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권 22화
아주 없는 이야기를 한 건 아니 었다. 미국 상무부 산업보안국에서 중국에 수출 금지를 요청했고, 일 본의 통상산업성에서는 이라크에 수출 금지령을 내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플레이스테이션2가 테러 리스트 손에 넘어간다고 해서 세 계 안보에 크나큰 위협이 될 일은 없다.
플레이스테이션2에 탑재된 이모 션 엔진이라는 CPU는 범용성이 떨어지는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X박스에 들어가는
AMD사의 듀얼코어 CPU가 더 위
험하다. x86 아키텍처였으니 뽑아 내서 컴퓨터용 보드에 장착할 수 있었다.
물론 개조를 막기 위해서 X박스 용 CPU는 핀 구조가 살짝 달랐고, 게임기 보드와 아예 납땜을 시켜 놔서 쉽게 뺄 수도 없게 했지만 어쨌든 가능성은 플레이스테이션2 보다 훨씬 높았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화려한 언 론플레이를 해도 살짝 꺾인 플레 이스테이션2의 판매량은 쉽게 회 복되지 않았다. 즐길 게임도 적었 고, 온라인 지원도 X박스에 비해 부족했던 탓이다.
반면 X박스는 헤일로와 둠3로 여전히 강력한 원투 펀치를 담당 했고, 이번에 GTA3가 출시되면서 판매량에 탄력이 붙었다.
"덕분에 한국에 가벼운 마음으 로 갈 수 있겠네."
유재원은 미국 대선에 어느 정 도 윤곽이 나오면 한국으로 들어 갈 예정이었다. 혼자 가는 게 아니 라 티파니 그리고 리사수 박사의 M-AP 설계팀과 함께 한국에 갈 예정이었다. 티파니는 아내이니 함 께 가는 것이고, 본론은 M-AP 설 계팀이었다.
ID 일렉트로닉스의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차세대 모바일 프로세서 양산이 가능한지 따져 볼 목적이 었다.
그렇기에 이번 출장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ID 그룹 도 본격적인 스마트폰 생산에 뛰 어든다는 이야기였다.
-대통령 후보 지지율 조사 보고 서.
-앨 고어 48%, 부시 41%.
-러스트 벨트를 제외한 모든 지 역에서 고르게 앞서고 있음.
한국으로 출국하기 전, 유재원은 ID 그룹 정보팀이 올린 미 대선 보고서를 받아서 읽을 수 있었다.
이전과 달리 앨 고어가 부시를 유의미하게 앞서고 있다는 보고서 였다.
첨부된 데이터를 보니 예전엔 밀렸던 지역에서도 앞서나가고 있 었고, 과거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플로리다주에서도 앞서고 있었다.
ID 그룹의 자체적인 여론 조사
를 통해 나온 데이터였고, 오차 범 위를 벗어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전보단 나았다.
더욱이 전체 선거인단의 분포를 살펴보면, 실제 투표에서는 플로리 다주를 잃는다 하더라도 앨 고어 가 이길 확률이 훨씬 높았다. 만약 플로리다주까지 가져온다면 앨 고 어의 압승이었다.
이렇게 여론 조사 결과 좋은 건, 유재원이 보았을 때 미국 경제의 활황 덕이 컸다.
원래대로라면 IT버블 붕괴의 직 격탄을 앨 고어가 다 받게 되었다. 하지만 유재원으로 인해 IT붕괴는 전보다 훨씬 빠르게 일어났고, 지 금은 회복 중이었다.
더욱이 실물 경제 상황은 전보 다 훨씬 좋았기에, 회복에 탄력을 받아서 나스닥을 비롯해 다우존스 산업지수는 전고점을 향해 무섭게 성장 중이었다.
"너무 끓어오르는 거 같은데."
회복세가 너무 빨라서 유재원은 오히려 걱정이 들 정도였다. 이러 다가 쌍봉을 만들고 다시 떨어지 기 시작하면, 전보다 더 무섭게 떨 어질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번에도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세계 금융 시장에서는 유 재원이나 ID 인베스트먼트의 경고 를 귀담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 다.
오히려 원유나 금에 투자한 ID 인베스트먼트를 보고 감을 잃었다 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원유와 금 가격도 오르고 있어 서 손해를 본 건 아니었지만, 주식 보다는 수익률이 많이 낮았으니 말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유재원은 ID 인베스트먼트의 포트폴리오에 변 화를 줄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2001년 9월에는 세계 를 뒤흔들 테러까지 예정되어 있 었다. 오히려 이러한 반응에 유재 원은 안심하고 안전 자산을 매입 했고, 알게 모르게 선물 시장에도 참가해 풋 포지션을 확대해 나갔 다.
그렇게 미국에서의 일을 모두 마친 유재원 부부가 한국으로 들 어온 날은 2000년 11월 30일이었 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아 주 신기한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 다.
"여긴 안 된다, 이놈들아!"
"이 개새끼들아! 날 밟고 가라!"
일단의 사람들이 서로서로 인간 띠를 만들고서 악을 쓰고 있는 모 습이었다. 인간띠를 만드는 건 보 통 힘없는 이들이 어떤 거대한 공 권력이나 힘에 맞서기 위한 몸부 림이 었다.
그런데 지금 펼쳐진 인간띠는 숭고함과의 거리가 100만 광년쯤떨어져 있었다.
인간띠가 만들어진 곳은 바로 대한일보 회장의 대궐과 같은 사 택이었고, 인간띠를 만든 이들은 대한일보의 기자들이었으니 말이 다.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고 하니, 최강욱 부회장의 말대로 벌금과 추징금 미납으로 압류된 대한일보 의 자산들은 경매에 나왔다.
회장 사택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번의 유찰 끝에 공시 가격의 50% 선에서 ID 그룹이 낙찰 받았 고, 낙찰 받는 즉시 퇴거를 요청했 다.
ID 그룹에서는 이 자리를 깔끔 하게 밀어버리고 디지털 문화 단 지를 세우겠다는 재개발 사업을 발표했다.
모두가 그 발표에 환호했다. 혹 석동 주변에 사는 이들은 대규모 문화 단지가 들어서면 집값 상승 에 좋았고, 서울시에서도 애물단지 하나가 사라지고, 시민들이 즐길 공간이 늘어나니 말이다.
이에 반대하는 건 오직 하나 대 한일보뿐이었다. 얍삽하게도 회장 일가는 곤욕을 치를까 일찌감치 사택을 나왔는데, 그 대신 대한일 보의 기자들이 진을 쳤다.
결국 강제 집행을 신청했고, 그 날이 찾아온 것이다. 최강욱 부회 장이 힘 꽤나 쓴다는 용역들을 대 거 데려와서 대치가 이뤄지고 있 다.
"저것들, 치워!"
누군가의 한 마디에 용역이란 탈을 쓴 덩치들이 움직이며 본 게 임이 시작되었다.
기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안 좋 은 그림을 그려내려고 애를 썼다. ID 그룹에서 이 집을 밀어버리고 재개발을 하겠다고 발표했으니, 폭 력적으로 철거하는 그림을 만들어안 좋은 이미지를 씌우려고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와장창!
기자들이 만든 인간띠는 덩치들 의 돌격에 와르르 무너졌다. 피지 컬의 차이가 애초에 상대도 되지 않았다.
"못 배워 처먹은 깡패 새끼들 아!"
"생존권 보장해라! 한겨울에 나 가 죽으라는 거냐!"
대학 시절에 나름 투쟁이라는 걸 좀 해 본 모양인지 사회부의 기자들이 악을 썼지만, 그뿐이었다. 황소처럼 달려온 덩치에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몸통 박치기를 당했고, 데굴 굴러떨어졌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데굴 굴러떨어진 양반이 썼던 기사 중 에는 전문 시위꾼을 저격하는 기 사가 제법 많았다는 점이다.
재개발 지역에 전문 시위꾼들이 들러붙어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경우가 많으니, 공권력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투자자를 보호해 줘야 나라 경제가 발전한다는 식이었다.
비단 사회부 기자뿐만이 아니라, 대한일보의 기사들은 친기업적이 었고, 친자본적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 었다.
언제나 갑이었을 줄 알았던 대 한일보는 을로 전락했다. 동시에 대한일보는 가장 혐오스럽게 취급 했던 이들과 같은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었고, 당연하게도 용역이라 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강제로 진 압되는 중이다.
재미있는 건 이런 상황 속에서 도 꼼수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배상금과 추징금이 걸린 대한일보였지만, 사주 일가의 부유함은 여전했다. 숨겨놓은 재산 이 워낙 많았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번 강제 집행에서 이들 역시 용역을 고용해 기자들 사이사이에 숨겨두었던 것이다.
덕분에 기자들의 인간띠는 금세 무너졌지만, 일부는 제법 저항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대한일보 사주 측에서 그렇게나 원하는 폭 력적인 그림이 만들어졌지만, 이들 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 도 없었다.
이 모습을 취재하려고 나온 다 른 언론사의 취재진들이 있었다.
흑석동 사택 철거라는 게 상당 히 의미심장한 상황이었기에, 신문사는 물론이고 방송국에서도 나왔 다.
그런데 이들이 포커스를 맞춘 건 짐승처럼 끌려가는 기자들이 아니라, 흑석동 사택 철거 그 자체 였다.
그나마 대한일보와 같이 보수적 색채를 보이던 신문사가 두 곳 정 도 있었지만, 거기서도 몸을 사렸 다.
모두의 외면 속에서 대한일보의 저항은 의미 없이 무너졌다. 그렇 게 사람들이 치워지자 중장비가 들이닥쳤다.
콰르릉 하는 소리를 내며 불도 저가 먼저 움직였고, 사택의 철제 대문을 밀어버렸다.
밤의 대통령이라는 별명으로 7, 80년대를 주름 잡았던 대한일보의 철옹성은 허무하게도 무너졌다.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에 시원하 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변 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 시원하다!"
유재원이 그랬다.
흑석동 사택 코앞에서 사택이 철거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시원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당연히 시원하다는 감정은 심리 적인 것이었다. 실제로는 매우 추 운 겨울인지라 차 안에서 벗어나 진 않았지만, 강 건너에서 불구경 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한바탕 공성전이 끝나자, 중장비 들이 전격적으로 투입되었다.
사택의 건물은 물론이고, 집 안 의 가재도구와 각종 인테리어 물 품까지도 한 방에 낙찰받았기에 이걸 모조리 부숴 버린다고 해도 문제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건물을 무 너뜨리진 않았다.
먼저 고용한 용역들이 집 안으 로 진입했고, 조금 다른 복장의 사 람들도 뒤따라 들어갔다.
"혹시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예 술 작품이 있을지 몰라, 전문가를 대동하도록 했습니다."
오랜만에 유재원의 옆자리를 차 지한 최강욱 부회장의 설명이었다.
꼼꼼하기 그지없는 최강욱은 혹 시나 건물 안에 사람이 숨어 있을지 모를 일이고, 사주 일가가 숨겨 놓은 예술품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미술 전문가까지 대동토 록 했다.
역시나 뭔가가 있던 모양이다.
용역들과 전문가들이 진입하고 나서 뭔가가 밖으로 옮겨지기 시 작했다. 파란색 이사용 박스에 담 겨서 옮겨진 터라 유재원도 안에 든 게 무엇인지 볼 수는 없었지만, 박스의 숫자가 적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이삿짐 박스가 옮겨지기 시작해 10분쯤 지나자 더는 나오 는 게 없었다. 시동이 꺼졌던 불도 저와 포클레인이 다시 힘차게 엔진음을 터트렸고, 사택을 무너뜨리 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도 좋아하시겠죠?"
"그럼요. 하늘에서 회장님답다고 하실 겁니다."
유재원의 물음에 최강욱이 척하 고 대답했다.
전명헌과 대한일보의 악연은 이 미 유명한 것이었다. 비단 한강 조 망권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안에 대해서도 충돌했었다. 가장 격하게 충돌했던 때는 전명헌이 대통령에 처음 출마했을 때였다.
대한일보의 영화가 계속되려면
보수 세력 집권의 연장인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어야 하는데, 전명헌 이 나서면 보수표가 분산돼 실패 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판단은 제법 정확했다. 실제 전 명헌이 나서자 김영삼의 실제 득 표수는 예상보다 훨씬 줄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악연에 유재원이 확실한 마침표를 찍어 버렸다.
"윤전기나 사옥도 압류해야 하 는데 말이죠."
전명헌 할아버지였다면 그렇게 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일 보와 사생결단을 보는 게 부담스 러웠던 모양인지, 자산 압류에 조 금 소극적이었다.
청와대에서는 언론의 자유는 지 켜줘야 하기에, 윤전기가 멈추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지만, 유재원 이 보기에는 그냥 부담스러웠던 게 확실하다.
최강욱 부회장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재원이 12살일 때, 대한일보 기자의 과도한 단독 기사 욕심에 자동차 사고가 나 죽을 고비가 있었다. 그때부터 악감정이 쌓여서 대한일보에 대단히 적대적이라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틀린 판단은 아니다.
하지만 유재원이 대한일보에 품 은 악감정은 그보다 훨씬 컸다. 전 생에 쌓인 복리 이자까지 더해졌 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구식의 양옥 집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까지 모 두 구경한 다음에야 자리를 떴다. 오랜만에 좋은 구경을 한 덕에 속 이 확 풀렸다. 앞으로도 좋은 구경 거리가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 이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