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666화 (666/1,007)

31권 25화

은색 머리카락과 수염, 파란 눈 의 중년 남성.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재원의 서재에 들어와 한국식 으로 허릴 숙여 인사하는 이가 바 로 미디어 그룹의 마지막 퍼즐이었 던 아더 왓슨이었다.

잠을 못 잔 듯 퀭한 눈빛만 뺀다 면 성공한 뉴요커의 모습이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모델 부럽지 않은 외모였다. 그렇 지만 멋진 외모만큼이나 방송계에 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미스터 왓슨, ID 그룹의 식구가 된 걸 환영합니다."

유재원은 아더 왓슨과 악수를 하 며 환하게 반겼다.

1960년대쯤, 콜롬비아 대학교의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후에 타임 지의 기자가 되었고, 이후 NBC에 입사해서 보도부 PD로 활동하다가 90년대 중반 NBC의 사장까지 되 었던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다만 90년대 말부터 바뀌는 방송 환경과 시청자들 트렌드를 읽지 못 한 탓에 케이블과 경쟁 공중파에 시청자들을 빼앗기게 되었고, 결국 NBC가 매각되는 단초를 만든 사 람이기도 했다.

유재원이란 젊은 IT 갑부에게 NBC가 팔렸을 때 절망이 컸다.

실제로 NBC의 점령군 사령관으 로 테드 터너라는 폭군이 내려왔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아더 왓슨을 자 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나를 왜 또 부르나 싶 었습니다. 아직 나를 가지고 조리 돌림할 게 있나 싶었지요."

서재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서 마주 보고 앉은 아더 왓슨은 담담한 얼굴로 한국에 오게 된 소감에 대 해 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처음엔 유재원의 제안 에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는 이야기였다.

"하하, 제가 뭐 하러 그러겠어요. 진짜로 미스터 왓슨 씨의 능력이 필요해서 불렀던 것뿐인데 말입니 다."

"그러게 말입니다. 혼자 고민한 다고 답도 나오지 않을 일이었는데 왜 그리 고민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더 왓슨은 본인이 주장한 것들 이 모두 다 정확한 텍스트로 들어 간 계약서를 보며 후회했다.

씹던 껌처럼 이상한 목적으로 쓰 이고 다시 버려지는 거 아닌가 했 던 고민이 말끔하게 사라질 만큼, 계약서의 문구들은 확실성을 띠고 있었다.

ID 미디어 그룹을 정상화에 올린 다면 NBC나 타임워너 넥스트컴 등으로 영전될 거라는 보장도 되어 있었다.

다만 미디어 그룹 정상화라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일이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말이 나 올 수밖에 없었는데, 유재원은 아 더 왓슨도 납득할 수 있는 몇 가지 지표로 기준을 미리 정해 놓았다.

그런데 그 기준은 하나를 빼고는 아더 왓슨의 머릴 갸웃거리게 했다.

방송 관련 지표는 미디어 그룹 산하 방송국에서 어떤 프로그램이 든 상관없이 시청률 4%를 돌파하 는 것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케이블TV 사정을 나름대 로 조사해 본 아더 왓슨은 4%라는 수치가 매우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케이블TV 보급률이 낮은 탓 에 아주 잘나가는 케이블 방송국이 라도 0.x% 대의 시청률이 나오는 중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예 시청률 집계에 잡히지도 못 하는 방송국들이 수두룩한데, 다행 히도 유재원이 인수한 온게임넷이 나 엠넷23은 그나마 인기 채널이었 다. 아주 때를 잘 타면 1%를 넘는 경우도 있으니 4%가 불가능한 수 치는 아니었다.

문제는 이다음이다.

4% 시청률을 달성할 때, 방송 제작 환경과 관련되어 논란이 없어 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인력을 쥐어짜 는 건 이제 근절해야 한다는 말이 에요."

방송국 사람들이 방송국 놈들이 라는 말로 격하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방송국의 수입 중 가장 큰 비중 은 역시나 광고비였고, 광고비는 시청률에 비례했다. 그렇기에 시청 률 절대주의로 인해 시청률을 뽑아내는 데 혈안이 되었다. 문제는 방 송 제작 환경이 열악하기 그지없으 니, 시청률을 위해 쥐어짜이는 건 방송 제작 노동자들이라는 것이다.

정규직은 그나마 PD 정도이고, 나머지 촬영 감독부터 FD, AD, 작 가 등등은 죄다 비정규직에 야근 정도는 기본이었다.

"제가 만들 미디어 그룹이 그런 취급 받는 건 사절이거든요. 저는 ID 그룹이 손을 댄 분야는 역시 다 르다 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이 를 위해 충분한 투자를 할 준비도 되어 있고요."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유재원의 말에 아더 왓슨이 고개 를 끄덕였다.

NBC에서 PD부터 사장까지 웬만 한 직책을 다 경험해 보았던 아더 왓슨은 미국의 제작 환경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진 않았다.

그런데 한국의 방송계를 되짚어 보면서 이럴 수가 있나 하며 입이 떡 벌어졌다.

"일단 저는 자체 제작 프로그램비율을 50%로 끌어올릴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필요한 인력은 웬만 하면 정규직으로 고용할 거고요. 작가나 연출 보조 모두 다 말이죠."

"과감하시군요."

"배고파야 글이 나온다는 사람들 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뭐든 든든해야 힘을 쓸 수 있는 법이라 생각하거든요."

진짜로 배고파 본 사람이라면 그 런 소리는 절대 못 할 것이다. 전 생에 진짜 배를 곯아 본 유재원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실제 ID 그룹은 한국은 물론 미 국의 대기업과 비교해도 상당히 높 은 수준의 보수 체계를 가지고 있 었다.

그 결과 전 세계의 우수한 두뇌 들이 제일 선호하는 회사에 ID 그 룹이 등극했다. 우수한 인재가 모 이니 출시하는 소프트웨어와 제품 들 모두 세계 일류를 놓치지 않았 다.

물론 아직도 유재원을 능가할 프 로그래머는 보이지 않았지만, 몸이 2개는 아니었기에 ID 그룹의 넓어진 제품군에 모두 다 관여할 수는 없었다. 그 빈자리를 우수한 인재 들이 성공적으로 메우고 있는 것이 다.

방송계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미스터 왓슨께 기대하 는 건 첫 번째로 정교한 인력 관리 예요."

그렇다고 무작정 정규직을 늘리 겠다는 건 아니다.

능력이 검증된 인재들을 뽑아서 정규직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노동법 개정이 회귀 전과 아주 달라진 방향으로 이뤄진 덕에 한 번 고용 하면 쉽게 자를 수 없다. 그렇기에 TO를 늘릴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한 다.

"다음으로 제작 문화 개선이죠. 기존 방송국이 답습하고 있는 악습 이 절대 우리 미디어 그룹에서 재 현되어선 안 돼요!"

유재원은 단호히 말했다.

그 모습에 아더 왓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행을 고민할 때 한 국 방송국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를 했던 아더 왓슨은 꽤나 놀랐던 게 몇 가지 있었다.

이를테면 매일 방영되는 한 시간 짜리 연속극이 있다든가, 드라마가 주 2회 편성된다는 이야기 등등이 었다.

미국의 드라마는 주 1회 방송이 기본이었고, 연속극도 있긴 있지만 1시간짜리는 없었다. 30분 정도의 길이가 보통이었으니 말이다.

즉, 한국에서는 미국의 2배로 일 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 도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말이

"아직은 가칭으로 예능TV라 부 르고 있지만 보도 기능만 없는 일 반 채널도 만들어질 거예요. 당연 히 드라마도 제작할 거고요. 이러 한 제작 환경을 완전 미국식으로 꾸미길 원해요. 그러니 미스터 왓 슨이 최고의 적임자죠."

유재원이 한국 방송계 인물을 사 장으로 데려오지 않는 이유를 밝혔 다.

한국 방송계의 임원급 인물을 가 져다 쓰면, 그가 해 왔고 배웠던 것들을 그대로 실행할 가능성이 매 우 높았다.

그러면 한국 방송계가 가진 악습 도 고스란히 전이될 것이다.

실제로 유재원은 회귀 전 그런 모습을 많이 보았다.

정권의 방송국 장악 시도에 대항 해 열심히 파업도 하고, 쓴소리도 열심히 했던 사람이 있었다. 다음 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되고 그 사람 이 해당 방송국의 사장이 되었지만, 달라지는 건 크게 없었다.

보고 배운 게 구식이었기에, 경영자가 된 다음에 펼치는 정책 역 시나 구식이었다.

"미스터 왓슨도 생각하고 있는 방식이 있겠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꼭 지켜 주세요. 방송 제작에 있어 한 사람에게 모든 권한을 주는 일 은 절대 없어야 한다는 걸 말이지 요."

야구는 투수 놀음이란 말이 있 고, 방송국은 PD 놀음이라는 말이 있다.

다만 야구 이야기는 지금도 있는 말이지만, PD 놀음이라는 말은 좀나중에 나올 말이었다. 시청률을 몰고 다니는 스타 PD들은 리얼 버 라이어티 프로그램 붐이 일어나는 2008년쯤부터 나오는 말이니 말이 다.

문제는 과도하게 권한이 집중된 PD 시스템이 온갖 문제를 양산했 다는 것이다.

인간성을 확인하는 방법에는 여 러 가지가 있다. 술에 적당히 취했 을 때나, 큰돈이 주어졌을 때도 본 성이 보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 은 큰 권력이 주어졌을 때였다.

권력에 취하면 못 볼 꼴을 많이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대선 판도를 뒤흔들고 있는 이인제 였다.

필요에 의해 등용되었고, 타이밍 이 잘 맞아 총리도 하고 당대표도 했는데 이걸 본인의 능력이라 착각 한 나머지, 오판에 오판을 거듭하 고 있었다. 더욱이 본인에게 주어 진 권력도 마구 휘둘러 애꿎은 피 해자만 양산했다.

이인제와 함께 탈당한 의원들 말 이다. 이번 대선이 어떤 식으로 마침표를 찍든, 그들의 앞날은 먹구 름이 끼었다. 통일국민당에 있었으 면 다음 총선에서도 당선을 기대할 수 있었을 테지만, 이젠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방송국 PD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인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프로 그램을 잘 만들면 될 텐데, 거기에 취해 온갖 부정한 일은 다 일으켰 다. 연예인 시켜 준다면서 상납을 받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물론입니다. 당연한 것 아니겠 습니까?"

미국도 비슷한 문제는 있었다. 하지만 견제 장치도 있었고, 걸리 면 칼같이 잘라낸다. 한국도 잘라 내는 시늉은 하는데, 시간이 좀 지 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고 슬그머니 기어 나오는 게 태반 이었다.

"저는 메인 작가를 정규직으로 해서 PD의 권한을 나눠 갖는 것으 로 보완을 하려고 해요."

군대로 치면 PD는 장교이고 작 가는 부사관인 것이다.

군대는 장교와 부사관이 조화롭게 결합해 시너지를 이룰 때 최고 의 전투력을 발휘한다. 마찬가지로 작가의 발언력을 키움으로써 PD의 견제 장치로 삼아 균형을 맞추겠다 는 것이 유재원의 생각이었다.

기존 방송국이 이를 못 하는 건, 작가들이 비정규직 파리목숨인 탓 이었지만, 미디어 그룹 소속 방송 국들은 메인 작가는 물론 보조 작 가까지 정규직으로 뽑을 예정이니 문제없다. 다만 예외는 드라마 작 가였다.

드라마는 예능이나 쇼 프로와 달리 끝이 확실한 장르였기에, 작품 마다 계약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PD 와 작가가 동시에 짜고 서 적당히 해먹을 확률도 무시할 수 없으니, 그룹 감사실을 비롯한 시스템적인 안전장치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유재원과 아더 왓슨은 미 디어 그룹 운영에 대한 충분한 대 화를 하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일단 제가 미디어 그룹 채널의 운영에 대해 밑그림을 그려 놓은게 있습니다."

미디어 그룹의 조직 시스템에 관 해 설명을 끝낸 유재원은 청사진도 제시했다.

"예능TV 개국 기념과 함께 드라 마 공모전을 열 거예요. 아! 밀리언 달러 챌린지로 수집한 콘텐츠 중에 드라마화가 가능한 작품을 몇 개 추려 놨는데, 그것도 참고하시면 될 거고요."

밀리언 달러 챌린지는 100개의 수상작을 남기며 마무리되었다. 웹 툰부터 소설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총망라한 챌린지였는데, 안타깝게도 과거 시큐리티 챌린지처럼 큰 반향 은 없었다.

아무래도 드도와 판타지 쪽으로 장 르가 편중된 탓에 독자층도 한정되 었던 것이 원인으로 꼽혔다.

덕분에 드라마화도 살짝 문제가 생겼다.

장르가 장르이다 보니 드라마 제 작에 제법 큰 예산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미국 NBC 산하 스튜디오에서

제작 중인 하얀 로냐프 강과 괴물초장이 역시 오크를 비롯한 몬스터 들 구현에 CG가 대량 필요해서 제 작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그렇기에 드라마 공모전으로 드 라마 제작에 적합한 이야기를 뽑고, 이를 통해 예능TV 개국도 알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유재원의 생각 이었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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