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권 18화
"도대체 뭘 발표하려나?"
반면 ID 그룹 계열사 소속 취재 진은 기대감이 서렸다.
유재원이 이렇게 거창한 자리를 만들 때면 늘 상상 그 이상의 충격 을 선사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다수 네티즌들은 다 음 달에 있을 IDDC 2002를 기대 중이었다.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의 새로운 버전을 시작으로 차세대 안드로이 드 스마트폰과 ID 엔터테인먼트의 신작 발표까지 그야말로 초대형 발표들이 연달아 출격을 준비하고 있 었으니 말이다.
반면 NBC의 경우엔 물음표였다.
이제껏 유재원이 보여준 퍼포먼 스는 IT 분야였고, 방송 쪽은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타임플렉 스가 대박이었고, 넥스트컴에 타임 워너의 콘텐츠를 공급한 것 정도였 다.
"3분 후 시작합니다!"
떠들썩했던 취재진이 김대석 비 서실장의 사전 공지로 잠잠해졌다.
짧은 것 같으면서도 길게만 느껴 졌던 3분이 지나고 준비된 무대에 유재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NBC 인수를 결정하는 걸 보고서 많은 분들이 의문을 띄우셨 을 겁니다. 타임워너라는 거대 미디 어 제국을 가졌으면서도, 왜 NBC까 지 인수하느냐고 말입니다."
그 이유를 모르는 일부 네티즌들은 ID 그룹에 불리한 기사를 가리 고,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해 미디어 회사를 집어삼킨다는 음모론을 펼치고 있는 지경이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청자들께 보여드리고 싶은 환상적인 이야기 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지요."
"타임워너를 거느리고 계신데 그 걸로는 부족한가요?"
유재원의 대답에 취재진 중 어떤 기자가 바로 반론을 펼쳤다.
이처럼 자유로운 분위기가 미국 스타일이었다. 어떤 나라 기자들은 특별히 질문을 받아준다고 뭐든 물 어보라고 해도 손을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하지만 여기 있는 이들은 의문이 생기면 입이 먼저 터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네, 타임워너의 유통망도 제법 단단하지요. 하지만 보편적인 건 아닙니다. 유료로 케이블을 신청하 셔야 하고, 영화라면 직접 극장에 가서 보셔야 합니다. 신문이면 넥 스트컴을 쓰셔도 되지만 제대로 된 기사는 직접 종이 신문을 받아 보셔야겠지요. 하지만 저는 제가 여 러분께 보여드리는 이야기들을 훨 씬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 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질의응답을 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으니 멘트를 조정해 어느 정도 답을 해 주면서도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제가 누누이 강조하는 게 100번 의 설명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준비한 이야 기를 보시겠습니다."
NBC의 비전을 발표할 무대의 세팅은 IDDC 발표회장과 비슷했 다.
다만 준비된 디스플레이가 한 차 원 업그레이드되었다. 단상 뒤에 얼마 전까지도 길거리 응원을 소개 하는 뉴스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보 였던 그 물건이 걸려 있었으니 말 이다.
원래는 고해상도를 지원하는 프 로젝터를 쓰려고 했지만, 유재원은 과감하게 가로 길이가 10m를 훌쩍 넘는 인피니티 디스플레이를 가져다 놓았다.
아무리 프로젝터의 성능이 좋아 도 밝기와 선명도에 있어서는 LCD 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NBC, The NEW Horizons with ID.
NBC 의 공작새 로고와 함께 뉴 호라이즌이라는 타이틀이 떴다. 유 재원이 모든 지분을 인수했고 타임 워너 넥스트컴에 편입시켜 놓은 NBC였지만 로고나 사명 등 기업 아이덴티티는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대신 ID그룹의 일원임을 주지시 키기 위해 NBC의 공식 문서에는 ID 로고를 함께 사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준비된 영상 자료의 초반부는 무 척이나 진지했다.
NBC가 죽을 쑤고 있다지만 명 색이 북미 대륙을 아우르는 공중파 채널이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한 없이 가볍게 갈 수는 없었다.
미디어 공영성 확보와 보도 부문 의 강화와 같은 공익성에 대하서는 몇 번을 강조해도 과하지 않은 것이었기에, 첫 번째로 등장해 크게 강조되었다.
-모두의 NBC가 될 수 있도록 세대별 맞춤 프로그램 신설.
너무도 딱딱해 살짝 지루할 뻔했 던 첫 번째 파트가 끝나고, 유재원 이 가장 공들인 두 번째 파트가 시 작되자 분위기가 180도 반전되었 다.
쿵쿵! 쿵쿵쿵!
웅장한 베이스, 심장이 두근거리 게 하는 드럼 비트와 함께 생각지 도 못했던 타이틀이 떠올랐다.
"어! 저, 저건!"
80년대, 90년대 한창인 시절 즐 겨 보았던 바로 그 애니메이션, 드 래곤볼의 정식 타이틀 화면이었으 니 말이다.
북미의 기자들이라고 어린 시절 이 없는 건 아니었다. 드래곤볼은 동아시아는 물론 서양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만화였고, 비디오 대여점 에서부터 공중파 방송에서까지 거 의 모든 매체를 통해 유통된 콘텐 츠이기도 했다.
그만큼 깊이 잠들어 있던 추억이었기에, 타이틀 화면을 보고 반가 움이 먼저 올라왔다.
그리고서 현실로 돌아온 기자들 은 곧 차가워졌다. NBC 인수와 함 께 드래곤볼 판권이라도 얻은 모양 인데, 지금 그걸 다시 방송한다고 해도 소수만 좋아하지 큰 반향이 있을 것 같진 않았던 탓이다.
바로 애니메이션 퀄리티 때문이 었다.
드래곤볼은 연재를 시작하기도 전에 애니메이션 판권이 계약된 만 화였다. 덕분에 비축분도 없이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는데, 당연히 퀄리티가 무척이나 질이 낮았다.
원래 애니메이션은 TV판이 제일 떨어지고, 비디오 버전은 중간, 극 장판이 극상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분야였다.
최소 매주 한 편 이상은 방영해 야 하니 원화를 날림으로 그릴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아톰에서부터 시작된 유구한 전통 인 저가 정책으로 그림의 질은 더 더욱 떨어졌다.
당시에는 이것이 충분히 먹혔지만, 지금은 의문이었다. 하지만 드 래곤볼의 타이틀 화면이 페이드아 웃 되자마자 기척도 없이 시작된 손오공과 마인 부우 전투 신(scene) 에 다들 입이 떡 벌어졌다.
거대한 스크린에는 초사이어인 모드로 황금색 기의 폭풍이 휘몰아 치는 손오공의 전신이 압박적으로 등장했다.
"3D?"
딱 봐도 일반 애니메이션에 쓰이 는 셀화 느낌이 아니었다.
너무도 쨍하게 선명했고, 색감도 화려했다. 그러나 기존의 3D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보통 3D 애니메 이션하면 토이 스토리를 떠올린다. 먼지 한 톨 없이 엄청나게 깔끔한 화면이라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말 이 절로 나올 정도다. 그 방식으로 드래곤볼을 만들면 위화감은 기본 이다.
그렇지만 지금 거대한 인피니티 디스플레이에 나온 손오공의 모습 은 그런 위화감이 하나도 없었다.
일본풍 애니메이션 제작에 최적 화된 카툰 렌더링 기법의 궁극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 번 나오는 컬러판 만화를 그대 로 FHD의 애니메이션으로 옮겨 놓은 듯한 완벽한 이미지였다.
곧이어 전투가 시작되었다.
모델링이 끝난 오브젝트는 얼마 든지 활용할 수 있다는 3D 의 장점 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신이었다.
과거 TV판 전투 신은 생각나지 도 않을 만큼, 물 흐르듯 자연스럽 고 박진감 넘치는 전투가 이어졌다. 기를 이용한 특수 기술이 난무할 때마다 화면 가득 터지는 파편과 파티클, 화면을 물들이는 광원 효 과는 오직 컴퓨터 그래픽으로만 가 능했다.
"드래곤볼 RM이 올겨울 여러분 의 안방에 찾아갈 겁니다. 당연히 지금 보시는 퀄리티 그대로 말입니 다."
RM, 리메이크의 약자다.
당연히 지금 보여주는 퀄리티 그 대로 드래곤볼의 시작부터 끝까지 리메이크를 한다는 것이었다. 컴퓨 터 그래픽으로만 이뤄진 애니메이 션 제작비는 상상 초월이었다.
더구나 TV판은 극장판과 달리 수익 창출력이 약해 큰돈을 들이는 게 무리였다.
지금 인피니티 디스플레이에 뜬 수준이라면 차라리 극장판으로 내 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이 퀄리 티 그대로 TV판을 만들겠다니 놀 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후에도 유재원은 마블과 DC의 히어로물, 하얀 로냐프 강과 퇴마 록과 같은 판타지물의 시즌제 드라 마화, 프로듀서 아메리칸 아이돌과 같은 대규모 오디션 프로그램 신설, 고품질 다큐멘터리 제작 등을 발표 했다.
"NBC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 해 준비된 예산은 20억 달러입니 다."
그야말로 유재원만이 할 수 있는 과감한 승부였다.
호응은 대단했다. 그렇지만 모두 가 그런 건 아니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공중파를 케이 블 채널 다루듯 한다고 비난했다. 무조건 돈을 쏟아붓는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건 아니라는 지적이었다.
그렇지만 네티즌들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특히 8, 90년대 드래곤볼을 보고 자란 사람들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 기였다.
오히려 앞뒤 재지 않고 오직 자 신의 취향에 수십 억 달러를 쓰는 모습에 전율을 느끼는 이들이 상당 수였다. 더구나 이들은 인터넷 세 상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이들 이었다.
이들이 유재원의 발표에서 느낀 감정은 차이나 머니 사태 이후로 SNS에 범람하던 머니 스웩과는 차 원이 달랐다.
이것이 진정한 스웩이라며 발표 회를 요약한 게시물을 퍼다 나르기 를 주저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다가 유탄을 맞은 SNS 의 첼럽들은 뭔가 반박을 해 보려 했지만, 감히 유재원을 능가할 퍼 포먼스를 할 만한 이들은 그 어디 에도 없었다.
#395. 유리 지갑
유재원은 숙소로 돌아와 i웍스 노트북으로 넥스트컴을 비롯한 인 터넷 사이트를 돌아보며 자신의 발 표에 대한 반응을 체크하는 중이었 다.
"역시 양덕이야! 반응이 화끈하 구만."
어느 커뮤니티에 가더라도 호평 뿐인지라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건 당연했다. 동시에 양심이 조금 움 찔 하기도 했다.
오늘 낮에 공개된 드래곤볼 RM, 인터넷에서는 그냥 RM이라 칭해 지고 있는 작품의 영상은 사실 오 리지널 애니메이션이 아니었던 탓 이다.
바로 IDDC 2002에서 공개될 판 타지 유니버스-시공의 폭풍을 위해 만들던 단편 시네마틱 동영상이었 다.
손오공과 마인 부우가 한창 전투 를 벌이다가 시공의 폭풍에 휘말려이상한 세계에 떨어지는 모습을 연 출한 것이었다.
완벽히 리메이크되어 등장한 손 오공과 마인 부우 캐릭터 역시 게 임용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제작된 하이 폴리곤 모델링과 리소스를 그 대로 가져다가 ID 엔터테인먼트가 자랑하는 CG팀이 손을 보태서 완 성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 다.
시네마틱 동영상 수준으로 만들 어지는 장편 애니메이션은 아직 이세상에 없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만 들면 되는 것이다.
ID 엔터테인먼트는 한참 전부터 CG팀을 별도로 운영하기 시작했 고, CG팀이 사용하는 랜더링 팜의 성능도 꾸준히 개량해냈다.
아예 대규모 클라우드 시스템에 적합한 랜더링 소프트웨어까지 자 체적으로 만들었다.
더욱이 CG팀에서 손오공 VS 마 인 부우 전투편을 연출했던 팀을 그대로 드래곤볼 RM 제작을 전담 할 스튜디오급으로 업그레이드하면 그만이다.
ID 엔터테인먼트의 CG팀 역사 는 10년이 넘었고, 그 전통만큼이 나 인력들의 수준도 지구 최강이었 다. 감독부터 애니메이터까지도 할 리우드에서 탐을 낼 정도였다.
헤드헌팅이 되지 않자 독립해 나 와 팀을 꾸리면 일감을 주겠다고 꼬시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다행히 다들 ID 엔터테인먼트에 서의 대우에 대해 만족하고 있었기 에 유혹에 흔들려 퇴사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재원이 할 일은 더 많은 PC를 구입해 더 대규모의 랜더링 팜을 만들어 주는 것뿐이다.
세상엔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참 많은데, 이 문제는 다행스럽게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