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권 19화
"회장님!"
헬리포트 밖에서 리사 수 박사가 헬기에서 내리는 유재원을 격하게 반겼다.
리사 수 박사뿐만이 아니라 이종 효 교수를 비롯한 반도체팀 대부분 이 나와서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었 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이 오너이 기도 했지만, 오늘 유재원이 대전 공장을 찾은 것은 바로 반도체팀의 애로 사항을 해결해 주기 위함이었 다.
현재 반도체팀에게 주어진 임무 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과중했다.
차기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 탑 재될 M4A1 프로세서의 개발과 양 산, 안드로이드 호환 스마트폰 제 조에 뛰어든 업체들로부터 받은 물 량의 생산, 100나노미터 신공정 개 발 등등.
전체 인원이 100명도 안 되는 연구팀이 이 많은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는 게 알려진다면, 전 세계에 서 웨이퍼로 밥 퍼먹는 반도체 업 체들은 경악하다 못해 믿지 못할것이다.
그게 가능한 건 리사 수 박사와 이종효 교수를 비롯한 반도체팀 하 나하나가 세계구급의 인재였기 때 문이다.
흔히 하는 말로 1억분의 1의 천 재라고 해야 할까.
덕분에 어마어마한 과제들이 주 어진 반도체팀이었기에, 유재원이 반나절짜리 스케줄로만 잡을 수 있 었다.
무엇보다 유재원이 주축으로 만 든 120나노 공정의 퍼텐셜도 대단했다. 특히 120나노 공정에 대한 ID 일렉트로닉스의 이해도는 다른 업체와 차원을 달리했다.
이로 인해서 다른 반도체 업체들 도 오픈 라이선스 정책 덕에 120나 노 공정을 쓰고 있음에도, 생산되 는 칩의 퀄리티가 확실히 달라질 정도였다.
단적으로 동일 공정에서 생산된 칩 중에 가장 높은 작동 속도와 가 장 우수한 전력 효율을 보여주는 건 M4였다.
ID 일렉트로닉스는 120나노 공
정을 만든 기업답게 120나노 공정 에서의 최적화 노하우가 최고였다. 작동 속도와 전력 소모량 등등에서 다른 업체들의 결과물을 압도했으 니 말이다.
여기에 오늘 유재원은 90나노 공 정에 대한 노하우도 전달할 예정이 었다.
물론 리사 수 박사의 연구팀은 120나노 공정을 완성한 다음 날부 터 90나노 공정 연구를 시작하고 있었다.
벌써 몇 년은 된 연구였고, 진척도 많이 보였지만 풀지 못한 난제 도 있었다.
당연히 리사 수 박사팀이 부딪힌 난제를 해결할 방법을 유재원은 알 고 있었다. 리사 수 박사 역시 그 걸 해결해 주려고 유재원이 내려온 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나 격한 환영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유재원은 마음만 먹으면 한 참 전에 90나노 공정을 완성하고도 남았다.
그렇지만 미래 지식을 너무 함부 로 풀었다간 괜한 의심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적당한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 몸을 너무 사렸네.'
연구팀의 격한 환영에 유재원은 살짝 자책했다.
리사 수 박사나 이종효 교수나 반도체팀 연구원 모두 유재원을 두 고 규격 외의 천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특정 분야 한정이 아니라 올라운드 천재라고 말이다.
언제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 랐다며 능청스럽게 미래 기술을 보 여주더라도 '유재원이니까.'라고 생각하며 납득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 었다.
유재원은 리사 수 박사팀에게 이 끌려 바로 연구소로 직행했다. 공 장장과의 면담으로 공장의 현황에 대해 보고 받는 건 일단 뒤로 미뤄 야 했을 만큼 열성적이었다.
"어서, 선물 보따리를 풀어 주세 요!"
"선물이요?"
유재원은 딴청을 피우려다가 지 위 고하를 막론하고 다크서클이 짙 게 내려온 반도체팀의 얼굴을 보고는 순순히 서류 가방의 잠금을 풀 어 USB 메모리 스틱을 꺼냈다.
"300mm 웨이퍼에서의 수율 문 제를 깔끔하게 해결할 해결책, 그 리고 차세대 60나노 공정의 주요 기술에 대한 레퍼런스입니다. 60나 노 공정의 핵심은 포토레지스트 광 원 안정화에 불화아르곤을 이용하 는 것인데……
우와아!
마치 가방 속에서 전설의 엑스칼 리버라도 나온 것처럼 크나큰 함성 이 터졌다.
동시에 유재원에게 쏠린 관심은 단번에 USB 메모리로 넘어가면서 순식간에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만 유재원은 너그러운 마음 으로 이해했다.
그렇기에 자리를 뜨지도 않았다.
기술 문서를 보다가 이해하지 못 하는 부분이 나오면 친절한 설명도 보태 주려고 말이다.
반도체팀의 열정은 곧 ID 그룹과 유재원을 위한 결과로 나타나니 말 이다.
"자, 그러면 공항으로 갈까요."
"예! 미국으로 비행 준비는 이미 끝난 상태입니다."
예정보다 더 긴 시간, 반나절 이 상을 대전 공장에 머물렀던 유재원 은 출국만 남은 상황이었다.
부모님, 최강욱 부회장, 황재홍 사장, 김광일 이사 등등, 지인들과 는 어제 모두 회포를 풀었기에 김대석 비서실장은 바로 움직이려고 했다.
띵
그때, 유재원의 스마트폰에 알람 이 울렸다. 티파니의 전화였다. 김 대석은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그림자 같은 비서라도 사적인 대 화는 피해 주는 게 당연했으니 말 이다. 그렇지만 통화는 길지 않았 다.
더욱이 유재원의 입에서 나온 말 도 전혀 예상 밖이었다.
"우리, 러시아 이르쿠츠크로 가 야 합니다."
" 네?"
유재원과 오랫동안 발을 맞춰 왔 던 김대석이었다. 그런데 유재원이 이렇게 당일 스케줄을 바꾼 건 엄 청나게 이례적이었다.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러시아라니!
물론 유재원에겐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조금 전 티파니의 전화는 그녀의 외할아버지 프레더릭 테일러 2세의 말을 전한 것이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이르쿠츠크로 오라는 말이었다.
이르쿠츠크, 그곳에는 티파니에 게 검은 황금의 여왕이란 별명을 만들어 준 초대형 유전이 터진 곳 이었다.
아무래도 프레더릭이 뭔가 중대 한 결심을 하신 모양이다.
얼어붙은 땅, 시베리아에도 봄은 찾아왔다.
자연의 신비한 섭리겠지만, 프레 더릭의 눈에는 눈과 얼음을 뚫고 피어난 저 노란 불꽃이 이곳에 봄 을 만들어 준 것 같이 느껴졌다.
세계 최대의 담수 호수 바이칼의 서쪽에 자리한 조그만 도시 이르쿠 츠크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진 지역이 바로 셰브롱에서 대박을 터 트린 유전이 자리한 곳이었다.
높이 자라난 침엽수의 수림이 있 고, 그 아래로는 영구 동토층이 있 으며, 다시 그 아래로 암석지대가 있는 수백 M의 지하를 뚫고 내려 가자 천연가스와 원유가 쏟아져 나 왔다.
그 증거가 바로 저 노란 불꽃이 었다.
유정으로부터 뿜어지는 압력이 어찌나 거센지 채굴탑에서 뿜어지 는 불꽃의 길이는 10m에 달할 정 도였다.
밤이 되어도 주변을 환하게 밝힐 정도로 강했으니, 그 밑에 자리한 유정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했 다.
프레더릭의 눈이 몇 분째 고정되 어 있는 지점도 그 불꽃이었다.
"이번이 3번째인가?"
눈은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프레더릭의 머릿속에는 텍사스의 유정과 셰일 가스?오일을 채굴하고 있는 그림들도 동시에 떠오르고 있 었다.
모두 티파니가 셰브롱에 들어오 고 나서 일으킨 기적이었다. 여기 시베리아 이르쿠츠크까지 포함한다 면 기적의 숫자는 무려 3번이었다.
3이라는 숫자는 프레더릭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아주 오래전 프레더릭이 셰브롱의 오너가 될 시 험을 치를 때의 키워드가 바로 3이 었으니 말이다.
"외할아버지! 또 여기 계셨어 요?"
프레더릭의 생각이 몇십 년 전의 과거로 향하려 할 때, 바로 뒤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손녀 티파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5월이 되어서야 최저 기온이 영 상으로 올라가는 시베리아였다. 반 면 티파니는 추위를 좀 타는 체질 이라 두꺼운 코트에 털모자까지 중 무장한 상태였다.
어떤 모습이든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외손녀인데 시베리아에 오고 나서는 더욱 귀여워졌다.
"오랜만이에요, 프레더릭."
그리고 그 옆에는 티파니를 빼앗 아간 유재원이 있었다.
유재원의 인사에 프레더릭은 고 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티파니를 빼앗아간 얄미운 녀석이지만, 그만 큼 능력이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프레더릭이 늙은 몸을 이끌고 거 친 이르쿠츠크에 오지 않을 수 없 게 만든 유전 발견도 분명 저 녀석 의 기술 덕이었다.
게다가 하루 전 급하게 얼굴 좀 보자고 했는데, 순식간에 날아온 것을 보면 완벽한 능력남이었다.
그렇기에 프레더릭이 평소라면 하지도 않을 고민까지도 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바로 후계 문제에 대해서 말이 다.
"티파니, 네 남편 좀 잠시 빌려 야겠구나."
"네, 대신 짧게 쓰고 돌려주세요! 먼 길 날아오느라 피곤할 테니까요!"
제 남편을 챙기는 티파니의 말에 또 섭섭해지는 프레더릭이다. 그래 도 어린 녀석들 앞에서 섭섭한 티 를 내지 않기 위해 몸을 휙 돌려 성큼 걸었다.
"난 괜찮아, 그럼 먼저 들어가 쉬고 있어."
유재원은 티파니를 숙소로 돌려 보내고, 프레더릭의 뒤를 따랐다.
다 늙으신 양반은 아직도 기력이 정정하신 듯, 티파니와 이야기를 나눈 그 몇 초 사이에 벌써 저만치 앞에 계셨다.
미국으로 돌아가려다가, 러시아 로 도착지를 바꾸는 건 큰일이었다.
과거에 러시아도 몇 번 다녀온 경험이 있던 터라 유재원 본인의 비자를 갱신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대신 경호원들의 비자와 무기 소 지 등등, 러시아 당국과 협의를 해 야 할 게 많았고, 미국에도 양해를 구해야 했다.
유재원은 미국에서도 초특급으로 관리를 받는 인재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와의 냉전이 끝난 건 오래전 이지만, 그래도 러시아는 믿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혹시나 러시아에서 유재원을 두 고 무슨 공작을 벌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재원을 나름 우수한 경호팀이 보호하고 있다지만, 국가 차원에서 작정하고 일을 벌이면 버티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미국에선 러시아행 을 만류했다.
하지만 유재원의 목적지가 러시 아의 심장부 모스크바도 아니었고, 셰브롱에서 유전을 터트린 이르쿠 츠크라는 걸 알고부터 무조건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르쿠츠크는 셰브롱이 유전 탐 사에 성공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 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장비들이 계속 투입되었고, 인 력도 보강 중이었다. 보강되는 인 력 중에는 셰브롱의 PMC도 있었 는데, 용병들이지만 정규군 수준이 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더욱이 이르쿠츠크에는 셰브롱의 오너인 프레더릭도 있었으니, 경비 수준은 한층 강화된 상태였다.
미국에서는 러시아로 가는 유재 원의 전용기에 경호원들을 보강하 는 것으로 어렵사리 허가를 해 주 었다. 물론 그 경호원들은 말이 경 호원들이지 CIA의 현장 요원이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그렇게 단숨에 러시아로 날아온 유재원은 곧장 이르쿠츠크에 왔고, 티파니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레더릭이 기다리고 있 다는 말에, 회포를 풀 시간도 없이 곧장 현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셰브롱의 역사는 120년이 넘지."
프레더릭은 노란 불꽃을 피워 올리는 채굴기가 있는 곳에서 현장 소장이 더 이상 접근하면 위험하다 며 기겁하는 곳까지 다가온 후에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선조께서 1879년 창업하셨 으니, 정확하게는 124년 되었지. 이 정도라면 셰브롱이 하루하루 나아 간 길은 곧 역사라고 해도 무리가 없어. 그런데 말이야, 티파니처럼 짧은 기간 동안 3번이나 연속된 성 공은 처음이야. 특히 이곳 이르쿠 츠크와 같은 대형 유전을 단독으로 찾아낸 건 서부 개척 시기 이후로 처음이로군."
" 역사라."
하긴, 124년이나 된 기업이니 그 긴 기록을 다 모아 둔다면 역사라 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르쿠츠크 유전에 대한 브리핑 은 들었나?"
유재원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프레더릭을 만 난 것이니 제대로 된 정보는 없었 다. 물론 유재원에겐 정보가 주어 지지 않더라도 문제없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