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권 23화
"ID 그룹이라고만 나와서 배치가 보류된 줄 알았지 뭡니까!"
차 안에서 홍범수가 목소리를 높 였다.
"아, 이름 때문에 크게 오해하셨 군요. 음, 언뜻 보면 그럴 수도 있 겠네요. "
김대석은 홍범수의 오해에도 웃 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룹 구조도를 보면 쉽게 풀리 는 건데 말이죠."
홍범수는 계열사 전체를 묶어 ID 그룹이란 카테고리로 생각했던 것 이었지만, 실제로는 ID 그룹이라는 지주 회사를 의미했다.
한국의 재벌들과 달리 엄청나게 깔끔한 지배 구조를 완성한 ID 그 룹이었다. 유재원은 계열사가 상장 하게 되면 경영권을 행사할 지분을 지주 회사인 ID 그룹에 현물로 냈 다.
안드로이드사부터 시작해 테크놀 로지까지.
"그럼 ID 그룹 지주 회사가 세계 에서 제일 큰 비상장 기업이겠네요."
"음, 그렇죠."
이번에도 자부심 넘치는 김대석 의 답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상장 기업 중 나름 덩치가 크다고 알려진 게 캘 로그 같은 곡식 기업이고, 아니면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 기업 인 아람코가 있었다.
캘로그의 주가를 따져 보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아람코는 유전의 가치만 따지면 비교적 쉽게 기업 가치가 나온다.
그런데 이보다 더 쉬운 게 지주회사인 ID 그룹 가치의 계산이었 다.
상장된 회사들의 지분을 51%씩 가지고 있으니, 계열사들의 주가 총액의 반씩만 더하면 끝이다. 홍 범수가 머릿속으로 어림잡아 계산 해 봐도 수천억 달러가 쉽게 찍혔 다.
"지주 회사인 ID 그룹은 단순히 페이퍼로만 존재하는 회사가 아닙 니다. 실제 경영권을 행사하고 이 를 지원하기 위한 조직들이 있습니 다. 비서실, 감사실, 전략기획실, 경호실 등등. 홍범수 씨는 앞으로 비 서실에서 인턴 생활을 하게 될 겁 니다."
이어진 김대석의 설명에 비로소 본인이 받은 ID톡 메시지가 이해되 는 홍범수였다.
얼마 전 ID톡을 받았을 때만 해 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속이 쓰렸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 냐는 듯 설렘으로 가득해졌다.
그러다가 샌프란시스코의 명물 금문교를 넘어서 해안가의 저택에 가까워져 오자 긴장감이 높아졌다.
인턴 MT를 시작할 때 실물을 처음 보긴 했던 유재원 회장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대강당에 동기들과 함께 있었지만, 지금은 아예 대면 하러 가는 것이니 또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는 사이 빨간색 페라리는 12 기통의 성능을 유감없이 보이면서 절벽을 타고 올라갔고, 저택에 순 식간에 도착했다.
저택에 입성하고 나서도 몇 가지 까다로운 보안 절차를 거치고서야, 서재라는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1 시간.
홍범수가 유재원과 만난 시간이 었다.
예정은 20분이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면담 시간 이 길어졌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마치 인생에서 1시간이 삭제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30대 후반으로 사회생활을 웬만큼 해 봤던 홍범수였지만, 유재원 회장과의 미팅은 완전히 새로운 느 낌이 었다.
기억나는 대목은 몇 가지 있었다.
-엄청나게 특이한 이력이라 눈길 이 절로 갔어요.
-군필이라는 것도 특별하고요.
-사회생활을 하다가 다시 학생으 로 돌아오는 것도 아무나 못 할 일 이죠.
비서실 인턴으로 홍범수를 선택 한 건 유재원 회장 본인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껏 나이가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 나이와 경험이 도움이 되다니.
특히 홍범수는 본인이 일성 출신 이라고 중용되진 못할 거라는 걱정 도 있었다. ID 그룹과 일성의 대립 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직접 만나 본 유재 원 회장은 그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기대가 크지만, 그렇다고 무리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몇 가지 원칙과 함께 기본만 해주시면 충분히 정직원이 될 수 있 을 거예요.
- 인턴이 니까요.
어쩜 그리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나 잘 읽는지 모를 정도다.
비서실이라는 소리에 의욕이 100 배, 부담감도 100배가 늘어난 홍범 수였다. 진짜 잘해야지 하고 마음 을 먹고 있었던 홍범수에게 그야말 로 적절한 조언이었다.
무엇보다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 를 하는 자세에서 품격이 보였다.
사회 경험이 많은 홍범수였다. 그런 과거 기억 중엔 재벌과 만난 기억도 있었다. 과거 일성SDS에서 일할 때, 일성 그룹의 로열패밀리 를 한 번 보았었다. 짧은 시간이었 지만, 그다지 유쾌한 기억은 아니 었다.
외부에는 그야말로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만들고 있었지 만, 내부 사람들 그러니까 일성으 로부터 월급을 받는 사람들에겐 가 차 없었으니 말이다.
다신 그런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할까.
덕진공대가 개교한 다음 신입생 을 모집한다는 소리에 냉큼 수능을 다시 보고 지원할 정도로 싫었다.
"자, 여기가 앞으로 홍범수 씨가 근무할 비서실입니다."
홍범수가 잠깐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에 김대석이 몰던 페라리는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금문교 북쪽 의 번화가인 소살리토의 고풍스러 운 3층 건물이었다.
김대석은 유재원의 저택으로 출 근하지만, 비서실은 저택과 가까운소살리토에 위치한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ID 테크놀로지 본사에서 셋방살이를 했었는데, 회 장님께서 비서실의 규모를 늘리라 고 지시하면서 이곳으로 옮기게 되 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만을 배경으로 부둣 가가 형성된 소살리토는 부유하고 예술적인 거주 구역이었고, 해변가 로는 관광지였기에 비즈니스 빌딩 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재원의 저택이 근처 에 있었고, 돈 걱정 없는 ID 그룹이었기에 건물 하나를 사서 비서실 로 쓰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저택에 출입할 때와 마찬가지로 얼굴 확인과 스마트폰 봉인 등의 몇 단계의 보안 절차를 거치고 나 서야 홍범수는 사무실에 들어올 수 있었다.
"아 참, 사무실 안에서는 기본 언어가 영어입니다. 한국 쪽 업무 를 볼 때는 한국어를 쓰지만, 나머 지 모든 업무나 직원들끼리 대화를 할 땐 영어를 쓰도록 하세요."
영어 수준이 어떻게 되느냐 따위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애초에 영어 능력이 부족하면 전 공과목이 모두 영어로만 진행되는 덕진공대에서 졸업을 할 수가 없었 으니 말이다.
"네! 문제없습니다!"
홍범수도 제일 고생했던 게 영어 였다. 그나마 피나는 노력으로 일 상 회화는 물론 학교 수업까지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니 유급 한 번 없이 졸업할 수 있었던 것 아니 겠는가.
"다들 모이세요."
김대석 비서실장은 홍범수를 데 리고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사람 들을 불러모았다. 그러자 1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다. 딱 봐 도 한국인이구나 싶은 이들은 4명 에 불과했다. 나머지 8명은 외국인 이었고, 인종도 다양했다.
어째서 영어로 대화해야 한다는 것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홍범수 인턴입니다. 어제 예고 했던 것처럼 앞으로 1년간 여러분 과 함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곧이어 홍범수에게 자리를 양보 했다. 자기소개를 하라는 것으로 찰떡처럼 알아들은 홍범수는 이름 과 나이, 앞으로의 포부와 잘 부탁 한다는 말로 짧게 본인을 소개했다.
다들 박수로 맞이를 해 주는데, 울상인 사람이 있었다.
비서실의 막내였던 박현아였다.
막내가 들어온다고 좋아했던 박 현아는 본인보다 무려 15살이나 많 은 후배의 등장에 그야말로 울상이 었다.
"박현아 씨, 홍범수 인턴에게 아 이디 카드와 계좌 등록 등 신입 등 록 절차를 진행해 주세요. 업무에 필요한 정보도 알려주시고요. 홍범 수 씨는 등록 절차가 끝나면 개인 정비를 보세요. 정상 업무는 내일 부터 할 테니까요."
김대석은 그런 박현아에게 홍범 수를 맡기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인턴인 홍범수를 데리고 회장님과 의 면담까지가 김대석이 할 일이라 면, 신입 등록 정도는 비서실 막내 인 박현아가 해도 충분한 일이었으 니 말이다.
박현아는 떨떠름한 표정이었지 만, 홍범수는 그런 박현아에게도 선배에 대한 예의를 확실히 갖췄다. 토종 한국인이긴 했지만, 나이 많 다고 무작정 대접해 주길 바라는 사람은 아니었다.
"여기가 홍범수 인턴님 자리예요."
그런 태도 덕에 박현아도 홍범수를 처음보다는 부드럽게 대했다.
"사무실이나 화장실 청소는 담당 직원분이 따로 계시니까 출근했다 고 쓸고 닦을 필요는 없어요. 본인 자리만 잘 정리하시면 돼요. 그러 니 다른 직원들 자리를 치울 필요 도 없고요."
예전 신입 시절 비서실 선배들에 게 잘 보이려고 일찍 출근해서 청 소도 하고, 책상 정리도 했다가 크 게 혼이 났던 박현아의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아, 그리고 회사 컴퓨터에 스마트폰이나 USB 메모리 칩 같은 거 연결하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애초 에 USB 포트 자체가 삭제된 상태 로 납품되지만, 혹시나 해서 드리 는 말이에요."
"네, MT에서도 열심히 배웠습니 다. 보안 철저!"
인턴 MT에서 배운 ID 그룹의 기업 문화 중 제일 강조되는 게 바 로 보안 의식이었다. 프로젝트가 실패하더라도 재도전의 기회는 곧 생겨나지만, 보안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즉각 조치된다고 했다.
실제로 MT 중에 경각심을 일깨 우는 사건도 있었다. ID 하이테크 연구소 견학을 마치고 일어난 사건 이었다. 입장 전 다들 스마트폰의 렌즈를 가리는 보안 스티커를 붙였 는데, 견학을 마치고 나서 보니 스 티커가 훼손된 사람이 나와 버렸다.
당사자는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 폰이 움직인 탓에 스티커가 훼손되 었다고 변명했지만, 스마트폰 안에 서 하이테크 연구소 안을 찍은 사 진이 나오면서 거짓말이 드러났다. 처분은 즉각적이었다. 그 길로 한 국으로 귀환 조치되었고, 감사실의 집중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당연 히 인턴 연수는 끝이다.
"가장 궁금해하실 임금이나 사원 복지는 발급받으신 ID카드로 회사 전산망에 로그인하면 바로 공지가 뜰 거예요."
"아, 그렇군요."
"네, 민감한 개인 정보니까 다른 사람들 보여주지도 말고, 물어보지 도 마세요. 아마 부족하다고는 느 끼지 않을 거예요."
박현아의 말에 홍범수는 기대감 이 살짝 일어났다.
이미 결혼을 해서 자식까지 있는 홍범수였다. 일성 SDS 를 퇴사하며 받은 퇴직금도 이제 다 떨어져 갈 시점이었다. 임금은 중요 사안이었 다.
"회사의 모든 업무는 업무용 ID 톡 계정을 통해 이뤄져요. ID톡이나 회사 전산망으로 받은 지시만이 인 사 고과에 들어가고, 강제성도 있는 거예요. 직원들 사이에도 마찬가지 고요. 구두로 받는 지시도 나중에 ID톡으로 기록이 남아 있어야 인정 해 줘요. 만약 구두로 지시를 했는 데 ID톡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하면 가차 없이 신고하세요."
이는 유재원이 만든 ID 그룹 공 통의 수칙이었다.
임원이나 간부들이 부하 직원을 사적으로 부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 다. 또한, 다른 목적도 하나 내포하 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전산 업무는 인공지능 골드를 통해 모니터링 돼 요. 회장님 지시로 이뤄진 일인데, 모니터링을 통한 학습으로 업무 지 원 능력을 올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처음 회사 전산망에 접속하면 개인 정보 제공 동의를 체크하 는 것도 뜰 거예요. 그럼 궁금한 게 생기면 물어보세요. 제 자리는 저기니까요."
꼭 필요한 정보만을 확실히 전해 준 박현아였다.
"아, 그리고 이제 인턴 시작하시는 거니까,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 주어 지진 않을 거예요. 그럼 화이팅!"
"네! 고맙습니다."
홍범수의 나이 때문에 크게 실망 했던 박현아였지만 심성은 착한 사 람인지 응원도 해 주고는 본인 자리로 돌아갔다.
크고 널찍한 책상과 편안한 메쉬 의자 그리고 컴퓨터 한 대가 놓여 있는 그야말로 심플한 홍범수의 자 리였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앉은 홍범수 는 감격스러웠다. 4년간의 고생이 이제야 보상받는 느낌이라고 할까.
컴퓨터를 켜자 익숙한 안드로이 드 운영체제의 로그인 화면이 떴다. 거기에 조금 전 발급 받은 업무용 계정을 입력하자 웰컴이라는 메시 지와 함께 바탕 화면과 마우스 커서가 나타났다.
박현아의 말에 따라 바탕 화면의 그룹 업무 처리 프로그램 EPS를 실행하고, 다시 로그인을 하니 공 지 화면도 나타났다.
"헉!"
공지를 읽기 시작하던 홍범수는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인턴 월급이 5,500 달러로 찍혀 있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주거지원 비 명목으로 800달러는 별도로 또 나온단다.
다시 덕진공대를 다닐 때 가장 역할을 못해 참으로 미안했던 홍범 수였다. 이제부터는 이야기가 달라 졌다.
의욕이 100% 충전된 홍범수는 힘차게 비서실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처음 내려온 업무는 시장 분석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일 성 통신이 옴니아 출시와 함께 진 행한 국산 마케팅의 효용과 ID 그 룹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 파악이 었다.
인턴이라고 어려운 업무는 주어지지 않는다더니. 이게 어려운 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어려 운 업무를 한다는 건지 짐작이 되 지 않는 홍범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일성SDS 시 절 실무를 보던 가락이 있던 홍범 수는 차근차근 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아둥바둥하며 5일이나 걸려 보고서를 만들었고, 떨리는 손으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서 1시 간이 지났을 때, 회장님의 호출이 떨어졌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