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572화 (572/1,007)

28권 6화

#388. 911

2001년이 된 게 어제 같은데, 벌 써 2월이 되었다.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유재원과 티파니는 아직 한국에서 지내고 있 었다는 점이다.

원래 이번 방한의 목적인 MAP 3의 자체 생산이 순조롭게 진행되 었으니 미국으로 돌아가도 무방했 지만, 예정보다 한국에서의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앨 고어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가 하려고 워싱턴에 잠깐 다녀온 거 말고는 쭉 한국에서 지냈다.

덕분에 유재원과 티파니의 설날 은 무척이나 한국식이었다.

일단 한국의 직원들에게 설날 보 너스와 휴가를 통 크게 집행하는 것으로 ID 그룹의 설 명절이 시작 되었다.

기본 100%, 작년에 성과가 좋았 던 부서라면 200%까지 설 명절 보 너스를 책정했다.

덤으로 고향 집에 갈 때 들고 가 라고 선물 세트도 준비했다.

다만 선물 세트를 준비할 때, 티 파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 다.

선물 자체는 좋은데, 선물의 내 용이 문제였다.

"한국에선 스팸이 명절 선물이 야?"

스팸이라는 단어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지는 티파니였다.

이에 대한 유재원의 설명은 말보다 행동이었다.

윤기가 잘잘 흐르는 흰 쌀밥을 먼저 준비했고, 거기에 노릇하게 구운 스팸과 김치면 끝이었다.

의구심 가득한 티파니의 눈이 한 입 먹자 깜짝 놀란 눈으로 바뀌었 다.

미국에선 기름기가 젤리처럼 응 고된 스팸을 생으로 먹는다고 알고 있었으니, 스팸에 대해 부정적이지 만, 실제 먹어보면 상상과 다른 맛 에 깜짝 놀라는 것이다.

작은 명절 해프닝이었다.

다른 일도 착착 진행되었다.

MAP 3 생산 다음으로 유재원이 눈여겨보고 있던 대한민국 축구 국 가 대표 감독 선임에서도 이전과 같이 거스 히딩크 감독이 취임했다.

안방에서의 첫 월드컵이었고, 평 양에서도 경기가 열리는 남북 공동 개최였기에 이전의 한일 월드컵보 다 훨씬 중대한 행사였다.

따라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게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기에 축구 협 회의 움직임도 신중했다.

다행히 선임 날짜가 원래보다 10일 정도 늦춰지긴 했지만, 98월드 컵에서 한국에 0 : 5의 참패를 안겨 줬던 거스 히딩크 감독이 낙점되었 다.

10일 느려진 대신 이전보다 훨씬 더 전폭적인 지원 약속이 이루어졌 는데, 여기엔 축구 협회장인 전재 준의 공이 컸다.

전재준은 축구에 본인의 커리어 를 걸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래 그룹이 그 의 두 형님에게 양분되어 버렸고, 전재준에게 돌아간 건 조그마한 백화점과 전명헌의 지역구였던 울산, 축구 협회 회장 자리가 전부였다.

결국, 전재준은 본인이 성장하려 면 국민이 인정할 만한 성과를 내 서 정치적인 거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고, 2002 월드컵에 올인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렇기에 성적을 위해서 축구 협 회의 오랜 관행을 싸그리 무시하는 것도 가능했다.

오직 성적만을 위해 외국인 감독 을 선임했고, 국가대표팀 기량 향 상을 위해 국내 프로리그 일정까지 조절했으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능력과는 별개로 특별한 라인을 탄 선수를 국가대표팀에 승선시켜 주 는 일은 아예 끊어 버렸다.

유재원도 약간의 조언을 해 주었 지만, 축구 협회의 혁신은 전재준 스스로 결정한 것도 많았다.

이러한 전재준의 행보에 우려를 표하거나, 두고 보자는 식의 시선 도 많았다.

심지어 전재준도 불안했던 모양 인지, 유재원에게 종종 전화를 걸 었고 한 번은 찾아오기까지 했다.

이번 선택이 옳았다는 건 결과가 말해 줄 것이기에 유재원은 굳건히 중심을 잡아 주었다.

-스팀 런칭!

-지상 최대 규모 온라인 게임 유 통망.

-ESD,com 이 스팀으로 거듭나

-역대급, 무제한 할인 행사!

ID 그룹의 행보 역시 멈추지 않 았다.

게이브 뉴웰이라는 적임자에게 맡겨진 ESD.com은 스팀으로 바뀌 어 작년부터 내부 테스트 중에 있 었다.

내부 테스트에서 여러 가지 피드 백도 받고, 문제도 발견해 수정한 다음 정식으로 런칭했다.

ID 그룹의 자본력을 보여주는 듯 런칭 행사는 무척이나 요란했다.

넥스트컴을 비롯한 인터넷 게임 잡지, 심지어 종이 매체에도 광고가 쏟아졌다.

-PC는 물론 화제의 X박스까지 지원.

-스팀, 시작부터 파격 세일, 최 대 75%까지 할인.

-인디 게임 특별 섹션. 소규모 개발자 지원.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선보인 것 은 할인 행사였다.

스팀 하면 생각나는 게 무시무시 한 할인율이었다.

최신작에 대한 할인은 평소처럼 10% 수준에서 그쳤지만, 출시한 지 반년 정도 지난 게임부터는 파 격적인 50% 할인 딱지가 붙었다.

2, 3년 정도 지난 게임이라면 75% 할인이었고, 일부 게임 유통 사나 개발사와 이야기가 잘 된 경 우에는 비교적 최신 게임도 75% 할인이 었다.

더욱이 X박스에도 스팀이 기본 탑재되어 있었다.

인터넷에 연결된 X박스는 자동 으로 업데이트가 이뤄지도록 했다. 인터넷을 쓰지 않고 단독으로 X박스를 즐기는 사람에겐 스팀은 머나 먼 이야기였다.

아쉽게도 인터넷을 연결해 멀티 플레이를 즐기는 사람의 숫자는 이 런 사람들보단 적었다.

작년 X박스가 출시되고서 견조 한 판매량을 보여주었고, 덕분에 1 천만 대 판매를 1월 말에 달성했 다.

플레이스테이션2의 경우엔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달성했으니, 한 박자 느리다고 볼 수 있지만, 신생 의 게임기가 탄탄한 기반의 플레이 스테이션의 뒤를 바싹 쫓고 있는 건 엄청난 성과였다.

덕분에 6세대 게임기 경쟁은 플 레이스테이션과 X박스의 2파전이 되었다.

세가의 드림캐스트나 닌텐도의 게임큐브도 6세대 게임기 전쟁에 참가한 도전자이긴 했지만, 드림캐 스트는 진작에 망해 버렸고, 닌텐 도는 마리오를 앞세운 자사의 게임 으로 겨우 명맥을 잇고 있는 중이 었다.

하여튼 1천만 대나 팔린 X박스

였고, 스팀 출시 이후 일주일 동안 X박스가 설치된 횟수는 400만 건 을 훌쩍 넘겼다.

또한, 엄청난 할인 행사 덕에 과 거 빛을 보지 못했던 게임들도 놀 라운 판매량을 보여주었다.

2월 초에 접어든 지금 100만 건 이 넘는 판매량을 보여주는 게임도 있었다.

이러한 통계 자료는 게임 개발사 와 게임 유통사에게도 전해졌다.

스팀으로의 합류를 권유하기 위 해서였다.

막 출시된 신작 게임이라 해도 100만 장 이상을 팔아 치우는 건 일부 인기작에 한하는 일이었다.

더욱이 발매하고서 6개월이 지나 면, 판매량이 뚝 떨어져서 없다시 피 하는 게 현실이었다.

그런데 출시한 지 1년이 지난 낡 은 게임이 100만 장을 더 팔아 치 운 건 대단한 성과였다.

비록 정가에서 75%나 할인된 금 액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0에서 수 백만 달러의 이익을 새롭게 창출한 건 대단한 성과였다.

생각 이상의 디지털 소프트웨어 유통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자그마한 업체뿐만이 아니라 EA 나 액티비전과 같은 대형 유통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시각.

캘리포니아주, 샌머테이오시에 자 리한 EA 본사에서는 X박스와 스팀을 주제로 중대한 논의가 진행 중 이었다.

"2001년 1월까지의 X박스 누적 판매량은 1,106만 대입니다. 기기 1대당 타이틀 보유 수량은 4.6장으 로 플레이스테이션2의 3.1 장보다 훨씬 높습니다. 게다가 최근 런칭 된 스팀이라는 ESD 서비스의 돌풍 도 심상치 않습니다."

EA의 임원들 앞에서 프로젝터에 X박스와 플레이스테이션2의 통계 자료를 띄워 두고 발표 중인 사람 은 제임스 웹이었다.

호킨스 사장 시절 입사한 제임스 였다.

전직 해커였지만, 뛰어난 실력 덕에 EA의 수석 엔지니어로 발탁 되었고, 호킨스 사장이 퇴임하고서 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서 EA의 최 고 기술 책임자에 올랐다.

처음에는 프로그래밍만 잘 다루 었지만, 머리가 좋은 사람인 덕에 게임 업무를 하면서 게임 산업 전 체를 볼 수 있는 눈까지 길러졌다.

덕분에 호킨스 사장이 밀려났음 에도 CTO라는 자리까지 올라올수 있었다.

EA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며 내부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창업세대인 호킨스 사장이 밀려 난 때는 1996년이었다.

이후 래리 프로브스트라는 이가 새로운 CEO로 수혈되었는데, 32비 트 게임기 전쟁에서 소리 소문 없 이 사라진 3D0 컴패니의 창업자 였다.

새로운 CEO인 래리 프로브스트 의 내부적 평가는 좋지 않았다.

ID 그룹과의 저작권 소송을 주도 했다가 패소했고, 오히려 EA와 ID 그룹과의 탄탄했던 파트너십이 무 너지게 만들었을 뿐이다.

피파 축구 게임과 니드포스피드 를 부활시켰고, 여러 게임 스튜디 오를 무차별적으로 합병한 것을 그 나마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일이 었다.

이런 래리 프로브스트도 세상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고, 그 중심엔 ID 그룹의 X박스가 있다는 걸 알 고 있었기에, 이런 비상 대책 회의를 만든 것이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X박스 입니다."

이어진 제임스의 말에 프로젝터 화면의 슬라이드가 바뀌었다.

X박스와 플레이스테이션2의 월 간 판매량 그래프였다.

초반 판매량은 플레이스테이션2 가 월등했다.

X박스는 플레이스테이션에 비해 한 칸 정도 모자란 수준이었다.

그런데 올해 1월까지 그래프를

확장하자 재미있는 그림이 나왔다. X박스의 기울기는 비교적 완만하 게 떨어지는 반면, 플레이스테이션 2의 그래프 기울기는 제법 가팔랐 던 것이다.

즉, 플레이스테이션2는 초반에 대량으로 팔아 치웠지만, 시간이 갈수록 판매량이 빠르게 줄어들었 고, X박스는 꾸준히 팔린다는 이야 기였다.

"올해 안에 판매량 역전이 일어 날 것이다. 이 말인가? 그렇게 확 신하는 이유는요?"

그래프를 보던 래리 사장의 물음 이다.

이에 제임스도 간단히 답했다.

"원인은 생각보다 빠른 LCD TV 의 보급입니다. 작년 여름만 해도 엔트리 모델이 1천 달러가 넘어가 던 HD LCD TV 가격은 지금 600 달러로 거의 반토막이 났습니다. 여름 성수기 때엔 400달러 밑으로 내려올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ID 디스플레이에서 작정하고 패널을 풀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임스는 LCD와 브라운관 TV에

서의 X박스와 플레이스테이션의 화질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진 않았 다.

EA는 명색이 북미 최대의 게임 유통사인데, 그 유명한 이야기를 모른다는 건 본분을 잊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유재원이 X박스를 낸 것은 어떻 게 봐도 즉흥적이었다.

플레이스테이션2의 운영체제가 정해질 때 안드로이드가 배제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X박스가 급히 개발되었다는 건 업계 사람들은 다아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실패를 점치는 사람들 이 많았고, EA 역시 과거의 악연이 있었기에 X박스용 게임 발매에 적 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절대 즉 흥적일 수가 없었다.

세계 최대의 LCD 디스플레이 업체인 ID 디스플레이가 대형 LCD 패널을 무차별적으로 양산했 고, 시장에선 이를 이용해 모니터 며, TV를 쏟아냈다.

처음에는 오버 스펙이라 여겼지만, 미국에서도 슬슬 공중파들 중 심으로 HD 방송을 준비 중이었고, VOD 업체인 타임플릭스에선 벌써 HD 스트리밍을 지원했기에 그 효 과를 빠르게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LCD TV는 X박스와 궁합이 너무 좋았다.

"어쩌면 플레이스테이션2의 수명 이 소니의 보증과 달리 일찍 끝나 버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자존심을 내려놓고 X 박스용 게임을 적극적으로 출시해 야 합니다."

제임스 웹의 발표는 끝났고, 회 의실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모두의 시선은 래리 사장에게로 몰렸다. 아무리 못났다고 해도 EA 의 최고결정권은 아직 래리에게 있 었으니 말이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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