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권 6화
비슷한 시각.
"칫, 간단히 끝날 줄 알았는데."
유재원도 본인의 일터인 서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투덜거리 는 중이었다.
한 달간 펼쳐질 월드컵에 유재원 은 한국팀 경기는 물론 주요 경기 도 웬만하면 직관을 할 작정이었다. 티켓이야 일찌감치 확보한 덕에 아 무런 문제는 없었다.
개막식이 열리는 능라도 5월 1일 경기장 방문을 시작으로 한 달은 한국에 있을 계획이었다.
아쉬운 게 있다면 딱 하나.
이번 한국행 모두를 티파니와 함 께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셰브롱과 텍사코의 합병이 초읽 기에 들어간 탓이다. 유럽에서는 테러가 펑펑 터져도, 중동의 정세 는 안정화되면서 유가의 상승도 잠 깐 주춤해졌다. 그렇다고 하락세로 반전된 것은 아니다.
덕분에 텍사코는 아직도 높은 값 을 부르고 있었지만, 셰브롱의 계 산법이 달라졌다.
아마존과 에콰도르에서 텍사코가 유전 개발을 핑계로 벌인 광범위한 오염 행위가 밝혀진 것이다. 작년 실사 때에는 해당 유전들이 값어치 높은 자산으로 평가되었지만, 지금 은 정화 작업에 투입되어야 할 비 용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면서 골 칫덩이로 180도 변해 버렸다.
당연히 텍사코사 전체 가격에도 영향이 있었고, 이는 텍사코의 프 리미엄이 폭락하는 소리와 같았다.
더욱이 텍사코사에 인수 의향을 보내는 다른 석유 회사들도 없는 처지인지라 셰브롱 측이 원하는 가격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을 주관한 사람이 바로 티 파니 였다.
당연하게도 텍사코의 에콰도르 밀림 오염 문제에 대한 정보는 유 재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를 M&A의 지렛대 로 활용하는 건 전적으로 티파니의 역할이 지대했다. 게다가 이렇게 절약한 인수 대금을 오염된 밀림의 정화 작업에 투입하기로 했다.
셰브롱과 프레더릭에게는 예상 외의 지출이 생겼지만, 그래도 몇달 전보다는 훨씬 저렴한 가격에 텍사코를 손에 넣었다.
다만 인수 작업이 완료된 건 아 니고, 최종계약서에 프레더릭이 사 인하는 순간 티파니가 바로 옆에 있어야 했기에, 한국행에는 함께 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그렇게 나쁘 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유재원에게 결혼 후 처음 생기는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 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세 계의 축제 2002 월드컵 한복판에서자유를 얻었다!
여러 사건들이 얽혀 만들어진 이 기회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선 절대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나중에 할 일도 미리 끝내 버리는 것!
그렇기에 유재원은 며칠 전부터 일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일하는 중 이었는데, 문제는 생각처럼 쉽게 끝이 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회사에서 나만 일하는 것도 아 닌데, 왜 일이 줄지 않는 거지?"
이유를 찾아보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ID 테크놀로지의 상장도 있고, 브랜드 전략을 완전히 갈아엎은 ID 일렉트로닉스의 보고서들도 잔뜩 쌓였다. 다른 계열사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IT 기업인 만큼 시장 동 향도 면밀히 살펴야 하는데, 마치 짠 것처럼 문제의 신상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여기에 ID 그룹 최대의 신제품 발표 행사인 IDDC도 2개월 뒤로 다가왔다. 특히 이번 IDDC는 역대최대 규모로 예정되어 있는데, 행 사 일정도 3일이 아닌 5일로 연장 되었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유재원은 미국 땅을 벗어나기 전까지 죽어라 일할 팔자 였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 해, 비행기가 준비되는 동안 VIP 라운지의 자리에 앉자 유재원은 기 억 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옛날의 카피라이트 하나가 떠올랐다.
출발하기 직전까지 컴퓨터 앞에 매달려 있던 유재원에게 이만큼 와 닿는 말도 없었다.
911 테러의 여파로 늦춰진 프로 젝트들이 IDDC 2002를 위해 한 번에 쏟아져 나오니 몸이 하나로는 부족한 사태에 이르렀다. 비단 유 재원의 ID 그룹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회사들도 비슷하다 보니 5월 말부터 신제품이란 타이틀을 단 물건들이 시장에 쏟아졌다.
물론 경쟁사들이 아무리 칼을 갈 고 신제품을 내놓았다 한들, ID 그 룹만큼 압도적인 물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출시된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 안드로이드폰을 아직 따라잡는 스마트폰은 애플의 아이 폰 시리즈 정도였다.
하드웨어는 여기저기 부품을 공 급받아 완성했다고 해도 모바일 운 영 체제에서 문제가 생겼던 탓이다.
이번 IDDC 2002에서는 기존 안
드로이드폰을 뛰어넘는 혁신적 신 제품을 준비했으니 격차는 더 벌어 질 것이다.
하여튼 ID 그룹 자체적으로 준비 되고 있는 것들은 몇 가지 아이템 빼고는 완벽했다.
그렇기에 공항에 도착하기 직전 까지 유재원의 신경을 거스르는 건 타 회사의 소프트웨어 제품이었다.
바로 플래시라는 타이틀이다.
그냥 이름만 들으면 무슨 영화나 게임 제목 같지만, 이 녀석의 정체 는 인터넷 플러그인으로 동영상이나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웹 상에 서 제공하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최초의 개발은 퓨처웨이브라는 6 인조 벤처 기업이 발표한 것인데, 이를 매크로미디어가 인수해서 저 번 달 말에 출시했다.
개념만 딱 들어 보면 무척이나 유용한 플러그인처럼 들린다. 하지 만 유재원이 문제의 소프트웨어라 고 말한 건 플래시가 완벽한 비표 준 플러그인이라는 점이다.
다이내믹한 디자인, 인코딩 없이 동영상 스트리밍을 서비스한다든가, 벡터 애니메이션을 재생하는 등에 서는 쓸모가 있었다.
대신 보안성이 막장에 가까운 수 준이고, 컴퓨터의 리소스도 대대적 으로 퍼먹는다.
특히 모바일 환경에는 극약이었 다. 플래시 플러그인 구동에 필요 한 연산량도 많았고, 연산량이 많 아지면 배터리 소모량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또 플래시로 오염된 인터넷을 봐야 하는 건가?"
플래시를 보기 싫어 HTML 2.0 에 신기술을 대량으로 넣고, 웹 표 준을 ID 그룹 차원에서 지켰다. 하 지만 모든 인터넷 회사들이 웹 표 준을 지키는 건 아니었다.
비디오 코덱만 해도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가 AVC라는 최고급 코덱 을 무료로 제공하는 중인데도 디지 털카메라 회사, 비디오 편집 소프트 웨어 회사,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등등이 각자의 코덱을 밀어붙였던 탓이다.
3DFX와 하이옥탄이라는 독자적
그래픽 라이브러리가 망한 것을 보 고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사 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유재원도 미처 몰랐다. 동시에 독자적인 걸 참 좋아하는 시대였고, 제2의 안드 로이드사를 꿈꾸는 사람들 역시 수 없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문제는 뜨거운 감자인 플래시 플 러그인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유재 원도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HTML 2.0으로 모든 비디오 코 덱이 지원되는 거 역시나 일어나야 할 사건은 꼭 일어나듯, 플래시가 나타났다.
압도적 점유율을 자랑하는 ID 웹 브라우저에서 이를 지원하지 않으 면 그만일 것 같지만, 플래시의 파 괴력이 회귀 전과 비슷하다면, 오 히려 ID 웹브라우저의 점유율이 하 락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ID 그룹에 대해 칼을 갈 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플래 시를 배제하면 공정 거래 위반이니 독점의 횡포이니 하며 말이 나올 게 분명했다.
해답은 플래시를 무용지물로 만 들 차세대 HTML 3.0을 출시하는 것인데, 아직도 구체적인 일정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ID 그룹의 발매 우선순위에서 밀 리고, 인터넷의 폭발적인 성장만큼 표준화에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업 체도 많아 배가 산으로 가고 있었 던 탓이다.
"어휴. 여기까지만 하자."
플래시 하나를 두고 생각이 정신 없이 이어지던 유재원은 고개를 훌 훌 털며 브레이크를 걸었다.
머리가 비상하게 좋은 건 참 고 마운 일인데, 잠깐 넋을 놓으면 이 처럼 생각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버리는 것이다.
"회장님, 시간 되었습니다."
때마침 김대석이 이동할 시간임 을 알렸다.
유재원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러면서 안드로이드폰을 꺼내 티파니에게 출국을 알렸다. 무척이 나 바쁜 티파니였지만, 답장은 즉 각 돌아왔다.
보통의 부부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 던 유재원이지만, 티파니에 대한 마음이 식은 건 아니었기에 꽁냥거 리는 메시지를 한참이나 주고받은 후에야 ID 그룹 전용기에 오를 수 있었다.
-유재원 회장님의 탑승을 환영합 니다. 오늘 비행의 목적지는 조선 민주주의 공화국 수도 평양이고, 비행에는 11시간 30분이 소요되겠 습니다. 편안히 모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용기지만 할 건 다 했다. 출발하기 직전 기장의 환영사와 브리핑 이 나왔다.
기장의 말처럼 이번 비행은 한국 을 들르지 않고, 바로 평양으로 간 다.
미국과 북한 사이에 직항 노선이 생긴 건 아니었고, 유재원에게 주 어진 특혜였다.
잠시 후,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출발한 ID 그룹의 전용기는 북한의 수도 평양으로 기수를 잡았고 속도 를 올렸다.
-잠시 후, 비행기는 북한 영공에 진입합니다.
-북한 공군 측에서 에스코트를 위해 전투기를 출격한다고 합니다.
두 번째 브리핑을 전할 때, 기장 의 목소리에서는 약간의 떨림이 느 껴졌다. 그도 그럴 것。] ID 그룹의 전용기를 모는 기장은 미국인이었 다. 그것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 공군 소속 폭격기 파일럿이었다.
그런 그가 미그기의 호위를 받으 며 비행하는 건 참 낯선 일일 터였 다. 유재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한의 영공에 진입하자 호위 임 무를 시작하는 듯 미그기가 코앞까 지 접근했다. 그러더니 날개를 살 짝 흔들며 환영의 의사를 표시한 다음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양옆으 로 편대가 붙었다.
유재원만을 위한 특별 서비스는 아니었다.
2002 월드컵 개막식과 개막전을 타의(?)로 얻게 된 북한이었다.
월드컵 유치전이 한창 펼쳐지던 당시만 하더라도 남북 관계가 지금 처럼 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에 유치되느니, 남북 공동 개최라도 하자는 공감대가 형 성되었고, 덕분에 일본으로 거의 넘 어가던 21세기 최초의 월드컵을 한 국이 가져올 수 있었다.
더욱이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배 정받은 경기도 늘어났고, 경기장도 2개로 늘어나게 되면서 북한의 비 중도 좀더 커졌다.
유치전을 할 때만 해도 북한은
능라도 경기장 하나를 쓰는 것으로 했는데, 한국의 IMF가 터지면서 축구장 건설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반면 북한의 경제 상황은 괜찮았 다. 남북 경제 협력도 잘 굴러갔고, 빠른 종전 선언과 핵개발 프로그램 의 정지로 인해 미국의 제재도 없 었다.
경제 성장률이 지금은 4%대로 찍 히는 중이었다. 북한과 같은 후진국 에는 4%도 많이 부족한 것이지만, 회귀 전에는 마이너스를 찍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수 준이었다. 여기에 경수로도 본격 가 동을 시작하며 전기도 남아돌기 시 작했다.
그리하여 북한 김정일은 2002 월드컵에서 체재 선전을 대대적으 로 하기로 했다.
시기도 너무나 좋았다. 러시아도 무너졌고, 중국은 개혁 개방이다 뭐다 시끄럽게 굴다가 미국에게 한 방 얻어맞았다.
그나마 쿠바도 공산 국가의 면모 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북한만큼경제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월드컵 개막식은 올림픽과 달리 임팩트를 선사하기 힘든 행사였지 만, 각국에서 정상들이 모이는 자 리는 분명했다.
특히 2002 월드컵 개막전은 전 대회 우승국 프랑스가 있었기에 세 계의 포커스를 받기엔 딱 좋았다.
반면 유재원은 북한의 노림수가 너무 노골적이라 살짝 반감이 들었 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사라진 건 북한이 잘해서가 아니라, 이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루트를 유재 원이 직접 만든 덕이었다. 전용기 창문 너머로 보이는 미그 29가 잘 날아다닐 수 있는 것 역시 회귀 전 과 달리 미국의 경제 제재가 없어 진 덕 아니겠는가.
그걸 자기의 공이라 착각하고 무 리수를 두니 광명성 계획 같은 것 이 튀어나온 거 아닌가 하는 생각 도 드는 유재원이다.
그러는 사이 유재원이 탑승한 전 용기는 평양 공항에 도착했다. 역 시나 공항에는 화려한 의전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의장대 사열 같은 건 없지만 나 머지는 국빈에 가까운 대우였다.
유재원의 존재감은 북한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욱이 북한에서 월드컵을 준비하면 서 ID 그룹의 덕을 보는 게 참으로 많았다.
개막식 준비에 들어가는 여러 가 지 자재들 역시 ID 그룹의 도움으 로 지원을 받았고, 소프트웨어 역 시 마찬가지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개성 공단에서 제일 큰 공장이 ID 일렉트로닉스의 TV, 엑스박스 공장 이었을 정도다.
북한 측에서는 내심 컴퓨터나 스 마트폰과 같은 첨단 제품 공장이 들어서길 바랐던 모양인지, TV와 게임기 공장이라니 실망하는 기색 이 노골적이었다.
그렇지만 엑스박스 게임기가 세 계에서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생산 라인이 크게 확장되었고, TV 역시 브라운관이 아닌 대형 LCD TV라 는 게 확인된 후로는 불만이 완전 히 사라졌다.
고용되는 노동자의 숫자도 수백 명에서 수천 명으로 늘어나면서, 매 달 개성 공단에 풀리는 돈도 늘어났 다.
더욱이 ID 테크놀로지의 상장으 로 유재원에게 어마어마한 자금이 쌓였다는 걸 북한 역시 모를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유재원과의 관계를 돈 독히 하고, 투자도 늘리고픈 북한 수뇌부의 욕망이 공항에서의 화려 한 의전으로 표현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