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권 1화
유재원의 말에 영식이는 바로 프 로젝터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연결해 PPT 파일을 띄웠다.
영식이가 사용하는 건 최신 S3였 고, S3에 추가된 기능 중 하나가 마이크로 USB 단자를 통한 비디오 신호 출력 기능이었다.
유재원은 마이너 업그레이드판이 라고 S3를 평가했지만, 디테일하게 들어가 보면 비디오 신호 출력처럼 ID 테크놀로지의 우수한 개발진이 추가한 기능이 제법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한 지 3분쯤지났을 때.
유재원은 영식이가 구상한 안티 피싱에 대해 바로 이해할 수 있었 다.
디지털 무선 통신의 경우에는 유 선 전화와 다르게 발신자 번호가 표시된다.
이를 통해 보이스 피싱을 하는 전화번호를 등록해서, 이 전화번호 로 전화가 오면 보이스 피싱이라는 경고를 큼지막하게 띄워 주는 것이 었다.
"등록은 누가 하는 거야?"
"일단은 최초 등록은 내가 해야 지. 그런데 장사가 잘 안 되는 번 호는 보이스 피싱에서 교체할 테니 까, 내가 일일이 등록하지 못한 번 호에 대해서는 유저들끼리 업데이 트하도록 만들 생각이야."
회귀 전 범람했던 보이스 피싱에 맞서 등장한 게 스팸 번호 차단 앱 이었다. 작동 방식도 영식이가 설 명한 것과 같았다.
업체에서 번호를 업데이트하기도 했지만, 이보다 더 큰 효과를 거둔 건 보이스 피싱 전화를 받은 이용자들의 참여였다.
아무리 앱을 만든 업체에서 열심 히 관리를 한다더라도, 사용자들이 만드는 빅데이터만큼 효과적이진 못하다.
"좋은데?"
" 진짜?"
"응!"
보이스 피싱 업자들의 전화번호 데이터베이스를 유저들의 참여로 구축하겠다는 건 상당히 진보된 생 각이었다.
"그런데 혼자 만들 수 있겠어?"
"도와주겠다는 팀원들이 좀 있 어. 일단 팀원들이랑 같이 해 보다 가, 막히는 게 있으면 도움을 청할 게."
하긴 기술적으로 엄청나게 어려 운 알고리즘을 쓰는 앱은 아니다.
유저들의 참여율이 관건인데, 보 이스 피싱에 당한 사람이 많다면 자발적인 참여자들이 꽤나 생길 것 이다.
"그리고!"
안티 피싱 앱 제작의 허락을 받 은 영식이지만, 아직 용무가 남아 있었다.
"지금 한국에서 진행 중인 개인 정보 유출 집단 소송에도 적극 참 여할 생각인데…… 괜찮지?"
지금 진행 중인 개인 정보 유출 집단 소송이면 한 건뿐이다. 바로 KT의 포털 사이트인 파란에 대한 소송이었다.
영식이의 개인 정보도 파란에서 유출된 게 확실했다.
파란에 가입하며 인적 사항을 기록할 때 ID 테크놀로지 네트워크 매니저라는 직책을 넣었었단다.
슈프림 네트워크 매니저로 승진 한 지가 한참 전인데, 며칠 전 걸 려 온 보이스 피싱에서 그 직책을 제대로 말했다고 한다.
게다가 연락처도 본인의 미국 휴 대전화 번호 대신, 한국의 집 전화 번호만 입력했던 영식이었다.
파란은 한국의 포털 사이트였으 니, 미국 전화번호를 넣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이스 피싱 업자의 전화는 집으로 향한 것이었고, 그로 인해 영식이의 어 머님이 깜짝 놀랐다.
"당연히 그래야지. 변호사가 테 크니컬한 부분까지 잘 알지는 못할 테니, 네가 확실히 도와 드려. 만약 권위가 필요하다면 내 이름이나 ID 그룹 이름을 써도 좋아."
유재원은 통 크게 집단 소송 참 여도 허락했다.
개인 정보 보호법이 만들어진 지 도 10년은 지난 거 같은데, 개인 정보 유출로 크게 처벌을 받은 경 우가 없어서 업체들의 보안 의식이 점점 느슨해지고 있다는 걸 느끼던 참이었다. 파란이란 포털 사이트의 사고도 결국 따지고 보면, 보안 의 식 미비였다.
이번 집단 소송으로 업체에 경각 심을 확실히 심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좋은 일이다. 물론 업체에 경각심을 심어 주려면 재판 에서 압도적으로 이기는 게 먼저다.
"고마워! 그럼 바로 시작할게!"
유재원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영 식이는 바로 일을 시작할 생각에 상기된 얼굴로 사무실을 뛰쳐 나갔다.
"역시, 영식이야."
국민학교 때부터 함께했던 영식 이는, 뭐 하나 꽂히는 게 있으면 무서우리만큼 빠져들었다. 국민학교 때는 컴퓨터였고, 중학교 때는 네 트워크였다.
"이번엔 보이스 피싱에 꽂혔나 보네."
업자들의 명복을 비는 유재원이 다. 덤으로 고소장을 받은 포털 사 이트 관계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안티 피싱 앱은 유재원도 놓치고 있던 부분이었는데, 영식이네 집이 보이스 피싱을 당하는 바람에 딱 좋은 타이밍에 등장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지."
폭풍처럼 사라진 영식이의 뒷모 습을 잠깐 지켜본 유재원은 다시 본업으로 돌아갔다. IDDC 2003의 화려한 피날레 준비였다.
엑스박스의 차기작 발표였다.
이미 이틀 전 판타지 유니버스-레전드 리그의 발표로 게임 업계의 판도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PC 게임 시장에서는 MMORPG 가 대세였다. 세계적으로 월드 오 브 워크래프트와 혈맹2가 백만 단 위의 동시 접속자 숫자를 자랑하며 압도적인 화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MMORPG 다음으로 인기인 게 임은 FPS 장르였다.
둠3는 클래식처럼 되었고, 온라 인 FPS 전용인 카운터 스트라이크 와 서든어택, 크로스파이어와 같은 게임이 지분을 나눠 갖고 있었다.
이처럼 탄탄한 점유율을 가진 게 임들이 지배하고 있는 온라인 게임계에서 신작은 도저히 비집고 들어 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특히 생소 한 장르의 게임은 뚫기가 어려웠다.
판타지 유니버스-레전드 리그는 철옹성 같았던 온라인 게임 순위를 한 번에 뚫어냈다.
발표 직후, 한국 PC방 게임 점유 율에서 1위를 찍는 기염을 토한 것 이다. 다음 날에는 월드 오브 워크 래프트의 정식 확장팩 불타는 성전 이 발표되면서 2등으로 내려서긴 했지만, 그래도 한순간 반짝했다가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저력을 발휘했다.
심지어 레전드 리그는 프리 시즌 으로 빠른 매치만 가능한데도 발휘 한 성적이었다.
프리 시즌이란 정식 랭킹전이 시 작되기 전, 게이머들이 게임에 익 숙해질 시간을 주는 기간이었다.
AOS 게임의 진짜 재미는 바로 랭킹전에서 나오는 것인데, 시작과 함께 랭킹전을 열어 버리면 게이머 사이에 실력이 확 갈려 나갈 것이 분명했기에, 오픈 후 100일까지는 프리 시즌 기간을 두었다.
이후 랭킹전이 시작되면 배치 고 사라는 경쟁전을 치른 후, 본인의 실력에 맞는 랭킹이 주어지고, 거 기서부터 상위 랭크로의 끝없는 투 쟁을 시작하게 된다.
게이머들은 무섭게 레전드 리그 에 빠져들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AOS 게임 중에 최고의 완성도와 퀄리티 를 보장하는 게임이었으니 말이다.
단적으로 등장하는 히어로들은 모두 탄탄한 팬층과 인지도를 가지 고 있었다. 정식 릴리즈와 함께 오리지널 캐릭터들도 공개되었지만, 탁월한 일러스트에 매력적인 스토 리, 정교한 스킬까지 보유해서 원 작이 있는 히어로들에게 밀리지 않 았다.
판타지 유니버스-레전드 리그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첫 번째 확장팩 불타는 성전이란 원투 펀치 는 게임계를 초토화시킬 만큼 막강 했다.
더욱이 약간의 틈도 놓치지 않도 록 ID 엔터테인먼트 산하 게임 개 발사들은 스포츠 게임과 FPS 게임들을 출시했다.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는 게 엑스 박스2 였다.
리얼카메라에서 차세대 비디오 게임기를 만들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게이머들의 기대감을 한껏 치솟게 했다면, 오늘은 루머가 오 피셜이 되도록 방점을 찍을 작정이 다.
"마음 같아선 오늘 실물을 멋지 게 발표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안타깝게도 오늘 발표되는 건 엑 스박스2의 정식 발매일과 디자인정도였다.
게임기 개발이라는 게 하루아침 에 뚝딱 이뤄지는 게 아니었던 탓 이다. 물론 유재원이 큰 결심을 한 다면 못 할 이유는 없다.
엑스박스는 PC 기반의 게임기였 기에, 최신의 CPU와 GPU를 빌려 와서 ID 테크놀로지의 기술력을 통 해 전용 보드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단지 후폭풍이 문제일 따름이다.
양산 비용은 둘째로 놓더라도, 엑스박스2에서 구동할 게임이 지금은 없었다. 차세대 게임기라면 당 연히 차세대다운 그래픽 퀄리티를 선사해 줘야 할 게 아닌가.
문제는 눈이 절로 뜨일 만큼 압 도적인 그래픽을 뿜어내려면 거대 한 제작비는 물론이고, 많은 시간 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퍼스트 파티를 비롯한 서드 파티 개발사에 엑스박스2에 대한 스펙과 개발킷은 보내진 상태였고, 내년 출시를 예정하고서 열심히 만 들고 있었다.
이번엔 게임기의 스펙과 디자인 그리고 차세대 게임기에 맞춰 나올 게임들의 티저 영상들만 보여줘도 충분하다는 게 유재원의 판단이었 다.
"자, 그럼 가 볼까."
직접 점검을 마친 유재원은 자리 에서 일어났다.
화려한 축제의 마침표를 찍을 시 간이다. 전장으로 향하는 유재원은 무기도 챙겨 들었다.
어제 항공 배송으로 날아온 아주 귀한 아이템이 담긴 상자였다.
다음날!
IDDC 2003을 성공리에 끝내고 서 일상으로 돌아온 유재원은 오랜 만에 서재로 출근해서 컴퓨터로 기 사를 보는 중이었다.
-IDDC 2003의 화려한 피날레! 엑스박스2!
-유재원 회장, 차세대 게임기 전 쟁 시작 선언!
-커스텀 헥사코어 CPU와 차세 대 GPU의 결합, 4GB 기본 메모리 용량!
-Full-HD 환경 완벽 지원 목표!
-네트워크 기능 강화!
-유일한 단점은 광학미디어, 기 존 DVD 유지키로.
타워형 케이스에 유려한 곡선이 들어간 엑스박스2의 기사들이 유재 원의 시네마 디스플레이에 가득 띄 워져 있었다.
엑스박스2에 대한 기사가 IT나
게임 전문 잡지의 헤드라인을 장식 했다. 일반 신문에서도 엑스박스2 를 다루긴 했지만, 전문 매체에 비 해 비중은 약했다.
아무래도 게임이라는 건 관심을 보이는 특정 계층이 있는 분야였던 탓이다.
대신 게임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 에서는 엑스박스2 관련 기사들이 가득했다.
특히 가장 큰 클릭 수를 자랑하 는 건 바로 이것이었다.
-커스텀 가능한 케이스! IDDC
2003에서 선보인 나전 칠기 에디션 도 가능!
커스텀 케이스!
어제 유재원이 선보인 비장의 무 기가 바로 엑스박스2의 목업 모델 이었다. 그중에서도 게이머들의 시 선을 한눈에 잡아끈 것은 나전 칠 기 에디션이었다.
평범한 플라스틱 모델도 함께 공 개되었지만, 나전 칠기의 화려한 모습에 게이머는 물론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까지도 빼앗길 수밖 에 없었다.
독특한 검은색 광택을 자랑하는 옻칠에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전 복 자개로 수놓아진 엑스박스2의 로고는 그야말로 예술 작품이나 다 름이 없었다.
중동이나 유럽에서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이나 아이폰에 황금을 씌 우고 다이아몬드를 박아서 비싸게 파는 럭셔리 에디션이 종종 나오긴 했지만, 그건 귀금속 가격 덕에 비 싼 것이지 예술적 가치는 거의 0에 가까웠다.
반면 유재원이 선보인 나전 칠기 에디션은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엑스박스 홈페이지에는 나전 칠 기 에디션에 대해서 언제 예약을 시작하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물어 보는 문의가 수백 건이 올라왔을 정도다.
띵
" 호오?"
그간 밀린 인터넷 트렌드를 따라 잡기 위해 커뮤니티를 서핑하던 유 재원에게 알람이 울렸다. ID톡이나 문자 메시지 알람이 아니라, 이메 일이 왔다는 알람이었다.
-어제 쇼케이스 잘 봤습니다. 역 시 유 회장님다우신 발표였습니다. 나전 칠기 에디션도 놀라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만큼, 차세대 게임기에서도 승리자는 소니일 것입니다.
발신인은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 먼트의 쿠타라니 켄 사장이었다.
플레이스테이션1 시절만 해도 ID 톡으로 종종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였는데, 플레이스테이션2에서 안드 로이드 운영체제를 버림으로써 대 립각이 섰고, ID 그룹에서 엑스박스를 내놓으면서 완전히 갈라섰다.
이제는 소니도 플레이스테이션3 를 엑스박스2 런칭에 맞춰 내겠다 는 의지가 듬뿍 담긴 도발성 이메 일을 보내는 사이가 되었다.
-네! 이번엔 지지 않을 겁니다. 전력으로 붙어 봅시다.
그냥 이메일 화면을 닫을까 하다 가 유재원은 짧게 답신을 보내고 말았다.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는 건 본인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띵
두 번째 알람이 울렸다.
다행히도 쿠타라니 켄으로부터 바로 재답신이 온 건 아니었다. 김 대석 비서실장의 ID톡이었다.
유재원이 티파니의 승진을 기념 하기 위해 준비한 선물이 도착했다 는 ID톡이었다.
티파니의 승진을 기념하기 위해 유재원이 고른 선물은 쉽게 구할 수 없는 롤스로이스사의 최신 모델 팬텀이 었다.
BMW에 인수되었던 롤스로이스 가 부활의 신호탄으로 준비한 신형 팬텀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만 큼 인기였다.
티파니가 출퇴근시에 자동차를 자주 이용하는데, 이제 셰브롱의 임원도 되었으니 크고 편안하고 안 전한 자동차가 필요할 것 같아 선 택했다. 예약도 없이 급하게 구한 건데, 다행히 물건이 있었다.
IDDC 2003도 성공리에 마무리 했고, 선물도 잘 준비했으니 2003 년의 8월은 그야말로 최고의 달이라 할수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건 아니었다.
마무리까지 완벽했으면 좋았을 텐데, 옥의 티처럼 짜증나는 일이 바다 건너에서 일어났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뉴스였다. 그것도 하필이면 8 월 15일 광복절 아침에 들려온 소 식이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