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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771화 (771/1,007)

747회

권력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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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유재원의 표정만큼, 실제로 미국 대통령 후보 경선 중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일단, 유재원이 간접적인 방식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경선에 영향을 미쳤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소프트 머니라 불리는 정치후원금으로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들 모두에게 섭섭하지 않을 만큼의 돈을 보냈다.

개별 정치인이 직접 받는 하드 머니는 일 인당 낼 수 있는 한도가 정해져 있어서, 큰돈을 보내려면 사람들을 동원해야 했다. 물론 그렇게 사람을 사서 하드 머니를 쏴 주면 불법이다. 대신 해당 후보를 지원하는 정치활동위원회(PAC)에 후원금을 내서 후보의 선거 운동을 돕도록 하는 돈은 소프트 머니라고 하여 한도가 없었다.

유재원은 소프트 머니에 아낌없이 돈을 풀었다.

민주당 후보당 대충 5천만 달러씩, 공화당 후보들에겐 4천5백만 달러씩 보냈으니, 미국 정치판에서 단번에 큰 손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만, 이렇게 큰돈을 쓰고도 민주당에서는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률적으로 돈을 뿌려서 후보들 사이에 누굴 지지하는지 표가 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발언을 하는 데 있어 한국보다 훨씬 자유로운 미국이었다. 아예 방송국 차원에서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가 있을 정도로 말이다.

유재원은 돈으로 민주당과 공화당 중에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걸 보여주긴 했지만, 그 차이가 겨우 5백만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민주당 경선 후보들에게 일률적으로 같은 소프트 머니를 쏘면서 공화당에 비하면 약과였지만 민주당 경선에도 파장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바로 샌더스 상원의원의 파란이었다.

버니 샌더스는 1941년생으로 현재 67세의 정치인이다. 1981년 버몬트주 벌링턴시 시장으로 정치를 시작해서, 1991년 버몬트주 하원의원을 시작했고, 2007년 상원의원에 당선된 상태였다.

상원의원 경력은 이제 2년 차에 불과했지만, 하원의원만 16년을 한 정치 베테랑이었다. 그가 출사표를 내고 민주당 경선에 참가했고, 돌풍을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2008년 민주당 경선 참가를 위해 민주당에 가입하기 전까지는 무소속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니 샌더스는 자신의 정치 성향을 민주 사회주의라고 표방했다.

국가의 개입을 끔찍이 싫어하는 미국에서 유럽식 사민주의와 비슷한 성향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이로만 따지면 베테랑이지만, 민주당 기록은 짧은 신인의 돌풍에 민주당 경선도 초반에는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이에 대해 힐러리 클린턴 진영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기 힘들었다.

본인이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하리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었던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다만 본인의 카운터 파트너로는 오바마를 예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버니 샌더스가 추가되면서 삼각 구도가 되었다.

“이게 최선이지.”

버니 샌더스가 원래 역사보다 8년 빠르게 대권에 도전하는 건 당연하게도 유재원의 개입 덕이었다. 전생에서는 너무 늦게 도전한 탓에 불발로 끝나 버렸던 버니 샌더스의 정치 인생이었다. 이번엔 그러지 않기를 바라면서 빠른 출사를 권했다.

이를 버니 샌더스가 수락하면서 민주당 경선에 힐러리, 오바마, 샌더스라는 삼각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언뜻 보면 너무도 특이한 일이었다. 조직과 자본도 있는 힐러리와는 다르게 오바마나 샌더스는 민주당 경선 전에는 그야말로 존재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다수였으니 말이다. 그런 오바마와 샌더스가 경선 참여와 함께 조직도 갖춰 나갔고, 인지도도 순식간에 생겨났다.

여기서 도움이 되었던 건 유재원이 쏜 소프트 머니였다.

힐러리 진영에도 큰돈이었지만, 애초에 자본이 없는 오바마나 샌더스에겐 훨씬 단비와 같은 자금이었으니 말이다.

오바마와 샌더스는 미국 전역에 광고를 마음껏 하고, 인터넷 조직도 꾸리면서 각자 가진 정치적 비전을 말했다. 그리고 이에 열광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오바마는 인터넷과 친한 젊은이들이 열광했고, 샌더스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비롯된 월 스트리트를 집중 성토하면서 이들 때문에 피눈물을 본 이들의 지지를 끌어냈다.

오바마와 샌더스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힐러리 독주로 예상되었던 민주당 경선도 3파전으로 확장되었다.

더욱이 오바마와 샌더스가 주장하는 것들이 민주당 당원들과 미국 국민들의 공감을 얻은 만큼 힐러리도 이 둘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월 스트리트에 너무도 친화적이었던 힐러리도 정책을 바꿀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안타까운 건 오바마와 샌더스의 돌풍은 오래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통령 선거처럼 승자독식제인 민주당 경선이었기에, 근소한 차이로 승리해도 해당 주의 선거인단은 모두 힐러리의 독차지였으니 말이다.

결국, 민주당 경선이 반쯤 치러졌을 때. 힐러리로 결판이 나고 말았다.

“뭐, 그래도 성과가 없는 건 아니지.”

힐러리 클린턴의 재미 없는 공약에 오바마와 샌더스의 맛이 첨가되면서 그나마 좀 나아졌다. 게다가 미래에 터질 폭탄을 미리 터트리면서 미국의 불안 요소 하나를 제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어차피 이번 미국 대선에서는 정권 교체가 불가피하다.

부시 대신 앨 고어라는 최선의 카드로 미국의 번영을 연장시켰지만, 그 대가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폭탄이 터지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클린턴과 앨 고어라는 민주당 정권만 16년이었으니, 여기에 질린 미국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민주당의 패배가 확실시되기 때문에, 공화당 경선이 미칠 듯 폭주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 버릴 카드라면 오바마나 샌더스 대신 힐러리가 딱이다.

당연하게도 힐러리 역시 이런 식의 흐름을 어렴풋하게 감지했다. 그렇기에 유재원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연락을 해서 도움을 청했다.

민주당 경선이 힐러리로 끝나면서 공화당의 부시나 매케인과의 양자 구도 가상 대결 결과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는데, 힐러리는 대부분 패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 차이는 3~4% 내외로 아슬아슬한 오차 범위에 걸쳐 있었다. 유재원의 확실한 지지 표명이 있다면 본인의 지지율에 3% 정도 플러스가 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지지를 부탁했다.

난감한 건 유재원이다.

8월 초부터 베이징을 시작으로 도쿄까지 찍고 오게 된 것도 힐러리의 무리한 부탁의 영향이 지대했다.

다음 날.

-존 매케인, 부통령 후보로 에드 로이스 지명.

-에드 로이스는 누구인가?

-동아시아 전략 연구소 소장으로 라이징 차이나 저술.

-미국의 새로운 태평양 전략 제시한 두뇌.

유재원이 공화당 경선에도 힘을 썼다는 확실한 증거가 튀어나왔다. 바로 존 매케인 공화당 대선 후보의 부통령 지명이었다.

에드 로이스.

유재원이 미국 정치계의 형편없는 동아시아 이해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만든 싱크탱크가 동아시아 전략 연구소였다.

회귀 전에는 중국에 대한 몰이해와 일본에 대한 맹목적인 친근함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크게 망가진 상태였다. 중국의 팽창에 대해 방심하고 있다가 G2까지 올려줘 버렸고, 중국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패권을 마음 놓고 휘둘렀다.

일본에 대한 맹목적인 친근함을 가진 정치인들도 많아서, 해묵은 한일 갈등에 대해 제대로 된 중재를 서 주지도 못하며, 대중국 포위망 완성에도 효율이 떨어졌다.

그렇게 낭비되는 정치력 때문에 손해는 한국이 다 봤다.

이번만큼은 그런 식으로 흐르는 걸 방지하고자 일찌감치 만들어 둔 것이 동아시아 전략 연구소였다.

히트작은 라이징 차이나라는 책이었다. 나온 지 10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읽는 사람이 많은 스테디셀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라이징 차이나를 통해서 한반도의 변화와 중국의 패권적인 움직임을 완벽하게 예측해냈기 때문이다.

요즘도 새롭게 발굴되는 예측이 있을 정도다.

하나의 중국을 위해서 모든 장애물을 처리한다는 중국 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청나라 채권 상환부터 파룬궁 탄압, 티베트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무슬림 탄압까지. 중국 공산당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싶다면 라이징 차이나를 보면 된다.

에드 로이스는 그런 동아시아 전략 연구소의 소장으로서 워싱턴 DC에 상주하면서 정치적 존재감을 키웠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번 공화당 선거에서 존 매케인의 싱크탱크가 되어서 경선 전략을 짜 준 인물이기도 했다.

-미국은 왕국이 아닌, 위대한 연합국!

왕국.

왕과 귀족이 권력을 독점하는 나라를 칭하는 단어다. 공화당 경선에서 뜬금없이 왕국이란 단어가 튀어나온 건, 바로 부시 저격을 위해서였다.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나라가 미국이었지만, 미국에서도 정치 귀족이 있었다. 케네디 가문이 대표적이었고, 애덤스 가문도 있었다. 그리고 부시 가문도 이에 못지않았다.

별다른 능력을 증명하지도 못한 조지 W. 부시가 공화당 대선 후보에 입후보할 수 있었던 것도 부시 가문의 강력한 푸시 덕이었다.

존 매케인은 그런 부시 가문이 또 경선에 승리하고 대통령이 되면, 미국은 연합국이 아니라 왕국이 된다는 말로 강력하게 공격했다.

반면 존 매케인은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해군 제독을 지낸 군인 집안이었다. 본인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작전 도중에 격추되어 5년 반이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정치 귀족 가문과 군인 집안의 대결 구도를 만들면서 조지 W. 부시의 정곡을 찌르는 존 매케인이었다.

이러한 존 매케인의 발언이 터지고 나서 공화당 경선은 걷잡을 수 없는 진흙탕에 빠져 버렸다. 흑색선전과 감정 싸움이 격해지면서 온갖 막말이 쏟아져 나왔다. 부시 측에서도 존 매케인이 포로 생활 중에 베트남에 국가 기밀을 폭로하고 안락한 숙소와 식사를 제공받았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트렸다.

존 매케인 측에서도 조지 W. 부시가 대학 시절 마약과 술 중독에 빠져 방탕하게 살았다는 폭로로 받아쳤다.

그렇지만 변변찮은 이벤트 없이 무난하게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가, 오바마에게 패했던 이전과는 완벽히 다른 행보에 미국 전체가 존 매케인을 주목했다. 게다가 인터넷 활용도 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SNS를 통한 인터넷 홍보 조직을 갖춘 존 매케인이 사이다 같은 발언을 터뜨릴 때마다 그날 인터넷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러한 존 매케인의 경선 전략을 짜 준 사람이 에드 로이스 소장이었다. 물론, 에드 로이스 소장 뒤에 유재원이 있었다는 건 두말하면 입이 아프다.

그런 에드 로이스 소장을 부통령에 지명했다는 건, 존 매케인이 유재원의 손을 꽉 잡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워싱턴 DC의 정치계나 인터넷에서의 반응도 딱히 나쁜 건 없다.

대중에게는 인지도가 거의 없는 사람이라서 누구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단점이긴 했지만, 그래도 회귀 전보다는 나았다.

그때는 페일린이라는 알래스카 주지사를 나름 깜짝 반전 카드라고 지명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녀가 완전 최악의 돌+아이라는 게 드러나 그렇지 않아도 오바마에 밀렸던 존 매케인을 진흙탕에 처박아 버렸다.

에드 로이스 소장이 비록 이름값은 없어도 세라 페일린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정상적인 인물이었다.

이렇게 에드 로이스 소장이 존 매케인의 런닝 메이트가 되자 힐러리 쪽에서도 유재원을 귀찮게 하던 연락이 뚝 끊겼다. 아시아 전략 연구소의 에드 로이스 소장이 누구 사람인지는 민주당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11월 4일 두고 보자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보팀의 미국 민주당 담당이 보내는 일일 리포트에서 유재원의 눈에 들어온 문구였다. 11월 4일이란 미국 대선일 다음이었으니,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면 손봐주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누가 누굴 봐준다는 건지.

유재원은 힐러리 쪽은 머릿속에서 치워 버렸다. 비록 공화당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질 테지만, 부시가 아닌 존 매케인으로 확정된 것만으로도 십 년은 감수했으니 말이다.

컴퓨터에서 정치 관련 리포트들을 모두 닫은 유재원은 새로운 문서를 열었다.

ID 오피스 프레젠테이션 파일이었기에, 모니터에 뜬 글자들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대신 문서의 제목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ID 그룹 구조조정 방안.

창업 이후 폭발적인 성장세를 꾸준하게 이어온 ID 그룹에 구조조정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유재원의 책상 위까지 올라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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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과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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