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권 10화
떠들썩했던 극장 안은 시간이 되 자 조명이 어두워지며 검게 물들었 다.
ID 일렉트로닉스 사장과 임원들 의 어색한 표정도 어둠에 녹아들면 서 사라졌다.
곧이어 스크린에 워너브라더스의 로고가 뜨면서 영화가 시작되었다.
극장 안에 자리한 모든 이들의 기대감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기 대감 속에는 불안감도 있었다.
해리포터는 매 시리즈가 나올 때 마다 서점이 폭발하는 최고의 판타지 소설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 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 다.
심지어 TV나 게임, 대중음악에 빠진 어린아이들까지도 자발적으로 책을 손에 쥐게 해 준 막강한 킬러 콘텐츠였다.
이미 누적 판매량은 세계적으로 수천만 권 단위였으니, 전 세계에 탄탄한 팬층이 있는 글이기도 했다.
그런 해리포터의 첫 영화화 작품 이니 잘 만들어지지 않으면 그 파 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모두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영화 가 시작되었다.
152분.
마법사의 돌의 상영 시간이었다.
2시간 반이 넘는 대작으로 자칫 하면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종이책 원작인 마법사의 돌은 상당한 분량을 자랑했고, 그방대한 내용을 한 편의 영화로 만 들기 위해서는 2시간 반이란 시간 도 사실 부족했다.
당연히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과 감한 삭제가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본 이들은 매끄럽 게 이어지는 스토리에 어색하다는 건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감독의 역량이었다.
어마어마한 대작의 첫 번째 영화 화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길 감독을 뽑는 것부터 워너브라더스의 역량 을 시험받는 일이었다.
수많은 감독이 물망에 올랐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리들리 스콧과 같이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감독 들부터 독립영화 감독들까지도 모 두 검토되었다.
더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스티븐 스필버그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 다는 점이다. 그만큼 해리포터가 담고 있는 이야기는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감독들이 물망에 올랐고, 최종 낙점된 사람은 크리 스 콜럼버스였다. 그렘린이란 영화 로 할리우드에 데뷔했고, 나홀로 집에 1, 2로 대박을 터트린 감독이 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리들리 스콧 등등의 감독들 대신 크리스 콜럼버 스가 낙점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가족 영화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해리포터도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무거운 내용이 등장하기 시작하지 만, 가장 첫 편인 마법사의 돌은 어린이들을 위한 내용이었다.
대중에게 호그와트와 마법사의 세계를 처음으로 소개하고 주인공 인 해리가 친구들을 만나 모험과 성장을 하는 이야기였다.
할리우드의 거물 감독들에 비해 커리어가 부족한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이만, 가족 영화만큼은 더 나 았다.
무엇보다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은 본인의 맡은 바 임무를 잘 알고 있었다.
활자로만 접했던 마법 세계를 시 각화하여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보 여주는 영광된 임무라는 사실을 말 이다.
덕분에 크리스 콜럼버스는 작가인 조앤 롤링과 수도 없는 전화 통 화와 미팅을 진행하면서 소통했다. 호그와트의 입학식부터 교복 디자 인까지 조앤 롤링의 검증을 받았다.
결과는 탁월했다.
관객들의 152분이라는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순간 삭제!
스크린에 몰입해서 화장실에 가 는 것까지도 잊을 정도로 몰입할 수 있었다. 그 증거가 바로 유재원 의 뒤에 자리하고 있던 ID 일렉트 로닉스 사장단이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진 못해도 어 느 정도 듣고 읽을 줄 아는 수준의 실력들이었다. 어린이들을 위해 쉬 운 말로 대사가 쓰인 마법사의 돌 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나이는 많아도, 영화를 보 자마자 잠들어 있던 동심이 살아나 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재원과 티파니 역시 마찬가지 였다.
티파니는 재미를, 유재원은 뿌듯 함을 느꼈다.
막대한 제작비 중에 상당 부분을 투자했던 유재원이다. 그러나 유재 원의 지원이 그저 금전적인 부분만 으로 끝나진 않았다.
ID 엔터테인먼트의 컴퓨터 그래 픽 기술도 마법사의 돌에 아낌없이 투입되었다.
회귀 전에 봤던 마법사의 돌도 훌륭했지만, 원작에서 나오는 비현 실적인 상황과 마법을 재현하는 것 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때에도 영화화에 무척이나 공 을 들이긴 했지만, 컴퓨터 그래픽 이라는 건 무지막지하게 돈을 잡아먹는 작업이었기에, 적당한 수준에 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현실과 타협할 필요가 없었다.
물량이면 물량, 퀄리티면 퀄리티.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과 조앤 롤링 작가가 원하는 그 환상의 세계를 그대로 담아낼 수 있었다.
미묘한 이질감은 사라지며 컴퓨 터 그래픽은 화면 속에 완벽히 녹 아들었다. 판타지 영화의 말도 안 되는 장면에서 진짜 같다는 말도 안 되는 감각이 전해질 정도였다.
호그와트 마법 학교도 현실에 있 는 것 같았고, 마법 학교 주변의 공간 역시 진짜 세상 어딘가에 있 을 것 같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리핀이나 트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152분이라는 긴 상영 시 간을 자랑했지만, 끝나자 진한 아 쉬움이 몰려왔을 정도다.
곧이어 당연하다는 듯 기립 박수 가 이어졌다.
프리미어 상영 행사에서 영화 종 료 후의 기립 박수는 불문율처럼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자발 적인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첫 영화화 작품, 마법사의 돌 전격 개봉!
-조앤 롤링, 내 머릿속에 들어가 호그와트와 다이애건 앨리를 꺼내 영화에 넣은 것 같다.
-소설 원작의 설정 붕괴 우려 불 식!
다음 날, 마법사의 돌 영화에 관 한 기사들이 매스컴을 장식했다.
그렇지만 매스컴의 호평이 없더 라도 영화 티켓은 불티나게 팔렸다. 2001년 추수 감사절의 최대 기대작 인 영화였고, 그 기대를 조금도 깎 지 않는 완벽한 영화가 나왔다.
보통 개봉 후 일주일이 최대 피 크를 찍으며 흥행 여부의 중대한 요소가 되지만 이번 마법사의 돌만 큼은 예외였다.
일주일이 지나도 극장을 찾는 이 들의 발길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유재원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지 지 않는 한은 앞으로 연말까지 전 세계 극장가는 해리포터가 꽉 잡고 있을 것이 기정사실이 될 것 같았 다.
해리포터 단체 관람이 있던 다음 날.
유재원의 집은 오랜만에 사람들 로 북적였다. ID 일렉트로닉스의 가전 부문 사장과 임원들이었다.
"어서 오세요."
"어이쿠, 환대에 감사합니다!"
그들을 처음 맞이한 건 티파니였 다.
셰브롱에서 프레더릭을 도우며 후계자 레이스를 하는 중이었지만, 지금은 연말을 맞아 휴식을 즐기는 중이었다.
후계자 경쟁이란 몇 개월 사이에 끝나는 짧은 레이스도 아니었거니 와, 티파니가 맡은 텍사코와의 합병도 잠깐 소강상태에 들었기 때문 이다. 텍사코가 합병에 조금 소극 적으로 된 건 911 테러 이후에 유 가가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 원유 공급 라인 중에서 중동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중동 정세가 불안 해지면 유가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지금의 경우엔 미국이 과거처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고, 공군과 소수의 특수 전 병력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 중이었다.
그렇지만 전장에서의 상황은 빠 르게 바뀌고, 생각지도 못한 변수 도 발생했다.
민간인 폭격이나 아군 오인 폭격 등의 문제가 나오기 시작했고, 알 카에다도 미군의 추적에 대한 대비 태세를 높이면서 멸절 작전의 종료 시간이 기약 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한편 이라크에서의 정세 불안도 심해지고 있었다.
전쟁 패배로 국정 장악력을 잃은 후세인은 보다 강한 철권 통치를 하려고 했고, 이라크 각지에서는 테러 단체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일부 극단주의 테러 단체는 제2 의 알 카에다, 제2의 오사마 빈 라 덴이 되겠다고 설치는 중이다.
미국 일각에서는 이러한 테러 단 체가 이라크가 보유한 대량 살상 무기를 유출해 미국을 겨냥한 대규 모 테러를 저지를 거라는 이야기도 나오는 중이었다.
이러한 루머의 근원지를 찾아 들 어가면 미국의 강경론자들이 있었 다.
군산 복합체의 후원을 받는 정치 인들과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언론 사들이었다.
덕분에 최근에는 강경론자들 사 이에 대규모 병력 파견으로 알 카 에다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이야 기가 대두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앨 고어 대통령의 결심 은 확고했다.
911 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도 생포했고, 알 카에다의 주 력 부대는 완전히 섬멸했으니 전쟁 과 같은 무의미한 일에 미국의 국력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또한, 중동에 몰려 있는 미국의 에너지 수급처를 다양화한다는 방 침도 세웠다. 그중 하나가 셰일 가 스, 셰일 오일 개발이었다.
셰일층을 수평으로 뚫어낼 기술 이 확보되었고, 유가 상승으로 채 산성이 생기면서 미국의 에너지 자 립도를 올릴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 다.
덕분에 텍사코의 주가도 상승했 고, 그에 따라 기존에 진행된 합병 안의 매력도가 떨어지면서 추진력도 같이 내려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합병이 완전히 파기된 건 아니었다.
텍사코도 자신들이 홀로 살아날 수는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고, 프레더릭도 포기할 마음은 없었으 니 말이다.
더욱이 합병에 걸림돌이 된 중동 정세 불안과 유가의 고공 행진도 조만간 안정을 찾을 것이라 보았다.
그렇기에 안정을 찾을 때까지 잠 깐 휴지기를 갖기로 했고, 덕분에 티파니는 오랜만에 유재원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보낸다고 마냥 쉬 는 건 아니었다. 오늘처럼 ID 그룹 의 임직원들이 방문할 때면 안주인 으로 해야 할 역할에도 충실했다.
"회장님은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 세요. 안내해 드릴게요"
티파니가 앞장을 서자 사장과 임 원들은 황송해 마지않으며 뒤를 따 랐다.
인수라는 방법으로 한식구가 된 탓에 한국식 기업 문화에 익숙했다. 특히 사장과 임원들은 일성, 미래, 대호 출신으로 각자 다른 성향의 재벌들을 자주 만났던 사람들이었 다. 그렇기에 티파니가 앞장서는 걸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어서 와요."
결정적으로 이들이 대면한 유재 원은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것도 맨손으로 미국에 건너가 지금의 ID 그룹을 일구어 냈으니,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이들이 들고 온 ID 일렉트로닉스의 가전 부문 성적표는 ID 그룹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 울 만큼 형편없는 것이기에 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러니까 5,432억 원 적자라는 말씀이시군요."
유재원의 요약에 가전 부문 사장 과 임원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적자!
그러니까 기업의 존재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영리 활동, 즉 돈을 버는 일인데 ID 일렉트로닉스 가전 부문은 손해만 봤다는 이야기였으 니 말이다.
"그래도 반도체 부문에서 이득을 본 걸로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긴 하네요."
이어진 유재원의 위로는 사장과 임원들에게 효과가 전혀 없었다.
반도체 부문의 빛나는 성과와 더 욱 대비되는 탓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도 반도체
부문의 성과는 대단했다.
아직 2001년이 한 달 남긴 했지 만, 순이익은 조 단위를 훌쩍 넘었 다.
모바일 분야의 폭발적인 성장 덕 이었다.
AP와 낸드 플래시 메모리, CCD 카메라 모듈, 각종 원칩 센서들의 판매 호조 덕이었다.
전통의 먹거리였던 메모리 반도 체는 침체 중이지만, 120나노 공정 이 적용되면서 생산성이 높아져서 다른 메모리 반도체 회사들에 비해상황은 나았다.
더욱이 내년에는 신형 CPU와 짝 을 맞출 차세대 램이 출시된다.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만큼 죽을 쑤고 있던 메모리 반도체도 활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했다.
참고로 인텔은 유재원의 경고에 도 램버스 D램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내년도 출시될 펜티엄4의 보급형 모델부터 고급형까지 모두 램버스 D램을 기본으로 채택하기로 했단 다.
유재원은 당연히 DDR 램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기억의 저장소에 담겨 있는 기술 의 크기가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과거에 빠르게 단종된 램버스 D 램은 XDR을 끝으로 신기술이 이 어지지 못했다.
반면 DDR 램은 DDR 7까지 신 제품을 내놓으면서 수십 년의 역사 를 쌓았다.
이미 한 번 다녀와 본 길을 다시 가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기에, 유재원은 ID 일렉트로닉스의 차기 메모리 규격을 DDR 램 하나로 확 정했다.
하여튼 반도체 사업부의 전망은 매우 밝다는 이야기다.
반면 가전 부문은 도무지 탈출구 가 보이지 않았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