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731화 (731/1,007)

34권 15화

옵션이란 상품은 어디까지나 보 험용이었다. 그렇기에 단일 포지션 으로 1억 달러 이상을 배팅하는 경 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렇다고 아주 경우가 없는 것 역시 아니었다.

과거 걸프전에서 ID 인베스트먼 트는 석유 선물에 엄청난 배팅으로 이름을 날렸었다.

상승 포지션을 단일로 잡아서 어 마어마한 이득을 보았다는 건 월 스트리트의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 였다.

그러면 지금의 상황이 그때와 같 다는 말일까?

순간 에런의 뇌리에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 대해 자신이나 회사가 너무 낙관적이지 않았나 하는 의심 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의심은 빠르게 희석되 었다. 경제 지표부터 시작해 매일 받아보는 보고서들은 그야말로 너 무나 좋았으니 말이다.

물론 빈센트 사장의 말대로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의 규모가 날로 커 져 나가고 있지만, 이를 지탱하는 주택 시장 상승은 그야말로 꾸준했 다.

언젠가는 무너지겠지만, 그게 근 시일 내에 무너질 것 같지는 않았 다.

"흠, 그 정도 규모라면 가능하지 요. 그렇지만 이번 일은 저 혼자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임원분들과 상의를 한 후 알려드리겠습니다."

에런은 속마음과 달리 최대한 신 중한 모습을 보였다.

혼자서 이번 거래를 성사시킨다 면 다시금 엄청난 성과금을 달성할수 있으니, 남들에게 양보할 생각 은 조금도 없었다. 그렇지만 안전 장치는 필요했고, 이를 위해 시간 이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기다리지요. 하지만 최대한 빠를수록 좋을 겁니다."

"급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후후, 이 같은 제안을 리먼 브 라더스에게만 할 거라고 생각하셨 다면 실망인데요. AIG, 시티그룹, BOA와 웰스파고 등에도 같은 제 안이 들어갈 것입니다."

빈센트 사장이 열거한 금융회사들은 하나같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론 투자에 적극적인 곳이었다.

"으음."

에런은 꽉 조였던 넥타이를 조금 풀며 생각에 집중했다.

그가 보기에 이번 건은 월 스트 리트에 새 역사를 쓰던 빈센트 사 장과 ID 인베스트먼트가 처음으로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었다.

수억 달러의 돈을 버리겠다는 것 과 같았고, 반대로 리먼 브라더스 에겐 그야말로 돈 놓고 돈 먹기였 다.

다른 회사들이라고 이걸 모를까. 그쪽에서 먼저 치고 나오기 전에 최대한 먹어야 했다.

그렇다고 몇 분 전에 한 소리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는 없었다.

이쯤 되면 배짱 싸움이었다.

에런은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 지하며 빈센트 사장을 배웅했다. 그리고서 바로 긴급 임원 회의를 요청했고, 빈센트 사장의 풋 옵션 판매 제안을 설명했다.

역시나 리먼 브라더스의 임원들 도 하나같이 에런과 같은 생각이었다.

심지어 월 스트리트에서 명성을 떨치는 ID 인베스트먼트에 한 방 먹여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 람도 있었다.

다음 날 리먼 브라더스는 빈센트 사장에게 거래 준비가 끝났다고 연 락했고, 그날 바로 거액이 리먼 브 라더스의 계좌로 이체되었다.

정확한 액수는 무려 20억 달러!

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풋 옵션 거래였다.

20억 달러가 즉각 ID 인베스트 먼트의 계좌에서 리먼 브라더스 계 좌로 전해졌고, 금융 전산망을 통 해 같은 가치의 20억 달러의 풋 옵 션이 ID 인베스트먼트의 계좌에 등 록되었다.

-리먼 브라더스가 발행한 옵션은 2006년 10월 만기이고, 기초 자산 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CDO) 의 수익률이 3% 이하로 떨어졌을 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상품입 니다.

-CDO의 수익률 3%를 기준으로 0.01% 하락할 때마다 1천만 달러 의 수익이 발생합니다.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전환될 경우 0.01%당 1억 달러의 수익이 발생합니다.

-AIG와 시티그룹도 같은 구조의 옵션을 5억 달러씩 발행했고, BOA 와는 협상 중입니다.

"역시, 빈센트 사장님이 수완이 좋으셔."

유재원은 보고서를 보고 박수가 절로 나왔다.

현시 점까지 ID 인베스트먼트가 매입한 풋 옵션의 규모는 30억 달 러다.

제일 큰 덩치는 리먼 브라더스에 게서 나왔고, AIG와 시티그룹도 탐 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유재원이라고 위험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2006년 말 에 터지는 게 아니라, 원래대로 2007년 8월에 터지면 지금 투자된 30억 달러는 증발하는 것이니 말이다. 덤으로 ID 인베스트먼트의 명 성에도 큰 균열이 벌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에겐 별 타격이 아니다.

ID 그룹의 계열사 중에 안드로이 드부터 테크놀로지까지 상장된 기 업은 매년 정기 배당을 했다. IT 기업이 배당이 짜다는 소리는 ID 그룹을 보면 쏙 들어갔다.

배당금은 1주당 최소 1달러였고, 스마트폰으로 대박이 터진 ID 테크 놀로지의 경우에는 1주당 5달러에 이르는 배당이 실시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배당금으로만 받는 돈이 누적으로 100억 달러는 가뿐하게 넘었다. ID 인베스트먼트가 이번 풋 옵션 투자로 손실이 나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액수였다.

오히려 유재원은 이번 풋 옵션이 박살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2007년을 기준으로 더 많이 사면 되니까."

수십억 달러를 앉은 자리에서 벌 어들인 투자회사들이 다음 거래에 서는 그 규모를 몇 배로 키울 것아니겠는가.

리먼 브라더스는 그야말로 겁 없 이 20억 달러를 질렀지만, AIG나 시티그룹의 경우엔 살짝 몸을 사렸 다.

이런 회사들도 리먼 브라더스가 풋 옵션 투자에서 대박이 터지는 걸 본다면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발 행을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반대로 만에 하나 있을 일이지 만, 30억 달러를 태우는 ID 인베스 트먼트의 경고를 진심으로 받아들 이고,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철회하거나 신규 발행을 중단한다면 그 것 역시 긍정적인 일이었다.

다음 날.

-ID 인베스트먼트,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과열 경고.

-30억 달러 규모의 풋 옵션 설 정! 빈센트 사장, 행동으로 증명하 다.

-과열 경계도 좋지만, 과도한 경계로 인한 소비 위축도 조심해야.

유재원이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 시스코 집에 돌아왔을 때, ID 인베 스트먼트의 과감한 배팅에 대한 뉴 스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옵션 투자도 상당한 규모이긴 했 지만, 무려 30억 달러를 풋 옵션에 투자하는 건 너무도 이례적인 일이 었기 때문이다.

금융 관련 매체는 물론이고, 정 규 뉴스에서도 열심히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에 따라 투자 시장에서 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서브프라임 투자 비중이 큰 투자 회사나 월 스트리트의 큰손들은 불 쾌감을 감추지 못했고, 이 뉴스도 대충 넘기고 싶었다.

그러나 30억 달러에 이르는 배팅 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덩치였다.

개인 투자자들도 무척이나 싫어 했다.

풋 옵션이 많이 팔린다는 것은 앞으로의 전망이 어둡다는 이야기 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ID 인베스트먼트는 꾸준 히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 대해 부정적인 전망이었고, 급기야 행동으 로 30억 달러어치의 풋 옵션 매수 를 직접 보여준 탓에 오늘의 주식 시장은 개장부터 쭉 하락으로 흐르 기 시작했다.

웬만큼 특별한 일이 없다면 하락 으로 장 종료가 되었을 상황이었다.

"음? 이건 뭐지?"

주식과 채권, 선물 시장 등 각종 투자 시장이 개장부터 하락세를 그 리며 쭉 이어지던 그때. 폐장 시간 을 20분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반 등이 일어났다.

반등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힘 을 쓸 필요도 없었다. 유재원의 기 업용 HTS에 긴급 공시가 뜬 것이 다.

-연방준비위원회, 금리 인하 결 정.

-안정적인 연착륙을 위한 조치.

-금융 시장의 과도한 우려 경계, 인플레이션 우려 크지 않아.

그나마 금리 인하 폭은 0.25%로 크지 않았다. 하지만 동결 조치도 아닌, 금리 인하는 금융 시장에 큰 호조였다.

하락으로 이어지던 흐름이 대번 에 반전되었고, 종합 지수 역시 바 닥을 치다가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 다.

금리를 내리면 주가와 주택 가격 등, 주요 투자 시장의 상품 가격이 오르는 건 경제 상식이다.

이는 시중에 풀리는 자금의 규모 가 증가하기 때문인데, 보통은 유 동성이 공급된다는 말로 묘사된다.

말 그대로 시중에 풀리는 돈의 규모가 많아지면서, 돈의 가치가 하락하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 주식과 주택 등으로 뭉칫돈이 몰리는 메커니즘이 작동되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복잡 한 방식으로 작동되지만, 결과만 보면 금리 하락은 주가 상승에 확 실히 작용한다.

그렇기에 연방준비위원회의 결정 은 유재원이 애써 준비한 30억 달 러 규모의 풋 옵션에 찬물을 끼얹 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여간 90년대 방식이 지금도 먹힐 거라고 생각하나?"

그린스펀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의 성향은 한 마디로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무엇이든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심심치 않게 동원하는 게 저금리와 탈규제였다.

1987년!

그린스펀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8년 전인 1987년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자마자 주가 폭락 사태를 빠르게 회복시키면서 명성 을 얻었다.

그러면서 1990년대 경제 활황의 중심으로 서면서 경제의 마에스트로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었다.

그렇지만 2000년 초 닷컴버블 붕괴의 주요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지목되면서 인기가 크게 추락했다.

이제는 인생을 마무리해야 할 시 점에 이르는 그린스펀에게 놓인 하 나의 목표는 본인의 명예 회복뿐이 었다.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으로서의 명 예 회복이란 당연히 경제의 마에스 트로라는 타이틀을 회복하는 것이 었다.

닷컴버블이 터지면서 온갖 지표가 난리가 되었을 때만 해도, 완전 실망하고 포기할 뻔했다.

하지만 ID 그룹을 위시한 모바일 혁신으로 제2의 닷컴 랠리가 시작 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여기에 청나라 채권 상환이라는 비현실적 인 상황이 더해지면서 미국에는 어 마어마한 호경기가 찾아왔다.

주가가 꾸준히 오르기만 한 게 벌써 3년이 넘었다. 주택 시장 역 시나 마찬가지다. 고용도 안정적이 어서 실업자 숫자나 실업 급여 신 규 신청 인원은 발표할 때마다 줄고 있었다.

기업들은 새로운 인력을 채용하 지 못해서 확장에 애로 사항이 생 기거나, 흑자 도산하는 경우까지도 있었다.

이런 과열 상태를 먼저 알아보고 선 조치를 해야 할 조직이 바로 연 방준비위원회였다. 그렇지만 연방준 비위원회는 오히려 금리를 내림으 로써 부채질을 했다.

연방준비위원회의 이전 조치는 바로 3분기 가까이 금리를 동결한 것이었는데, 금리 동결만으로도 충분히 안정 조치를 취했다고 판단했 던 모양이다.

극단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린스펀 이 유재원을 물 먹이려고 그랬다고 도 생각할 수 있다.

풋 옵션 매수 소식은 어젯밤부터 뜨기 시작했으니, 이에 반대한다면 서 금리 인하를 선택할 수도 있었 으니 말이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렇지만 유재원은 거기까지 넘 겨짚지는 않기로 했다.

연방준비위원회가 금리를 결정하 는 과정은 하루 만에 이뤄지진 않 는 게 상식이었으니 말이다. 여러 의원들이 각자 준비한 데이터를 가 지고 치열하게 토론한 후에 표결로 결정되는 게 기본 방식이었다.

물론 거기서 의장의 발언권이 제 일 크고, 그 의장이란 사람의 성향 이 편중되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유재원 죽이기라는 음모론까지 나 아갈 필요는 없었다.

더욱이 주식시장은 오늘처럼 하 루하루가 급변하는 곳이었다.

내년 이맘때를 예측하는 건 회귀 를 한 번 했던 유재원이라도 불가 능한 것이었다.

"누가 맞는지는 내년이면 결판이 나겠지."

그러니 내년 이맘때 누구의 선택 이 맞았는지 지켜보면 될 일이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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