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권 16화
"과찬이십니다."
"전혀요. 오히려 유 회장의 업적 이 과소평가되는 것 같아서 아쉬움 이 많습니다."
논문이 발표되고 나서 인공지능 골드가 인격이 있는 강 인공지능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실망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욱이 유재원이 논문을 발표하 면서 기계 학습 인공지능 연구에 새로운 돌파구가 생겨났고, 대규모 자본이 참가하는 연구 프로젝트도 여러 개 발족되었다.
애플만 해도 2억 달러짜리 시리 프로젝트라는 걸 시작한다고 발표 했고, 전통의 강호 IBM도 왓슨이 라는 인공지능 프로젝트를 공개했 다.
ID 그룹을 위협할 경쟁자들이 대 거 등장하면서 춘추전국시대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예전의 대한민국이라면 대형 글 로벌 기업들의 추격에 겁부터 먹었 을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 같았던 대한민 국의 기업이 글로벌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이긴다는 상상은 쉽게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ID 그룹은 다르다! 그러 한 인식이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에 게도 깔려 있었다.
"그나저나, 유 회장이 독대를 신 청했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어려운 시간 을 내주셨는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 더군요."
악수와 함께 근황 이야기를 나누 다가 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노 대 통령이 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집무실에는 유 재원과 노 대통령뿐이었다. 이곳까 지 유재원을 안내했던 비서실장님 이나 수행원들은 둘의 근황 이야기 중에 다 자리를 비운 것이다.
사실 지금의 독대가 이뤄진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노 대통령은 원래 독대라는 걸 매우 싫어하던 사람이었으니 말이 다.
이제까지의 대통령들은 다 해 왔 던 국정원장으로부터의 독대 보고 를 폐지했고, 다른 장관들이나 비서관들의 독대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런 노 대통령이 유재원의 독대 신청을 받아들이는 데 무척이나 많 은 고심을 했을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대통령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나 름대로 통일국민당에 영향력을 행 사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유재원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노 대통령도 크음 하면서 살짝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세계적 기업의 오너가 정치권에 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 다는 건, 정치인에겐 무척이나 불 편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전임인 김대중 대통령도 이런 상 황이 매우 부담스러워서 돌파구를 모색해 봤지만, 노무현이란 후계자 를 키우는 것 말고는 성공한 게 없 었다.
"몇 가지의 우려만 해소된다면, 이번에도 민주당과의 연정을 매우 긍정적으로 추진해 볼 생각입니다."
연정이라니.
매우 반가운 소리였다.
노무현 정권 출범 후, 가장 큰 불안 요소가 여소야대의 국면이었 다.
민주당이 1당이긴 해도 국회 전 체를 보자면 과반 확보엔 실패했으 니 말이다.
그러니 김대중 대통령 때처럼 통 일국민당과의 연정을 재추진하는 게 최고의 우선순위였다.
더욱이 노 대통령 역시 따로 그 리는 그림이 있었다.
민주당 내에서 노 대통령을 고깝 게 여기는 계파가 있으니 후단협 사람들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가신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인데, 호남이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재선과 3선은 기 본이고 4선 이상을 한 의원도 있을 정도로 지역에 영향력이 컸다.
이들은 굴러들어온 돌인 노 대통 령을 인정하지 않았다. 후보 시절 부터 그래왔고, 대통령이 된 지금 도 이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청와대의 국정 운영에 따라 주지 않고 오히려 민주당의 독자적인 움 직임을 보일 때도 있었다.
당장 내각 구성부터 공기업과 산 하 단체 인사권 행사를 두고 말이 나오고 있었다. 국가 운영에 중요 한 자리를 그저 논공행상이라 생각 하고 본인들의 세력을 챙기기 위해 힘을 쓰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국민당이 연 정해 준다면 노 대통령의 부담은 한결 적어진다. 그리고 이를 바탕 으로 강력한 정계 개편도 할 수 있 었다.
물론 노 대통령의 정계 개편이 여당 민주당의 분열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유재원이지만, 이 대목 에서는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다.
"유 회장님의 우려라니. 그게 무 엇인지 궁금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걱정도 드는군요."
"막상 들어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유재원도 본인의 우려가 별것 아 니길 기원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 다.
짧지만은 않은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은 평소 스타일과 는 다르게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해 야 했던 탓이다.
눈앞의 상대가 ID 그룹의 임원이 라면 그야말로 돌직구를 던졌을 터 인데, 노 대통령이다 보니 어쩔 수 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소했지만, 그것이 노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리 지 않도록 부드럽게 풀어야 했다.
바로 권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 문이다.
"권위주의는 타파해야 한다는 대통령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하지 만 권위를 내려놓기 위해 광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유재원이 회귀 전 마스터플랜을 짤 때, 노 대통령의 시대 역시 고 려했다. 그러면서 개인에 대한 분 석도 있었는데, 노 대통령의 가장 큰 실책은 바로 '권위'를 너무나 일 찍, 너무나 가볍게 놓아 버린 것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노 대통령의 반응은 예측한 그대 로였다.
권위주의로 똘똘 뭉친 군부 독재 시절에 당한 사람도 많이 도와주었 고, 본인도 당했던 노 대통령은 탈 권위주의야말로 시대적 사명이라 생 각했으니 말이다. 다만 그것을 아직 입 밖으로 내놓은 적은 없었다.
청와대 안에서도 비서실장을 비 롯해 일부만 아는 이야기였다. 그 런데 유재원은 다 아는 것처럼 권 위를 지키라고 말하고 있으니, 놀 라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군부 독재도 끝났고, 월드컵이 라는 축제를 치르면서 한반도가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장 완벽 한 민주사회가 열린 것처럼 보이지 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6.25 전쟁 이후 재건된 한국에서 보수 세력의 집권은 무려 50년이 넘었다.
정권 교체는 겨우 2번이었는데, 그중 한 번은 전명헌이니 보수 집 권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은 기득권이란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있는 대통령님 한 분만 바뀐 거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권위를 내려놓는 건 정치 안 하겠다는 말 과 똑같았다.
물론 전생의 노 대통령이 권위가 없었던 건 스스로 내려놓은 대통령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만들려고 어마어마한 물 량 보도를 쏟던 보수 신문의 노력 이 훨씬 컸다.
지금은 3대 보수 신문이 2대 보 수 신문으로 바뀌었으니 좀 덜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어떨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대통령의 권위가 사라지면? 국 회의원은 자기 정치를 할 것이고, 공무원들 역시 자기 살길을 알아서 모색하겠지요. 게다가 권위로 간단 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각자 목 소리를 내는 사람들끼리의 다툼이 심해지면서 커다란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매우 큽니다."
권위가 무조건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군부 독재처럼 폭력으로 만들어진 권위라면 없애 버리는 게 낫다.
하지만 존경하고 믿을 수 있는
권위라면 긍정적인 효과도 상당하 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강요는 아닙니다. 하지만 노 대 통령님의 권위가 확고해질수록, 연 정에 대한 부담도 덜어진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반대로 노 대통령이 과거처럼 웃 음거리가 된다면, 연정도 힘들어질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노 대통령의 표정은 처음보다 훨 씬 무거워졌다.
유재원의 독대 요청이 보통 평범 한 상황은 아니었고, 당연히 특별 한 이야기가 진행될 것임을 예상은 했다. 그런데 이런 쪽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혹시, 기득권의 저항에 대해 살 짝 알고 싶다면, 사학개혁법 입법 에 대해 운만 띄워도 될 겁니다."
그런 노 대통령에게 유재원은 조 언을 추가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 도 눈빛을 반짝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학개혁 은 대통령 공약 중에서도 몇 번이고 강조했던 노 대통령의 숙원 사 업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헌 헌법에는 세금이 들 어간 곳은 세금이 원래의 목적으로 잘 쓰였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조항 이 신설되어 있었다.
감사의 방법은 법률에 따른다고 되어 있었는데, 아직 해당 법률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현재까지 는 정부 조직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항을 바탕으로 과거엔 국정 감사의 무풍지대였던 국정원 같은 조직도 감사를 받게 되었다.
과거에도 일부 비공개 감사를 받 긴 했는데, 정밀도의 차원이 완전 히 달라진 것이다.
간단한 예로 현금으로 따박따박 나오는 특수 활동비는 어디에 썼다 고만 말하면 끝이었는데, 지금은 서류를 남겨야 했다.
국정원처럼 세금이 대량으로 지 원되는데, 감사의 무풍지대가 있으 니, 바로 사학재단이었다. 교육 예 산은 매년 엄청난 비율로 증가하고 있었는데, 교육 서비스의 질은 그 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범인은 사학재단이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학재단 학 교들이 있는데, 대부분 교육 예산 지원이 없으면 운영이 불가능할 정 도였다.
학교를 거느리고 있는 사학재단 에서 학교에 내야 할 납부금을 제 대로 내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푼도 내지 않는 사학재단도 많았고, 오히려 이런저런 핑계로 학교의 재산을 빼돌리는 경우도 다 반사였다.
노 대통령의 사학개혁은 이러한 사학재단 이사회에, 정부 예산만큼 외부 인사를 추가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사회라는 건 예산 처리부터 사 학재단 구성원의 임면권도 행사하 는 만큼, 헌법 정신을 충실히 반영 할 수 있었다.
더욱이 한 명 정도만 꼽는 게 아 니라, 학교 예산 중 세금이 차지하 는 비율만큼 이사회 임원의 숫자를 늘리도록 할 예정이었다. 비리 사 학의 경우 재단 납입금은 0원에 가 까우니 말이다.
"조언 고맙습니다."
노 대통령의 사의에 유재원은 고 개를 꾸벅 숙이면서도 표정을 파악 하기 위해 애썼다.
진심 어린 조언이었는데 대충 넘 기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고맙 다는 건지 알고 싶었다.
아쉽게도 노 대통령 역시 잔뼈가 굵은 정치인이었기에, 표정으로 뭔 가가 드러나진 않았다.
"네,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 다면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유재원이 할 일은 다 했다.
이제는 과거와 얼마나 달라질지 지켜보면 될 일이다. 다만 기대감 은 약간 있었다. 적어도 통일국민 당과의 연정이 걸려 있으니 과거처 럼 가벼운 언사나, 행동은 덜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대신 유재원이 보는 중요한 이벤 트는 있었다.
바로 검사와의 대화였다. 검사들 이 얼마나 안하무인인 존재들인지 처음으로 대중 앞에 밝혀진 사건이 었지만,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의 권위만 훼손된 사건이었다.
검찰청이란 조직과 검사라는 인 간들은 시대적 사명이니, 명분이니 하는 것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아니 라, 오직 본인이 속한 조직의 논리 와 이해관계로만 움직이는 자들이 었다.
이들을 다루는 가장 확실한 방법 은 토론이 아니라, 입법을 통한 제 약과 인사권을 행사하는 것이었으 니, 노 대통령은 접근부터가 틀렸 다.
유재원은 검사와의 대화 이벤트가 삭제된다면 노 대통령이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였다고 볼 생각이었 고, 아니라면 실망하는 걸 넘어서 기대감 자체를 내려놓을 작정이었 다.
청와대를 나선 유재원은 바로 출 국길에 오르진 않았다.
노 대통령과의 독대라는 가장 중 요한 일을 끝내긴 했지만, 유재원의 일이 모두 끝난 건 아니었다.
ID 그룹을 위한 비즈니스는 이제 부터가 시작이었다.
약속 장소는 서울 힐튼 호텔이었 다.
유재원이 힐튼 호텔의 로비에 도 착하기 몇 분 전부터 호텔의 직원 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일렬로 도열해 있다가 유재원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정작 인사를 받은 유재 원은 응? 하는 표정이었다.
차 안에서 호텔 직원들이 줄 서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만 해도 다 른 높으신 양반을 기다리고 있나 보다 생각했으니 말이다.
"유 회장님, 방문을 환영합니다!"
호텔 직원들이 한목소리로 말하 는 걸 듣고서야 본인의 환영을 위 해 도열해 있었다는 걸 인지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