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610화 (610/1,007)

29권 19화

암호 해제를 위해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고, 암호가 풀리자 안드로이 드 스마트폰의 화면 가득히 글자들 이 떠올랐다.

"응?"

문서를 한참 보던 유재원이 이상 한 소리를 냈다. 문서에 담긴 내용 이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달랐던 탓 이다.

명색이 대한민국 기업 서열 3위 (1위는 ID, 2위는 미래)에 있는 일 성이니 그 격에 맞는 대단히 막장 스러운 이야기가 담겨 있을 줄 알았다.

재벌들의 집안 사정 복잡하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말 이다. 미래 그룹만 봐도 무척이나 복잡한 가계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최재영 부부의 별거도 무척이나 자극적인 이야기가 깔려 있을 줄 알았는데, 문서 안에는 딱 히 관련된 내용이 없었다.

"경제적 문제라니."

문서에는 최재영 부부가 깨지게 된 근본 원인이 IMF와 일성전자 매각 때문이라고 적시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IMF의 여 파를 재벌이라고 피해갈 수 없었다. 일성도 단기 외채를 갚기 위해서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거기에 유재원은 일성전자 회사 채권, 그것도 달러화로 발행된 걸 한 번에 풀어 부도 위기에 내몰리 게 했다.

그때, 최재영도 돈을 구하기 위 해서 열심이었는데, 너무도 어려워 서 장인 집안인 대성그룹에도 도움 을 청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처가에 사정하고서 돈을 좀 융통할 수 있었는데 그 액수가 기대만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런데 돈이 없다던 대성은 IMF로 각종 부동산이 헐값에 나오자 싼값 에 사들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일성그룹에서 급히 내놓 은 매물도 대성에서 헐값에 집어 간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정략결혼이지만 사이는 제법 괜찮았던 최재영 부부의 사이 가 급격히 나빠졌다고 한다.

급기야 각방을 쓰게 되었고, 이 제는 별거가 공식화된 것이다. 정보팀은 재산 분할에 관한 합의가 되면 바로 이혼이 이뤄질 것이라고 확실히 적었다.

"음! 막장이긴 한데, 매운맛은 아 니네."

파일을 모두 확인한 유재원은 입 맛을 다셨다.

21세기 초중반부터 유행하게 될 막장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재벌집 이었다. 그만큼 막장의 정도는 많 이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심했다 는 이야기다.

대한일보 사주 집안만 해도 엄청났다. 탈세를 비롯한 각종 경제 범 죄에 스폰서, 불륜에 심지어 마약 까지.

얼마나 지저분했으면, 대한일보 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폐간을 선 언했을 때,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언론 탄압이라는 말보다 인과웅보 라는 말이 더 나왔을 정도다.

이에 비하면 최재영은 매운맛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내가 갈라 서게 만들긴 했구만."

일성전자 회사 채권을 터트릴 때만 해도 그게 최재영의 별거까지 이어질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렇게 본다면 둘이 파경을 맞이 하게 된 원인은 유재원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복수를 했다고 볼 수 도 있다.

다만 최재영의 셋째라는 존재 자 체를 삭제해 버린 것 같아서 뭔가 께름칙했다.

어차피 파멸이 예정된 녀석이긴 했지만, 태어나지 못하는 건 이야 기가 많이 다른 문제였으니 말이다.

-자기야! 밥 먹자!

"그래, 밥이나 먹자."

때마침 띵 소리와 함께 티파니의 ID 톡이 왔다. 찝찝한 감정은 바로 털어 버리고 유재원은 자리에서 일 어났다.

다음 날.

설 연휴가 끝났다. 아침 일찍 유 재원 부부는 부모님과 큰아버지, 친척들의 배웅을 받으며 서울로 올라갔다.

아쉽게도(?) 정보팀의 급박한 대 북 정보 보고와 달리 설 연휴가 끝 날 때까지 북한의 이상 행동은 없 었다.

사실 이건 당연한 것이었다. 전 격적인 방문이었지만, 이것을 계기 로 구체적인 행동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재원은 미국의 대통령 이 SNS에 글 하나 올려서 정상 회 담이 성사되는 것도 보았고, 버튼 하나로 미사일이 떨어지는 것도 보았던 시대에서 거슬러 온 사람이었 다.

시간의 체감 속도가 이 시대 사 람과 너무도 다르다는 게 이번 일 로 다시 상기되었다.

하여튼 적어도 경수로 가동 전까 지는 국지 도발 같은 행위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 었다.

당장 움직임이 없다더라도 중국 과 북한의 거물들이 움직인 만큼, 아무 일 없이 끝날 사안은 절대 아 니었으니 말이다.

2월 14일.

"자, 이거 받아."

아침밥도 든든히 먹은 유재원이 출근길에 오르려는데 티파니가 뭔 가를 내밀었다.

잘 포장된 초콜릿이었다. 어쩐지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 달달한 향 기가 나더라니.

무슨 일인가 싶어 날짜를 헤아려보니 오늘이 밸런타인데이였다.

"고마워. 그런데 나는 준비 못 했는데……

메시지 카드가 껴 있는 초콜릿을 기쁘게 받으면서도 유재원은 미안 해졌다. 그런데 그 모습에 티파니 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여자가 남자에게 주는 날 아니야?"

그런가?

그래도 유재원은 퇴근 후에 티파 니를 위해 선물을 준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덕분에 명절 후 첫 출근이라는 무거운 발걸음을 쉽게 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럼, 다녀올게."

"응! 이따가 봐."

가벼운 키스로 아쉬움을 달랜 후, 유재원은 거실에서 나와 엘리 베이터에 올랐다.

둘의 모습만 보면 출근길이 상당 히 긴 것처럼 보이지만, 집 안에서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면 끝이었다.

둘이서 지내는 서울 집이란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의 펜트하우스 였으니 말이다. 바로 밑으로는 본 사 근무 직원들의 사무실이 있었고, 1년에 서너 번 올까 말까 하는 유 재원이지만, 회장실도 그럴듯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펜트하우스로부터 회장실까지 출 근하는 동선은 그야말로 짧고 간단 했다.

덕분에 밸런타인데이였지만, 손 에 들린 초콜릿은 티파니가 준 것 하나뿐이었다. 중간에 다른 직원들을 만날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중간에 보안 담당이나 비 서실 직원을 만났지만 다들 듬직한 남자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회사 성비가 공대 이상이라고 하던데."

초콜릿으로부터 뜬금없이 성비까 지 생각이 이어지는 유재원이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런 데 ID 그룹 입사에 필수적인 전공 들은 전기?전자 공학이나 컴퓨터 공학, 프로그래밍과 같은 학문이었 다. 애초에 학과부터 심한 성비 편중이 있었고, 그게 그대로 회사까 지 이어진 것이었다.

한국만 그러는 게 아니라 미국에 자리한 자회사들 역시 마찬가지였 다. 일반 행정 부서, 혹은 패키지 공장과 같은 특수한 부서 정도만 다른 회사들과 비슷한 성비를 유지 했다.

이러한 편중된 성비 때문에 인터 넷에서는 ID 그룹을 부르는 많은 별명 중에 ID 공대라는 말이 제일 큰 지지를 받고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성별만으로 가산점을 줄 수는 없는데."

오직 실무 능력 하나만 보는 게 ID 그룹의 입사 시험이었다.

ID 그룹이 무수한 경쟁 속에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유재원 의 비전도 비전이지만 이를 뒷받침 해 주는 직원들의 우수한 업무, 개 발 능력 덕임이 분명했다.

어쩌다 보니 밸런타인데이와 관 련된 생각이 기업의 성비 문제로까 지 이어졌지만, 유재원은 지금의 방식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신 사내 커플이 결혼에 성공한 다면 그야말로 희박한 확률을 통과 한 것이니 잘 챙겨줘야겠다고 마음 을 먹었다. 휴가라든가 초저리 대 출금이라든가 여러 가지 방법들도 바로 떠올랐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짧은 출근길의 끝에 도착한 회장 실에는 최강욱 부회장이 먼저 나와 대기해 있었다.

"설날 잘 보내셨나요?"

"네. 회장님 덕분에 푹 쉬었습니 다."

3일 만에 다시 본 최강욱 부회장 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이제는 40대 초반이지만, 여전히 청년처럼 활기가 넘쳤다. 더욱이 나이를 먹으면서 완숙함까지 더해 지니 옛날 처음 봤을 때의 뭔가 어 설픈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긴, 최강욱에게 주어진 임무는 ID 그룹의 동아시아 지역 관리와 함께 백호 펀드의 최고 경영자까지 있었으니, 법조인이 아닌 전문 경 영인으로 충분히 다시 태어날 시간 은 충분했다.

"회사 상황은 어때요?"

"ID 일렉트로닉스 가전 부문이 걱정이었는데, 회장님께서 방향을 잘 잡아 주셔서 이제는 괜찮아졌습 니다. 그럼 바로 보고를 시작할까 요?"

쿵!

최강욱은 가볍게 답하면서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 뭉치를 내려 놨다.

"설마, 이게 다 살생부는 아니 죠?"

"물론 그렇습니다만, 분량을 따 지면 제일 많긴 합니다."

"흠, 그러면 무거운 살생부는 마 지막에 보고 일단 좋은 소식부터 들어볼까요?"

"예, 회장님. 그럼 ID 일렉트로 닉스부터 보고하겠습니다."

ID 일렉트로닉스의 상태에 대해 보고했다.

작년 유재원을 만나고 온 가전 부문 사장과 임원들은 이후, ID 일 렉트로닉스 가전 부문을 완전히 개 편했다.

유재원이 클라우드 서버로 넘겨 준 각종 가전제품의 설계도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고, 양산을 위한 채 비도 갖추는 중이었다.

실험실에서 달랑 하나 만드는 것 과 매달 수백만 대를 만드는 건 차 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나마 ID 하이테크의 엔지니어들은 양산을 대비해서 내부 부품에 수제부품 사용을 절제하고 한국산 을 최대한 많이 사용했기에 큰 무 리는 없었다.

또한, 보르도와 클라세라는 브랜 드 런칭 준비를 위해 글로벌 CF를 준비 중이었다.

이와 함께 역량 강화를 위해서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가전 부문 을 TV?모니터 사업부, 백색 가전 사업부, C/S 센터로 세분화했다.

진돌이와 로봇 청소기도 내부에 서 반응이 좋았다.

두 제품 모두 아쉽게도 세계 최 초라는 타이틀은 얻을 수 없었다. 강아지 로봇은 소니가, 로봇 청소 기는 스웨덴 가전 회사 일렉트로룩 스에서 트릴로바이트라는 제품을 출시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두 제품 모두 애매한 성 능으로 소비자들의 기대에 부응하 진 못했다. 소니의 강아지 로봇은 내구성과 AI의 성능이 치명적이었 다. 일렉트로룩스의 트릴로바이트 역시 가장 중요한 기동성과 청소 성능이 문제로 지적 받았다.

반면 진돌이와 로봇 청소기는 이 러한 단점이 현재의 기술로 최대한 보완된 상태였다.

진돌이에게 탑재된 MAP3 프로 세서와 커스텀 된 안드로이드 모바 일 운영 체제, 그리고 각종 센서와 결합된 인공 지능 프로그램의 힘은 대단했다. 사람의 음성과 연동된 최대 100가지의 명령어를 기억할 수 있었다.

심지어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 개 집처럼 만들어진 독(Dock)으로 돌 아가 스스로 충전도 했다. 여기에 안드로이드폰과 연동되어 집 안의 상황을 언제든 체크해 볼 수도 있 으니, 효용은 기존의 강아지 로봇 과 비교할 수도 없다.

다만 너무나도 비싼 가격이 문제 다.

"생산 단가가 500만 원이요?"

"저도 너무 비싼 거 같아서 직접 문의해 봤습니다만, 이것도 줄이고 줄인 거라고 합니다."

양산을 위해 최대한 저렴하게 만 들어도 대당 가격이 거의 500만 원 에 육박한단다. 대중화는 포기하고, ID 일렉트로닉스의 기술 과시를 위 한 제품이 될 것 같다.

반면 로봇 청소기는 80만 원이라 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이 나왔 다. 덕분에 대중화의 가능성을 진 돌이보다는 높이 칠 수 있었다.

다만 한국에서는 아니다.

현재 대졸 신입 사원의 평균 월 급은 140만 원으로 80만 원이란 가격은 무척이나 비쌌으니 말이다.

"반도체 부문은 언제 봐도 든든 하네요."

이제 몇 달만 있으면 안드로이드 폰이 시장에 나온 지 1년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안드 로이드폰의 성능을 능가하는 스마 트폰은 나오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120나노 공정으 로 만들어진 MAP3의 성능은 아직 도 최고였기 때문이다.

또한, 120나노 공정으로 전환된 메모리 반도체는 DDR이라는 차세 대 기술이 결합되어 세대 교체를 예고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120나노 공정의

CPU와 GPU들이 출격 준비가 끝 나가는 상황이다.

인텔과 AMD가 120나노 공정이 적용된 신제품을 출시하는 날은 3 월 1일이니 그다지 멀지도 않았다.

120나노 공정 덕에 두 부품의 성능이 확 올라갔다.

특히 게임 성능 향상은 발군이었 는데, 과거에는 720P HD 해상도도 버거웠던 것이 이제는 1080P 풀 HD 해상도도 넘볼 수 있는 정도가 된 것이다.

물론 1080P를 제대로 지원하는

디스플레이 장치가 아직은 몇 없는 상황이지만, 이는 조만간 해결될 일이었다.

ID 디스플레이에서는 720P 해상 도의 패널을 일찌감치 양산 중이었 고, 고급형 모델로 1080P도 소량 생산 중이긴 했으니 말이다.

전 세계적으로 컴퓨터 교체가 이 뤄질 것이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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