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권 24화
2002년 3월 2일.
북한 함경남도 신포시 금호지구 에서 커다란 행사가 어제 1일에 있 었다.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 보통은 케도(KEDO)라 하는 한미일 삼국이 모여 결성된 국제 컨소시엄의 경수 로 사업이 성공리에 마무리되면서 광명 1호기라 명명된 l,000MW급 경수로가 정식 가동을 시작했다.
광명 1호기가 정식 가동되자 신 포시 일대는 불야성이 되었고, 평 양 역시 마찬가지였다.
함께 건설 중이던 동일 출력의 2 호기까지 가동을 시작되면, 당분간 북한에서는 전기가 모자란다는 소 리는 들려오지 않을 만큼 막강한 출력을 자랑했다.
남북화합, 세계평화, 비핵화 등등 역사적 의미가 가득한 KEDO 사업 이었기에, 완공식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이들의 면면도 대단히 화려했 다.
북한에선 당연히 최고 지도자이 자 국방위원장인 김정일을 비롯한 노동당 수뇌부가 총출동했고, 대한 민국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에서는 조 리버만 부통령과 국무부 장관이, 일본에서는 고이즈미 총리 가 국빈으로 방문했다.
행사 당일의 분위기는 너무도 좋 았다. 조만간 통일이라도 될 것 같 은 기분을 한반도에 사는 이들 모 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데 바로 다음 날인 오늘, 그러한 기대가 산산조각났다.
평양으로 돌아온 김정일 국방위 원장이 긴급 성명을 발표했기 때문 이다.
-광명 1호의 가동으로 공화국 발전을 가로막던 에너지 문제를 해 결하며 역사적 과업을 완수한 지금 이 방심하는 순간입니다. 결코, 방 심치 말고 강성 대국을 향한 기치 를 더욱 조여야 할 때이며, 이를 위한 두 번째 역사적 과업인 광명 성 계획을 발표합니다.
시네마 디스플레이 모니터에 가 득 찬 자신감 넘치는 김정일 위원 장의 모습에 유재원은 고개를 저으 며 혀까지 찼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광명성이란 김정일의 자칭 별명 이었고, 동시에 위성 발사체에 부 여된 이름이기도 했다.
물론 말이 위성이지 실체는 탄도 미사일이었다.
즉, 북한은 우주 개발 계획의 탈 을 쓴 미사일 개발 프로젝트를 시 작하겠다고 당당히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혹시나 했는데, 최악의 선택만 골라 하는 김정일 위원장다운 선택 이었다.
유재원의 머릿속이 맹렬히 회전 했다.
중국, 북한 그리고 뉴스콥의 머 독처럼 무모한 도전을 해 오는 이 들에게, 어떤 식의 응징을 내려야 정신을 바짝 차릴 것인가 하며 따 져 보니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날 저녁.
"어머니, 저 미국인이 되어야 할것 같아요."
행동력이 빠른 유재원은 집에 전 화를 걸었다. 미국에 잘 도착했다 는 말과 함께 미국인이 될지도 모 른다는 폭탄 선언이 전해졌다.
-그래? 우리 아들이 뭘 하든 엄 마는 무조건 응원해 줄게.
놀랍게도 유재원의 어머니인 김 말숙은 한국 국적 포기라는 충격적 인 소식에도 덤덤한 말투였다.
" 진짜요?"
오히려 유재원이 의외라 생각해되물어 볼 정도였다.
-그럼! 우리 아들이 심사숙고해 내린 결정이니 엄마는 무조건 지지 할 생각이란다.
그도 그럴 것이 80년대 말에 집 에 286 컴퓨터를 무리해서 들여놓 은 다음 유재원은 몰라볼 정도로 의젓해졌다.
그리곤 상상도 못 할 일을 하루 도 빼놓지 않고 터트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국과 미국에서 거대한 기 업까지 세웠다.
이러한 변화를 부모가 되는 김말숙은 누구보다 깊게 체감할 수 있 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김말숙은 유재원의 행 보를 정확히 모니터링 중이었다.
유재원 관련 사안은 그녀가 몸담 은 ID 인베스트먼트의 비서실에서 착착 스크랩해 매일같이 전해주고 있었다. 덕분에 최근 유재원이 추 진하던 NBC라는 방송국 인수에 브레이크가 걸렸다는 소식도 예외 는 아니었다.
신문에서는 유재원의 국적이 문 제의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신문 분석 기사를 사전에 읽지 못하고서 유재원의 전 화를 받았다 하더라도 전적으로 응 원해 줬을 분이었다.
-아빠도 무조건 지지해 주신대.
아버지 유봉만 역시 마찬가지였 다.
"고마워요. 그런데 이 소식이 언 론에 알려지면 무척이나 시끄러워 질 게 분명해요. 당분간은 기자나 방송국 사람 만나지 마시고, 외출도 최대한 줄이셔야 할 거예요."
-문제없다. 기자들 유난스러운 거 하루 이틀 일도 아니야.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우리 아들이 뭐 하나 할 때마다 난리도 아니었 단다.
유재원의 부모님이 아들의 성공 후에 호사만 누린 건 절대 아니었 다.
아들이 한국과 미국에서 대박이 나 크나큰 사건을 터트릴 때마다 국내 언론들은 난리였으니 말이다.
최근에도 그랬다.
바로 대한일보 파산 사건 때다. 매스컴의 제왕, 혹은 밤의 대통령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대한일 보 사주 일가는 유재원에게 찍히고 난 다음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그 누구도 대한일보가 폐간까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서 울 땅에 큼지막하니 박혀 있는 대 한일보 사주의 사택이 불도저에 밀 릴 거라고는 더더욱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신문사 종사자들에겐 정권 교체 혹은 종전 선언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연히 취재 열기는 말도 못 할 정도였는데, 그 여파가 부모님께도 미쳤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재원의 부 모님은 아들이 걱정할까 봐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계셨던 것이다. 뭐, 이번엔 정도가 좀 강하긴 했는데,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들의 한국 국적 포기 역시 비 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미국이라는 세계의 가장 부강한 나라에서 큰일을 하려면, 국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걸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받아들였다.
그렇게 부모님과의 통화를 마친 유재원은 마음으로 소통하는 다른 지인 분들에게도 연락을 했고, 모 두가 유재원의 입장을 이해해 줬다.
"이제 마지막인가?"
마지막으로 유재원의 전화를 받 은 사람은 ID 그룹의 커뮤니케이션 총괄이사인 김광일이었다.
-이번 건 상당히 큰 파문이 일겠 습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크다는 이야기부터 먼저 나왔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회장님의 숭고한 의지와 희생을 왜곡되지 않 도록 하겠습니다.
제 욕심 때문에 하는 일인데, 숭 고한 의지와 희생이라니.
하지만 옛사람인 김광일은 회사 의 성장과 국익을 위해서 기꺼이 국적도 내려놓는다고 이해해 버린 것이다.
김광일 이사의 사고방식을 바꿔 야 하는 일도 아니었고, 그의 사고 관도 존중하는 유재원이었기에 부차적인 부연 설명을 더 하진 않았 다.
"잘 부탁해요."
-물론입니다, 회장님! 바로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그리고 김광일의 장담 그대로 한 국에서는 난리가 났다.
-5,000억 달러 금자탑, 이제는 태극기 달지 못한다!
김광일과 통화를 마친 지, 만으 로 하루가 지났을 때. 사라진 대한 일보를 대신해 한국 1등 신문 자리 에 오른 동하일보의 조간 1면 머리 기사다.
보통은 1면 하단에 광고가 걸리 지만, 이날 만큼은 예외였다. 1면 전체를 할애해 특집 기사를 실었다.
당연히 유재원의 기사였다.
5,000억 달러 금자탑이라는 게 ID 그룹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여러 개의 계열사 중에 현재는 안드로이드사와 타임워너 넥스트컴 이렇게 달랑 2개만 상장된 상태라 서 ID 그룹 전체의 시가 총액은 유 재원도 모른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에서는 비상장 된 계열사들의 가치를 어느 정도 계산해 ID 그룹의 규모를 추산했 고, 그게 5,000억 달러였다.
현 주가로 안드로이드사가 1,200 억 달러. 타임워너 넥스트컴이 1,500억 달러였고, 나머지 비상장 계열사를 모두 2,700억 달러의 가치로 평가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불과 5년 전, IMF의 단초가 된 초단기 차입금이 100억 달러 정도 였으니 말이다.
더욱이 이 액수가 과대평가된 것 도 아니다.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60%를 점유하고 있고, 각종 전자 기기와 ID 오피스 같은 킬러 소프 트웨어, 그리고 고부가 가치의 특 허를 가지고 있는 ID 테크놀로지만 해도 상장 시 주가 총액이 1,000억 달러는 쉽게 넘을 거라고 보는 월스트리트맨이 많았으니 말이다.
ID 인베스트먼트는 보유하고 있 는 자산만 해도 수백억 달러에 이 른다. 이 중에 고객들의 투자금이 반 이상이지만, 금과 석유 선물을 비롯해 신일본투자은행 등등의 현 금성이 좋은 우량 자산도 엄청났다.
일렉트로닉스와 디스플레이, 하 이테크 연구소 등등의 계열사 역시 각 분야에서 세계 1등으로 상당한 가치였다.
당연히 ID 그룹은 대한민국 최대 의 기업 집단이었고, 세계 전체를 보더라도 ID 그룹보다 가치가 높은 기업을 찾기 힘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자원을 독점적으로 보유한 아람코나 엑슨 모빌 정도나 되어야 비벼 볼 수 있 을 정도다.
그야말로 ID 그룹은 한국이라는 개천에서 용이 나온 격이었고, 한 국 사람들 모두가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다른 재벌들처럼 온갖 지저분한 일에 가담하고, 정경유착으로 성장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능력 하나로 성장했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게다가 ID 그룹은 대기업에 오른 이후에도 혁신은 멈추지 않았고, 성장하며 얻은 과실을 직원들과 나 누기도 잘했다.
ID 그룹에 속한 직원이 아니더라 도 ID 파운데이션이라는 세계구급 사회적 활동 재단의 혜택을 입을 수 있었다.
대학생은 장학금으로, 취약 계층 은 계절마다 전해지는 기부 용품 등으로 체감을 했다.
당연하게도 동하일보의 머리기사는 신문을 보며 일상을 시작하려는 한국 사람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선 사했다.
1면을 정독한 독자의 머릿속에는 당연히 왜라는 의문이 피어났다.
동하일보 역시 지면을 만들 때부 터 예상했던 바였고, 그 연유에 대 해선 2면에 아주 상세히 실려 있었 다.
-연방 통신 위원회, 타임워너 넥 스트컴의 NBC 인수 승인 요청에 유보 결정.
-연방 통신 위원회의 일부 위원유재원 회장의 국적 문제 거론.
-유재원 회장, NBC 인수 작업 계속 추진!
비로소 퍼즐 조각을 맞출 수 있 었던 사람들은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문화 방송도 아니고 무려 미국의 공중파 채널인 NBC의 인수였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비즈니스인 데, 국적이 문제라니.
이미 유재원의 마음이 확고하다 는 게 알려진 이상, 막을 수도 없 다. 억지로라도 막고 싶다고 해도 NBC 이상의 뭔가를 대가로 준비 해야 할 텐데 이제 막 IMF를 벗어 난 한국에서는 딱히 뭔가가 없었다.
그렇게 동하일보를 본 이들의 가 슴이 답답해졌다. 덕분에 신문 정 중앙을 펼치면 양면으로 된 전면 광고가 특이하다는 걸 눈치챈 이들 은 극소수였다.
ID 일렉트로닉스의 신제품 TV 광고였다.
하이엔드 모델인 보르도 FHD TV 42인치 모델의 전면 사진이 신 문 전지에 압박적으로 박혀 있는 사진이었다.
2002 월드컵 개막은 6월 말이었 고, 그때를 대비해 만든 제품이니 지금부터 열심히 판촉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최상급은 42인치였고, 중급형은 37인치, 보급형은 32인치로 각 단 계마다 5인치씩 차등을 두었다.
가격은 42인치가 490만 원, 중급 형은 200만 원대, 보급형은 80만 원대으로 기존의 720P 해상도의 작 년 모델보다는 상당히 비쌌다.
하지만 42인치 크기의 LCD TV
는 전 세계에서 오직 ID 일렉트로 닉스에서만 생산하는 만큼 최상급 을 지향했고, 하위 라인업 역시나 기존의 TV와는 다르게 고급형으로 포지셔닝을 했다.
ID 그룹의 광고는 보르도 TV뿐 만이 아니었다.
마지막 장 역시 전면 광고가 박 혀 있었는데, 양문형 냉장고다. 제 품의 이름은 클라세 냉장고 홈허브 치프에디션이 었다.
990리터라는 압박적인 용량도 대 단했고, 가정용 백색 가전에는 볼수 없었던 금속제 케이스와 고급스 러운 헤어 무늬가 들어간 제품이었 다. 여기에 홈허브라는 뜻이 추가 된 건 보르도 TV 발매로 구형이 된 30인치 LCD 패널에 터치스크 린 센서를 결합한 디스플레이 장치 옵션 덕이었다.
옛날과 달리 각자의 생활이 바빠 부족해지는 게 가족들 사이의 소통 이었다. 냉장고는 최소 한 번은 들 르는 자리였기에, LCD 스크린을 통해 가족들에게 메모나 정보를 전 해 줄 수 있었다. 일종의 가족용 게시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무선 인터넷을 통해 안드 로이드폰으로 원격으로 접속도 가 능하고, 인터넷으로 각종 레시피를 띄워 놓거나 비디오를 재생할 수도 있다.
장식용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 지만, 잘 쓰면 좋은 것이고, 기존의 제품과도 확실히 차별화될 수 있는 냉장고 제품의 플래그십 모델이다.
딱 봐도 비싸 보였고, 광고 하단 에 실린 가격 역시나 비쌌다. 하지 만 집안에 금전적 여유가 있고 냉 장고를 바꿔야 할 이들에겐 너무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모델이었다.
이처럼 ID 그룹의 특집 기사가 가득한 신문에 ID 그룹의 신제품 TV와 냉장고 광고가 실린 모습을 보고 인위적인 움직임이 있었다는 걸 눈치챈 사람도 소수 있었고, 당 연히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유재원의 국적 문제에 대해선 현실적인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ID 그룹은 한 국의 국민 기업이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