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권 23화
" 괜찮아?"
자리에 앉은 유재원은 티파니에 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러 가지 맥락이 복합적으로 담 겨 있는 물음이었다.
유재원이야 제이콥은 완전 남으 로 느껴졌던 탓에 전해지는 슬픔이 그다지 크진 않았다.
하지만 티파니는 제이콥과의 추 억이 많이 쌓였을 테니, 무척 힘들 것이다.
더욱이 장례식 중에 극성스러운 이모들 때문에 무척이나 시달린 것 같은데, 스트레스를 너무 받으면 몸까지 아파 온다.
그리고 만에 하나지만, 비행기 납치 자살 테러에 제이콥이 희생된 것이기에 비행에 대한 공포심이 생 겼을 수도 있었다.
"음, 괜찮다고 하고 싶은데, 얼굴 에서 다 드러나지?"
티파니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티파니는 보석처럼 투명한 사람 이었다. 본인 감정에도 솔직하고, 숨기지도 않았다.
당연히 얼굴 표정이 말이 아니라 서 물어보는 말이기도 했다.
더욱이 티파니의 외가 쪽 배경도 장난이 아니지 않은가.
한국의 최대 재벌 가문마저 셰브 롱 앞에서는 코딱지라고 해도 과언 은 아니다.
유재원의 ID 그룹 정도가 되어야 비교가 가능해진다.
산술 가능한 시가 총액 면에서는 ID 그룹이 셰브롱을 앞서고 있지만, 전 세계의 영향력이나 미국에 서의 존재감, 인맥의 수준 등에서 는 셰브롱이 월등했다.
더욱이 셰브롱은 공개하지 않은 재산도 엄청나게 많았다.
이처럼 거대한 제국의 황태자가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당연히 황태자의 존재에 눌려 있 던 이들의 야망이 다시금 꿈틀거리 기 시작했다.
가족을 잃은 슬픔보다 누가 셰브 롱을 가져갈지 눈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실제 한국에서도 재벌 가문에서 불의의 사고로 누군가 죽었을 때, 제일 먼저 일어난 건 지분 재조정 이었다고 한다.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보다 자기 이익을 챙기는 모습에 혐오감이 들 어 집안을 박차고 나온 이도 있을 정도다.
티파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 다.
단적으로 제이콥의 사망 확인부 터 줄곧 프레더릭과 함께했던 티파 니가 이모들에게서 제일 먼저 들었던 말은 '네 잘난 남편은 어디 있 느냐'는 물음이었다.
안부를 물어보는 듯했지만, 얼마 나 중요한 일을 하기에 티파니 혼 자 보냈느냐는 타박이기도 했다.
프레더릭이 바로 옆에 있었으니 유재원의 부재를 다시금 자극하는 말이기도 했다.
정부의 협조 요청에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티파니 역시 유재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었기에,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제 저녁부터 분위기 가 반전되었다.
뉴욕디지털타임즈의 보도를 시작 으로 유재원이 가 있는 곳이 무려 911 테러 합동 수사본부였고, 거기 에서 유재원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니 말 이다.
그런데도 티파니 이모들의 극성 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슬슬 떠보던 이모들이 격 한 반응으로 폭발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프레더릭의 지시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나보고 회사로 돌 아오라고 하셨어."
회사로 돌아오라?
프레더릭이 티파니의 능력을 높 이 평가하고 있었다는 건 사실이었 다.
티파니가 회사에서 나와 독립했 을 때에도 매우 아까워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제이콥의 장례식이 다 끝 나기도 전에 티파니를 셰브롱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응? T&U 리서치는 어떻게 하 고?"
"내가 동의만 하면 셰브롱이 인 수를 해 주겠다고 하셨어."
역시 프레더릭도 보통은 아니었 다.
T&U 리서치가 규모는 작아도 적어도 천만 달러짜리 회사는 된다.
회사가 가진 자산은 둘째치고, 각종 지질 데이터 분석을 빠르게 처리하고, 유전이 있는 유력한 후보 지역을 찾아내는 알고리즘의 가 치는 대단했으니 말이다.
물론 실제 가치는 이보다 훨씬 더 컸지만, 아직은 가치를 증명하 는 단계였다.
하여튼, 외손녀의 셰브롱 복귀를 위해 천만 달러를 아무렇지도 않게 쓸 수 있는 이는 전 세계를 뒤져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와 이모들, 사촌들 에게도 같은 지시를 내리셨어."
이어진 티파니의 말에 프레더릭 의 의중을 읽을 수 있었다.
후계자 경쟁!
프레더릭의 핏줄이 이어진 이들 을 모두 셰브롱으로 불러들여 다른 후계자를 찾겠다는 선언이었다.
"돌아갈 거야?"
유재원의 물음에 티파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유재원의 손을 잡았고, 어 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돌아간다고 하면…… 응원해 줄 거야?"
티파니가 뜻을 정했다.
프레더릭의 뜻을 따르기로 한 이 유는 여러 가지였다.
그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건 제이콥의 장례식을 처음부터 끝 까지 난장판으로 만드는 이모들의 몫이 컸다.
셰브롱에 대한 끝없는 탐욕은 티 파니가 보기에 너무 거북했다.
그렇다고 그 탐욕을 달성할 능력 이 출중하냐, 거대한 기업을 이끌 어 갈 능력이 있느냐고 하면 그것 도 아니었다.
티파니는 셰브롱에 대한 욕심보 다는 이런 이모들에게 셰브롱이 넘 어가서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에서 결심한 것이었다.
"물론 응원해야지. 아니, 응원 정 도가 아니라 전력으로 도울게."
비록 티파니의 결심은 너무도 나 이브했음에도 그녀의 조력자가 유 재원이었기에 이야기는 완전히 달 라진다.
유재원의 든든한 목소리는 티파 니의 마음에 남았던 일말의 불안감 을 말끔히 날려 버렸다.
911 테러로 수많은 후폭풍이 일 어나고 있는 와중이지만, 그 어떤 사건보다 세상을 급격하게 바꿀 후 폭풍은 유재원과 티파니가 맞잡은 손안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390. 이레귤러
9월 15일 토요일.
앨 고어 대통령의 911 테러 추 모식은 미국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 서 치러졌다.
비행기의 반쪽 파편과 충돌해 무 너졌고, 불타다 말았던 그 흉측한 모습이 그대로 노출된 상태에서 연 방 정부 주도의 거대한 추도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주중에 엄청난 일들을 치러냈던 유재원은 서재에서 추모식을 시청 중이었다.
원래 티파니와 함께 거실의 대형 LCD로 함께 시청할 예정이었는데, 그녀는 갑작스러운 T&U 리서치의 일로 토요일임에도 회사에 출근하 게 되었다.
마음을 정하고, 유재원의 전폭적 인 지지까지 받은 티파니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덕분에 셰브롱의 새로운 후계 구도는 빠르게 윤곽이 잡히고 있었다.
프레더릭의 장녀이자 티파니의 어머니인 마리나 여사님은 거절했 고, 두 이모는 당연히 참가했다.
의외인 것은 두 이모의 아들딸 들, 그러니까 티파니의 사촌 중에 서 단 한 명만 셰브롱에 들어오겠 다고 한 것이다.
제이콥의 장례식장에서 난리를 피울 만큼 극성이었던 이모들과 달 리 그들의 자식들은 확실히 달랐다. 신세대답게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면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프레더릭 역시 싫다는 이들을 억지로 셰브롱에 들일 생각은 없었다. 그로 인해 제이콥의 빈자리를 채울 후계자 레이스는 일단 4파전으로 시작했다.
성과만 따지면 티파니가 제일 우 수하다는 건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
하지만 셰브롱과 같은 거대한 기 업은 성과로만 돌아가지 않았다. 셰브롱에는 제이콥을 따르던 이들 이 상당했고, 두 이모는 제이콥과 의 남다른 친분이 있었다.
덕분에 셰브롱 내의 지지율은 이모들이 1, 2등을 다투고 티파니는 고정 3위였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ID 그룹의 정보팀을 통해 교차 검증한 결과이 니, 사실에 매우 가까운 결과일 것 이다.
"역시 사내 정치가 독은 독이 야."
국가나 회사가 어떤 굴곡이 오더 라도 이겨내고 꾸준히 성장하기 위 해서는 능력이 검증된 이들이 의사 결정권자가 되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정작 조직에 있는 이들에게는 능력과는 별개로 본인들의 대 우를 더 잘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게 좋으니, 무능력한 이들이 의사결정 권자가 되도록 지지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게 된다.
ID 그룹도 이러한 사내 정치가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를 막기 위한 시스템은 착실하게 구동 중이었다.
시스템 통합과 인공 지능이었다.
그룹 전체 조직의 업무 프로세스 를 하나의 시스템 위에서 작동하도 록 하고, 이를 인공 지능과 연결해직원들의 업무를 학습하도록 했다. 학습 단계가 끝나면 인공 지능은 업무 보조를 시작할 것이고, 그러 면 직원들의 성과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누가 실력이 출중한지, 아니면 누가 변변찮은 능력인데 정치력으 로 우수한 평가를 받는지 일목요연 하게 정리된다.
그렇지만 아직은 인공 지능의 판 단을 맹신할 단계는 아니었다.
시간으로만 따지면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만들고 있는 인공 지능이지만, 지금의 수준은 그저 데이터를 가공하는 정도였고, 이러한 데이터를 정보로 추출하는 건 아직 만족스럽지 못했으니 말이 다.
하드웨어적인 문제였기에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었다.
-……또한, 우리 미국은 이슬람 전체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를 일으키지도 않을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테러를 저지른 자들이 바라는 것이 니까요. 오늘날 미국을 만든 위대 한 정신에도 혐오와 차별은 없었습 니다.
유재원의 생각이 잠깐 샛길로 빠 지려고 할 때, 텔레비전 속 앨 고 어 대통령의 큰 소리에 현실로 돌 아올 수 있었다.
역시 앨 고어는 부시와는 달랐 다.
대뜸 테러와의 전쟁이란 말을 꺼 내 들었던 부시와 달리, 테러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미국인들에게 위 로의 말을 전했고, 동시에 테러리 스트가 바라는 것은 바로 증오의 증폭임을 잘 지적해 줬다.
다만, 당장 보복을 원하는 미국 인이 80%가 넘는 상황에서 너무 유화적인 모습이 아니냐 하는 우려 는 있었다.
전체 흐름을 아는 유재원에겐 부 시가 제창한 테러와의 전쟁이 무수 한 삽질 끝에 완전한 실패로 끝난 다는 걸 잘 알지만, 지금은 아니었 으니 말이다.
당연히 앨 고어 대통령도 그러한 여론에 대해 무지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일반 미국 인들보다 더 격하게 강경책을 주장 하는 이들이 펜타곤과 백악관에도 많았다.
앨 고어 대통령 역시 따지고 보 면 강경파였으니 말이다.
유재원이라는 변수만 없었으면 알 카에다가 자리 잡은 아프가니스 탄과 가까운 아라비아해의 오만 앞 바다에 항모 전단을 띄워 놓고 대 대적인 폭격과 함께 대규모 육군병력도 파견했을 것이다.
이러한 백악관의 기류가 바뀐 건 오사마 빈 라덴의 최근 행적을 유 재원이 추적하는 데 성공하고부터 였다.
오사마 빈 라덴 스스로 인터넷에 본인이 911 테러의 배후임을 자백 했다.
그러면 오사마 빈 라덴을 생포해 미국 법정에 세우는 것으로, 국민 의 분노를 크게 잠재울 수 있다.
또한, 제2의 오사마 빈 라덴이 되고자 하는 테러 조직에 미국의 강력한 힘을 인식시켜 줄 수 있다.
이렇게만 되면 어마어마한 전비 가 소모되는 대규모 병력 파병도 줄이면서, 타격을 입은 미국의 자 존심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테러와의 타협도 없습 니다.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 이 911 테러의 주범임을 증명하는 너무도 확실한 증거도 확보했습니 다.
-아프가니스탄은 알 카에다의 모 든 조직원들 그리고 주범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병을 24시간 내에 미국으로 인도하기 바랍니다. 중국에 게도 역시 911 사이버 테러를 저지 른 크래커 범죄 집단의 신속한 신 병 확보와 범죄자 인도를 요구합니 다.
-이 조건에 대해 그 어떠한 타협 은 없을 것이며 테러로 역사를 만 들 수 없다는 것도 확실히 보여 드 리겠습니다.
아쉽게도 앨 고어 대통령의 추모 사는 '뭔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같 이 두루뭉술하게 끝났다.
그러나 어떤 나라도 이를 가볍게 여기진 못했다.
아프가니스탄이야 911 테러를 일 으킨 범인이 알 카에다로 밝혀지고, 오사마 빈 라덴이 인터넷에 직접 등장할 때부터 난리였으니 논외로 한다고 해도, 중국이 911 테러의 반격 타깃에 들어간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개혁 개방 이후 몰락한 러시아를 대신해 공산권 최대 국가로 등극하 고 있는 중국은 떠오르는 해와 같 았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911 테러를
명목으로 무섭게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견제를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시선도 있었다.
물론 미국인들의 시선 대부분이 중국보다는 아프가니스탄에 머물러 있었다.
중국의 경우에는 사이버 911 테 러라는 컴퓨터에 익숙한 네티즌들 이 아니면 쉽게 체감할 수 없는 일 이었고, 시간 제한도 없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경우에는 24시간이라는 제한 시간이 딱 걸렸 으니 말이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