧장 인공지능 사업부 따위를 출범하는 일은 벌이 진 않았다.
유재원의 2000년도 주요 계획을 보자면 4월 한국의 총선, 6월엔 E3 쇼에서 X박스 발표, 7월 본인의 결 혼식, 연말엔 시스템 통합 완성이 었다.
그리고 빼먹으면 큰일 나는 일이 미국의 대선에도 관여하는 것이었 다.
선거일까지 11개월 남았지만, 미 국 정계는 이미 대선이 시작된 분위기였다.
깊은 고민 속에서 앨 고어를 선 택한 유재원이었기에 예전처럼 부 시가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을 철 저하게 막을 작정이다.
이미 그 일은 시작되었다.
어제 2000년도 비전을 발표했던 유재원은 어느새 전용기를 타고 동 부로 이동 중이었으니 말이다.
세계 경제 수도 뉴욕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위대한 개츠비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격렬하게 약속한 것처럼 화려했다.
쌍둥이처럼 우뚝 서 있는 세계 무역 센터를 중심으로 펼쳐진 콘크 리트 정글 속에서 유일하게 녹색을 자랑하는 센트럴 파크 역시 솜이불 같은 하얀 눈을 덮고 있었지만, 푸 른빛은 여전했다.
"보스, 뉴욕에 오신 걸 환영합니 다."
뉴욕에 도착한 유재원을 제일 먼 저 맞이한 건 레밍턴이었다.
유재원의 호칭은 늘 보스였지만, 레밍턴은 이제 본인이 더 보스다운 모습을 자랑했다.
타임워너 넥스트컴이라는 세계 최대의 미디어그룹 총회장에 오른 지도 몇 년이 흘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레밍턴은 이제 거대한 그룹의 총회 장님다운 모습이 풍겨졌다.
"어서 오세요."
그런 레밍턴 옆에는 ID 인베스트 먼트의 빈센트 그린힐이 있었다.
2차 일본 공략 이후에는 존재감 이 약간 덜해진 빈센트 그린힐이었 지만, ID 인베스트먼트는 ID 그룹 에서 제일 거대한 현금 흐름을 책 임지는 중요한 금융 회사였다.
더욱이 최근 월스트리트에서는 ID 인베스트먼트에 대한 재평가가 빠르게 이뤄지는 중이었다.
ID 인베스트먼트가 처음으로 명 성을 얻게 된 건 걸프전 석유 덕분 이었다.
이후에도 일본의 지수 폭락, 동 아시아 외환위기를 이용해 엄청난 돈을 불렸다.
월 스트리트는 ID 인베스트먼트의 성공에 배가 아픈 듯 실력을 인정 하는 이들은 얼마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대한 성공은 누구도 예측 못할 커다란 변수를 이용한 극단적 투자였기에, 상식으 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다가 최근 1년 사이에 ID 인베스트먼트에 대한 월 스트리트 의 생각도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IT 버블 붕괴 이후 ID 인베스트 먼트는 새로운 포트폴리오룰 구성 했는데, 스타벅스부터 자라까지 IT 를 탈피해 다채로운 종목을 자랑했 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ID 인베 스트먼트의 포트폴리오가 무섭게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이쯤 되면 실력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빈센트 그린힐에 대한 평 가도 차원이 달라졌다.
그럴 때마다 빈센트는 양손을 저 으며 겸양을 표했다.
포트폴리오의 구성은 유재원이 대부분 설정한 것이고, 본인은 운 영만 했다고 말이다.
빈말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했 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재원은 빈센트 그린힐 사장을 가볍게 생각 하진 않았다.
수백억 달러가 운용되는 ID 인베 스트먼트는 아직까지 단 한 번의 금전 사고가 없었다.
월스트리트의 금융 회사들이나 런던의 회사들도 모럴 헤저드는 피 하지 못했다.
특히 베어스턴스 같은 회사는 직 원의 횡령으로 파산해버리기까지 했다.
자금 운용 시스템이 정교해진 지 금은 직원들의 모럴 헤저드를 파악 하는 게 정확해졌지만, 체계가 아 예 없었던 초기엔 위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D 인베스트먼트가 안정적으로 운용될 수 있던 건 빈센트 그린힐의 공이 컸다.
"고마워요!"
유재원이 두 사람을 보는 눈빛이 각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공항에서 해우를 마친 유 재원은 두 사람의 에스코트를 받으 며 숙소인 맨해튼의 ID 인베스트먼 트 빌딩으로 이동했다.
예전엔 트럼프 타워였지만, 이젠 뉴욕 사람들 모두 ID 인베스트먼트 빌딩으로 익숙해진 바로 그 건물이 었다.
"회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ID 인베스트먼트 빌딩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유재원의 옆자리에 앉 은 빈센트 그린힐이 조심스럽게 말 을 꺼냈다.
"네, 뭔데요?"
빈센트 그린힐의 말을 들은 유재 원은 왠지 느낌이 싸했다.
"회장님과 함께 일을 한 지도 벌 써 10년이 넘었습니다. 덕분에 과분한 시계도 두 개나 받게 되었습 니다."
창립 멤버들과는 다들 10년이 넘 게 일했다. 그렇기에 그 고마운 마 음을 담아서 10년 근속을 챙긴 것 아니겠는가. 빈센트 그린힐의 손목 에도 5년 전에 받았던 서브마리너 대신, 팔각형 모양의 로열오크가 금빛을 내며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 었다.
"3번째는 뭘까 하는 궁금증이 당 연히 생겨났지만, 참 아쉽게도 제 몸이 그때까지 버텨주지 못할 것 같습니다."
빈센트 그린힐이 근속자 선물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은퇴 의사였다.
애초에 빈센트 그린힐이 유재원 과 함께 일을 시작할 때부터 은퇴 대상이었다.
그때의 나이가 미국 기준으로 61 세였다.
이후 10년이 흘렀으니, 지금은 벌써 기세인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어려워지 고, 잔병치레도 많아졌습니다. 맑은 정신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 졌고요. 이 상태로 중요한 일을 수 행하다가는 실수를 하겠다 싶더군 요. 회장님께서 허락해주시면 저에 게 주어진 과분했던 직책을 내려놓 고 싶습니다."
"음, 오늘 갑자기 그런 말씀을 꺼내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렇습니다. 작년부터 말씀을 드려야겠다 싶었지요."
"후임자는 생각해보셨어요?"
빈센트 그린힐은 유재원에게 있 어 최고의 자산 운용 전문가였다.
유재원이 했던 무모한 요구를 군 말 없이 받아서 120%의 성과로 수 행해준 존재였으니 말이다.
월스트리트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아가 강하다.
어마어마한 돈을 움직이는 세계 에서 깜빡하면 제정신을 유지하기 가 쉽지 않다.
알게 모르게 각성제는 기본으로 하고, 마약에도 손을 데는 이들이 상당했다.
빈센트 그린힐과 같은 사람을 또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눈 여겨 보던 이들은 몇 있습니 다만, 제대로 살펴본 건 아닙니다."
역시 빈센트 그린힐다운 대답이 다.
ID 인베스트먼트의 오너는 유재 원이고, 그렇기에 후임자를 찾는 것도 유재원의 권한이라는 이야기 였다.
하지만 ID 인베스트먼트는 빈센 트 그린힐에게 완전 위임한 상태였 다.
단적으로 인사철이 올 때면 유재 원은 빈센트 그린힐이 올린 인사명 령서에 사인만 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ID 인베스트먼트 직원 들 중에 누가 빈센트의 뒤를 맡는게 적절한 사람인지, 당장 떠오르 는 사람이 없었다.
유재원의 욕심은 차라리 빈센트 그린힐이 앞으로 계속 ID 인베스트 먼트의 사장을 맡아줬으면 좋겠다 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에서 유재원은 떡밥을 던졌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