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권 12화
스탠퍼드 전자공학과 학과장님으 로부터 온 문자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 녀석들이 뭘 몰라서 아무렇게 나 지껄이고 있으니 마음 상하지 말라는 당부의 메시지였다.
아무래도 그 녀석들이라는 건, 정황상 네티즌이나 기자들이 아니 라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들을 말하 는 게 틀림없었다.
사실 스탠퍼드와 하버드 사이에 는 알게 모르게 라이벌 의식이 좀 있는 편이었다. 동부의 강자가 하 버드라면 스탠퍼드는 서부의 대표라고 말이다.
물론 칼텍이나 MIT에서 들었으 면 턱도 없다는 반응이겠지만, 각 자 나름대로 자부심은 굉장했다.
그러면서 학과장님의 메시지에는 '인공지능'이라는 신사업이 자신들 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나게 발전해 있는 것에서 오는 위기감과 반발 심리에서 오는 경계심이 사건을 이 렇게 키워낸 것이라며 나름 분석도 있었다.
즉, 윤리 논란의 근본은 무지에 서 오는 공포심이니, 작동 원리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만 시키면 알 아서 해소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일리 있는 말?씀이야."
스탠퍼드는 전적으로 유재원을 응원하고 있으며 도움이 필요하다 면 말만 하라고 했다. 언제든 적극 적으로 돕겠다고 말이다.
"든든하기도 하고."
스탠퍼드 학과장님의 메시지는 개인이 보낸 것이 아니라, 스탠퍼 드 대학교의 공적인 입장이라고 해 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근래 스탠퍼드의 최고 자랑거리는 유재원과 ID 그룹 이었다.
스탠퍼드의 이념 자체가 도전 정 신으로 똘똘 뭉친 학교였다. 졸업 식 때 종종 나오는 말이 '졸업생인 너희가 회사를 세우면, 학교가 전 적으로 도와줄 거다'라는 말이었다.
실제로 실리콘 밸리의 상당수 회 사들은 스탠퍼드 출신이 세운 회사 였다.
인텔과 AMD의 모태는 페어차일 드 반도체였고, 그 회사는 당연히 스탠퍼드 출신이 세운 회사였다.
이를 시작으로 실리콘 밸리에 이 름만 대도 알 만한 회사들은 보통 스탠퍼드 출신이란 딱지가 붙어 있 었다.
몇 년 전부터는 스탠퍼드의 아이 콘이 유재원과 ID 그룹이 되었다.
스탠퍼드 출신이 세운 기업 중에 ID 그룹이 제일 유명해졌으니 말이 다. 스탠퍼드의 졸업생들도 ID 그 룹의 입사를 제일 먼저 지망하게 되었을 만큼 선도적인 위치에 우뚝 섰다.
이뿐만이 아니다.
실제 유재원이 스탠퍼드에도 많 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최신의 컴퓨터 시스템을 주기적 으로 공급해 주는 건 물론이고, 매 년 어마어마한 기부금을 냈다.
유재원이 직접 챙기는 게 아니라 ID 그룹 차원에서 집행하는 사회적 기여 예산이었지만, 다른 대학교들 이 그저 부러워할 만큼 상당한 액 수였다.
ID 파운데이션의 장학금 정책도 마찬가지다.
그런 유재원을 하버드에서 먼저 건들였다니,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게 스탠퍼드의 입장이었다.
"흠, 무지에서 오는 공포심이라."
하버드에서부터 시작된 윤리적 논란에 대한 대응법을 생각하고 있 던 유재원이었고, 크게 걱정하지도 않았다.
해당 이슈는 회귀 전에도 일어났 었던 일이었고, 그에 따라 앞으로 선구자적 위치에 있는 유재원이 취 할 자세도 레퍼런스처럼 마련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제는 거의 꺼내 보지도 않는 마스터플랜에도 수록된 일이었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학과장님이 말씀하신 '무지에서 오는 공포심'이 라는 대목에 눈길이 갔다. 인공지 능 골드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끼는 건 골드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는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매우 합리적인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된 다.
유재원은 직접 철도 기관사 딜레 마 상황을 만들어 놓고 F2를 투입하려고 했다. 그 복잡한 상황에서 F2가 잘 헤쳐 나가는 걸 본다면 적 어도 반수 이상은 납득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학과장님의 메시지를 받 으니 보다 더 근본적인 움직임도 필요할 것 같다.
"골드에 대해 논문을 발표할까?"
사실 따지고 보면 유재원 편이 되어 줄 스탠퍼드 대학교의 교수님 들도 골드의 작동 방식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골드를 완성하면서 딱히 외부에 관련 기술을 알리지도 않았고, 논 문을 쓰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ID 그룹이 아니더라도 다른 회사 들이 신제품을 낼 때, 특허 등록은 해도 논문을 쓰진 않는 게 일반적 이었다.
특허로는 독자적인 기술을 보호 받을 수 있지만, 논문은 그저 경쟁 자만 양산할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골드가 만약 스탠퍼드의 연구실에서 탄생한 인공지능이었다 면, 관련 논문은 수십 개, 수백 개 가 나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업이라는 건 무척이 나 폐쇄적인 조직이었기에, 신기술 이 나올 때 동반되는 논문 발표는 매우 적었다.
유재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ID 그룹 차원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매우 드물었다. 그나마 일렉트로닉 스의 리사 수 박사나 이종효 박사 정도만 틈틈이 논문을 쓰는 정도였 다.
비단 ID 그룹만이 아니라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20세기에 신기술 개발을 주도한 곳이 대학교와 학술단체였다면, 21세기는 기업 의 연구소였다.
무척이나 폐쇄적인 기업의 연구 소들은 보안을 이유로 기술 공개를 꺼렸고, 그에 비례해 음모론도 커 나갔다. 지금 유재원을 향해 쏟아 지는 의문 정도는 약과일 정도로 말이다.
논문을 통해 스탠퍼드 대학교처 럼 학계의 많은 박사님을 든든한 아군들로 모을 수 있다면, 여론전 에서도 전혀 밀릴 이유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덤으로 인공지능 연구도 활발해 질 테고 말이다.
무엇보다 무지에 의해 일어나는 음모론을 차단해 불필요한 충돌을 사전에 피하면서, 학계의 우군도 확보하는 건 덤이다.
생각을 정리한 유재원은 곧바로 학과장님께 답장을 보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하고, 이에 대한 대응 책도 생각해 놓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인공지능 골 드의 완성에 핵심이었던 기계 학습 에 관한 논문을 써서 발표할 생각인데, 지도와 편달 부탁드린다고 말이다.
답장은 즉각적이었다.
-논문이라고? 진짜인가? 우리야 대환영일세!
사실 스탠퍼드의 학장님을 비롯 한 IT 관련 계열 교수님들도 제일 궁금했던 건 리얼카메라에서 공개 된 인공지능 앱의 구조였다.
물론 그 바탕이 되는 골드의 시 스템이나 작동 원리에 대해서도 무 한한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도 못했던 논문을 유재원이 직접 쓰겠다고 하 니, 타는 목마름이 가득했던 차에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 같은 청량 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더욱이 논문이 발표될 때까지 기 다려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도와 편달이라는 건 논문을 함 께 작성하자는 의미였으니, 세계 최고의 이슈로 떠오른 인공지능의 비밀에 대해 알 기회였다.
지적 호기심이 남다른 학과장님 이었기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필드 테스트도 준비해 주세요."
유재원의 신념 중 하나가 100번 떠들어 봐야 한 번 보는 것만 못하 다는 것이었다.
논문이 전문가들을 위한 대응책 이라면 대중을 위한 대응이 F2를 철도 기관사 딜레마 상황에 놓고 결과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김대석이 유재원의 말을 바로 받 았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고정 비용도 커져서 돈이 많이 들지만, 말 한 마디면 복잡한 일도 딱딱 처리 될 수 있는 게 참 좋았다.
몇주 후.
시애틀 외곽의 ID 하이테크 연구 소 테스트 트랙에는 북미는 물론 세계에서 몰려온 취재진으로 가득 했다.
바로 F2의 공개 필드 테스트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라이트닝 볼트의 F2를 보기 위해 먼길 와 주셔서 감 사합니다. 사장 볼트입니다."
행사의 주관은 유재원이 아닌 라 이트닝 볼트의 볼트 사장이 맡기로 했다.
F2를 완성하는 데 제일 많은 공 을 들인 사람은 역시나 볼트 사장 이었기 때문이다. 유재원이 자율 주행 기능을 담당하긴 했지만, F2 가 볼트 사장의 역작이라는 건 틀 림없는 사실이었다.
취재진 앞에 선 볼트 사장을 향 해 카메라가 집중되었고 플래시가 쏟아졌지만, 얼굴은 평온 그 자체 였다.
F2에 대한 확실한 자신감이 있었 기 때문이다.
시뮬레이터 실험부터 실물을 이 용한 테스트까지, 수많은 자체 테 스트가 있었고 그 결과는 안정적이 었다.
인공지능 윤리 논란이 터졌을 때 도 볼트 사장은 별일도 아닌 걸 가 지고 되게 심각하게 다룬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테스트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자율 주행 기능에 설정된 대원칙을 말씀드리지요."
볼트 사장은 과거 리얼카메라 촬 영팀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했던 것 처럼 취재진들 앞에 프로젝터로 스 크린을 만들고, 슬라이드 쇼를 준 비해 비쳐 주었다.
화면 속에는 로봇 3원칙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회귀 전 안드로이드 로봇 들이 대량 보급되었던 21세기 중반에도 로봇 3원칙과 같은 대의제는 합의되지 못했다. 대신 그보다 훨 씬 강력한 규약으로 인공지능과 로 봇들을 제어했다.
-ID 그룹의 모든 인공지능은 현 행법을 준수한다.
바로 현행법이다.
법률은 사회구성원 모두가 지켜 야 할 최소한의 원칙이었다. 인공 지능 역시 사회 구성 요소 중 하나 였기에, 법률을 따른다.
그렇기에 F2의 자율 주행 인공지 능 역시 미국의 법률을 따랐고, 당연히 미국의 도로 교통법도 완벽히 준수하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ID 그룹의 모든 인공지능은 인 명을 최우선의 가치에 둔다.
다만 현행법만으로 부족한 상황 이 생겨날 수 있고, 그중 하나가 철도 기관사의 딜레마였다. 그 상 황에서 F2의 행동 방침을 결정하는 건 인명이 최우선이라는 이야기였 다.
"그 인명이 운전자라는 겁니까? 보행자라는 겁니까?"
취재진 중 성질머리가 급한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둘 다입니다."
이에 대해 볼트 사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답했다.
"둘 다라니요? 둘 중 하나를 선 택하는 문제 아니었습니까? 궤변을 듣기 위해 우리가 이 먼 곳을 찾아 온 건 아닌데요?"
처음부터 예의도 밥 말아 먹은 기자였고, 이어진 질문 역시 그 태 도 그대로였다.
"저런, 논리적 사고 실험과 현실을 착각하시는 분이 여기 계시는군 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ID 하이테크 실험실에서는 세계 최고 의 연구진들이 만든 기상천외한 아 이템이 매일같이 쏟아집니다. 그렇 지만 실험실 속의 아이템이 세상 밖으로는 나오지 못합니다. 실험실 처럼 변수가 고정된 공간에서만 작 동되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트 사장은 이번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철도 기관사 딜레마 역시 마찬가지죠. 현실에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확률은 0에 가깝습니다. 변 수들이 완전히 차단된 상상 속의 세상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이 지요. 반면 F2는 현실의 도로 위를 달리게 될 미래의 이동 수단입니다. 자동차 주행 도로는 현실 속에 있 고, 그 속에서는 수많은 변수가 실 시간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F2는 그러한 변수들을 모두 고려해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겁니 다."
발언을 마친 볼트 사장은 취재진 과 기자들을 훑어 보았다.
이해한 듯한 얼굴을 한 이들은 1/10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의 반 은 지루하다는 표정, 반은 믿지 않 는다는 표정들이었다.
"우리 유 회장님이 늘 하시는 말 이 있지요.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낫다. 바로 시 범을 보여 드리죠."
역시나 시범을 보여준다는 말에 취재진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 랐다.
"그렇지만 저는 유 회장님이 아 니죠. 유 회장님이라면 한 번에 여러분들을 납득시켰겠지만, 저는 아 직 그 경지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분 이 만족하실 때까지 몇 번이고 보 여 드리겠습니다."
이미 트랙에는 F2가 준비되어 있 었다.
그리고 300m쯤 앞에 철도 기관 사 딜레마의 변형으로 보이는 건널 목과 다섯 개의 마네킹이 세트장처 럼 준비되어 있었다. 마네킹은 무 선으로 제어되는 전동 모터와 바퀴 가 달린 판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도로의 양옆에는 단단한 콘크리 트 구조물이 벽처럼 세워져 있었다. 빠르게 충돌한다면 F2가 박살날 것 처럼 튼튼해 보였다.
"아 참, 테스트는 여러 가지 단 계가 있는 만큼 질의응답은 테스트 가 모두 끝난 다음 하겠습니다. 그 럼 테스트를 시작하지요. F2, 주행 시작!"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