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0회
충격과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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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질병관리본부의 리처드입니다.
“네, 유재원입니다. 리처드 소장님 덕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직 얼굴도 못 본 사이지만, 유재원은 리처드 소장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인플루엔자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질병은 언제든 유행될 수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과거와 비교해 교통량은 몇 배로 증가했고, 외국과의 교역은 물론 여행자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깊은 오지가 개발되었고,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같은 영구 동토층이 녹기 시작하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질병이 갑자기 유행할 수 있었다.
위험한 전염병을 사전에 파악해 대비책을 만들고, 아프리카의 여러 최빈국까지 돕고 있는 게 지금의 미국 질병관리본부였다.
-갑자기 전화를 드렸는데,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처드 소장님의 전화인데 당연히 받아야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러한 역량을 만들어낸 인물이 리처드 베서 소장이다.
그 공을 충분히 높이 살 만했다. 이러한 유재원의 태도에 살짝 마음을 졸이던 티가 났던 리처드 소장의 목소리도 점차 활기가 돋았다.
-혹시 회장님도 BBC 기사를 보셨습니까?
“네, 받아 봤습니다.”
-그렇다면 더 빠르게 설명해 드릴 수 있겠습니다. 저도 요번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오염된 피 이벤트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중이었습니다. 사이버 세계의 전염병 전파 패턴이 현실과 너무도 비슷해서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흥미였는데, 리뷰를 보니 현실에서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대규모 시뮬레이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오염된 피의 정확한 통계 데이터를 질병관리본부에 공유해 주시길 요청드리고자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 통계 데이터요?”
-처음에는 블리자드에 요청했는데, 내규상 회장님의 결제 사안이라 하더군요. 그래서 회장님께 직접 말씀드리고자 전화를 드린 겁니다.
역시!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처드 소장이 전화를 한 용무에 대해서는 김대석 비서실장의 ID톡을 받을 때부터 짐작을 하고 있었다.
과거에도 오염된 피 사태가 있었을 때, 미국 질병관리본부에서는 블리자드에 통계 데이터 공유를 요청했었다. 그렇지만 블리자드에서는 데이터 공유를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게, 과거의 오염된 피 사태는 계획된 게 아니라 버그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
블리자드에서는 그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 온라인 게임 운영의 수준이 최악이라는 걸 증명하는 리셋까지 감행해야 했다.
백섭과 리셋이 빈번한 온라인 게임은 망작이라는 확실한 증명이었다. 게다가 당시 통계 데이터는 질병관리본부가 기대하는 것처럼 정교한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블리자드는 질병관리본부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렇지만 상당히 상징적인 사태였기에, 관련 논문이 10여 편이 나올 정도로 제법 인용된 일이었다.
“아, 물론 제공해 드려야죠. 그렇지만 제가 무단으로 개개인의 개인정보를 제공해드릴 수는 없으니까 개인정보 제공에 대한 동의를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유저들에게 물어보고 제공하겠습니다. 그러니 정식으로 요청 공문을 보내주세요. 그리고 제공될 데이터의 형태는 유저분들의 동의 여부에 따라 제공되는 개인정보의 수준이 다를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반면 이번엔 다르다.
오염된 피 이벤트를 설계할 때부터 통계 처리까지도 염두에 두고 시작했다. 더욱이 유재원이 만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네트워크 엔진은 데이터 처리가 너무나도 깔끔해서 데이터베이스에 담긴 데이터를 따로 가공하지 않아도 한눈에 다양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1분당 오염된 피가 전염되는 속도라든가, 각 전파자마다 전염되는 경로를 파악하는 데 더 없이 용이하다.
질병관리본부라면 훨씬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전염병의 세계적 유행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면 유재원으로서는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다음 날.
-악의 제국 공격대, 학카르 월드 퍼스트 킬!
-늘 뒤처지기만 했던 한국! 큰일 내다!
-오염된 피의 저주 풀려!
타이밍 좋게도 한국의 악의 제국 공격대, 보통은 EE 공격대, 와우저들은 아예 EE라고 줄여서 부르는 악의 제국 공격대가 학카르를 세계 최초로 레이드했다.
학카르가 죽으면서 오염된 피의 저주도 풀렸고, 그에 따라 강력한 전염성도 사라지면서 대도시와 필드에 백골이 쌓이는 대량 살상 사태도 마무리되었다.
전염 성향이 사라진 오염된 피는 단순 디버프로 전락되었다. 최하급 치료제를 먹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치유할 수 있었다.
덕분에 악의 제국 공격대의 명성도 하늘을 뚫었다.
공격대의 이름에서 보듯 빌런들이 모인 공격대라서 악명이 자자했지만, 이번 일로 인해서 나쁜 놈들이긴 해도 최악은 아니라는 수준까지 명성이 올랐다. 물론 원래부터 악의 제국을 따르던 추종자들은 그야말로 축제였다.
천덕꾸러기 신세에서 제대로 된 영웅으로 거듭났다. 게다가 악의 제국 공격대는 호드 진영이었는데, 이번 일로 인해서 호드로 새롭게 캐릭터를 만드는 이들이 크게 늘어났다.
오크, 트롤, 타우렌, 언데드, 데스나이트와 같이 호드 진영 종족들의 외모는 얼라이언스의 종족에 크게 밀렸다. 그에 따라 플레이어의 숫자도 크게 차이가 났는데, 이번 일로 호드에 새로 캐릭터를 만드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불균형이 해소되길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얼라이언스 측에서는 우려의 시선이 컸다.
더욱이 악의 제국 공격대가 학카르의 월드 퍼스트 킬로 얻어낸 장비는 이제까지 등장한 보스들이 드랍했던 것보다 한 등급 위의 것이었다. 월드 퍼스트 킬을 달성할 때 딱 하나 나오는 장비였다.
학카르를 잡았을 때 나오는 장비도 제법 좋은 것이지만, 악의 제국 공격대가 얻은 유니크 장비는 다신 나오지 않는다.
그걸 최악의 빌런이 얻었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뻔히 보였다.
“역시 한국 게이머들이구만.”
유재원은 학카르를 잡고 환호하고 있는 악의 제국 공격대 모습을 담은 스크린 샷을 보며 혀를 찼다.
원래 오염된 피 이벤트를 설계할 때, 10일짜리 이벤트로 잡았다. 너무 빨리 끝나면 전염병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해질 거고, 너무 길면 게임을 가볍게 즐기던 유저들이 화를 내면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접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은 절충점이 10일이었다.
40인의 공격대가 학카르 레이드 때 소모할 장비와 치료제를 모으는 시간도 대충 10일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의 게이머들은 불과 일주일 만에 끝내 버렸다.
여러 가지 가짜 치료제 중에서 정확한 치료제를 찾아냈고, 무한 노가다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재료를 모았다. 특히 악의 제국 공격대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자발적으로 치료제를 모아 조공을 하면서 다른 공격대에 비해 그 시간이 매우 단축되었다.
엔시디아 공격대도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레이드 준비를 마쳤고, 비슷한 시간에 학카르 공략을 시작했지만, 전략에서 갈리면서 졌다. 엔시디아의 선택은 딜러의 숫자를 늘린 극단적 공격이었다. 그런데 학카르 레이드 중 하필이면 딜러 하나의 무기가 오염된 피로 인해 부서지면서 극단적 공격 전략이 깨져 버렸다.
10분 내에 잡지 못하면 무조건 오염된 피에 감염되고, 그러면 캐릭터의 능력도 디버프가 걸리면서 약해진다. 악의 제국 공격대는 넉넉하게 챙긴 치료제와 힐러들의 치유 스킬로 버텨내면서 공격력을 유지했지만, 딜러 숫자를 늘린 엔시디아는 와르르 무너졌다.
그렇다고 엔시디아의 선택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오염된 피가 운 나쁘게 무기를 헤먹지 않았더라면, 월드 퍼스트 킬 타이틀은 엔시디아가 가져갔을 게 분명했다.
그때, 띵 하는 알람 소리와 함께 유재원의 뉴스 페이지가 새롭게 갱신되었다.
“오! 이것도 뉴스로 나왔네.”
새로운 뉴스는 유재원도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미국 질병관리본부,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 오염된 피에 대한 통계 데이터 공유 요청.
-미국 질병관리본부, 대규모 전염병 사태에 대한 살아 있는 시뮬레이터. 전염병 발생 상황 대비할 연구 활동에 유용하게 사용할 것.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개인 정보 제공에 대한 동의 받은 후 통계 데이터 제공하겠다.
질병관리본부의 요청이 있은 후, 블리자드는 바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전체 유저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띄웠다. 다만 의향을 물어보는 형식이 평소와 달랐다.
오염된 피 이벤트로 생성된 통계 데이터를 질병관리본부에 제공하는 걸 거부하는 유저는 서명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네거티브 방식이다.
유저들 모두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보다 싫은 사람만 선별하는 방식이다. 꼼수라면 꼼수다. 덕분에 개인정보 동의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이들의 숫자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전체 유저의 3%도 되지 않았다.
블리자드에서는 이를 기념해 모든 유저들에게 전염성 디버프를 99.9% 확률로 차단해주는 하얀 마스크를 제공했다.
마스크의 한쪽 귀퉁이에는 학카르의 월드 퍼스트 킬에 성공한 악의 제국 공격대의 상징인 EE가 박혀 있는 아이템이었다. 귀속 아이템이고 착용하면 효과가 발동되어 3일간만 유지되는 한정 아이템이지만 모두가 좋아했다.
이번 데이터 제공으로 현실에서의 전염병 사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유재원은 기대가 컸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오래 기다릴 것도 아니었다.
다음 달이면, 샌디에이고에서 신종플루가 최초로 보고되는 3월이니 말이다.
“재원아. 이거.”
아침부터 티파니가 살짝 부끄러워하며 귀엽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우와! 고마워!”
유재원은 한눈에 뭔지 알아봤다.
어제저녁 뭔가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집안에 풍기더니, 초콜릿을 열심히 만들었던 모양이다. 티파니와 사귄 뒤로 매년 받는 초콜릿이지만, 매년 새로웠다. 처음 받았던 것은 티파니의 솜씨보다 장모님의 솜씨가 훨씬 많이 들어갔었지만, 지금은 티파니도 제과점 매대에 올려놔도 차이가 없을 만큼 솜씨가 좋아졌다.
티파니에게 초콜릿을 받고서 집안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을 올라가 서재에 이르자 잔뜩 쌓여 있는 소포더미가 유재원을 반겼다.
“회장님 앞으로 온 초콜릿입니다.”
연예인과 같이 텔레비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 적은 없었던 유재원이지만, 웬만한 셀럽들보다 높은 인기도를 자랑했다. 그 증거가 바로 서재 앞에 쌓여 있는 택배들이었다.
유나바머 사건 이후로 유재원은 물론 ID 그룹 사업장으로 배송되는 소포는 무조건 엑스레이 검사를 하도록 되었다.
통과한 택배는 이후로도 몇 번의 검색 작업을 거친다. 그렇게 까다로운 통과 절차를 마치고 유재원 앞으로 온 것이니 의심할 필요가 없다.
“저는 이거 하나로 충분하니까, 작년처럼 푸드뱅크로 보내주세요.”
본인을 생각해 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유재원이 하루에 먹을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다. 게다가 너무 단 초콜릿은 쉽게 물리는 탓에 다 먹을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오래전부터 본인에게 오는 초콜릿은 마음만 받고 나머지는 푸드뱅크에 기부했다.
SNS에도 기부 사실을 알리고 있고, 많은 이들의 추천을 받았다.
-슈퍼 루키 에프엑스 데뷔!
-무서운 신인의 질주 -넥스트 뮤직 차트 줄 세우기!
-앨범 구매 위해 음반사 앞에 긴 줄 생기기도.
-드림 엔터테인먼트, 부랴부랴 추가 주문!
-해외에서도 큰 반향. 일본 오리콘 차트 입성!
기분 좋은 초콜릿의 맛처럼 컴퓨터를 켜자 달달한 소식이 연달아 들어왔다.
샌프란시스코는 지금이 밸런타인데이지만, 한국은 16시간 전에 시작되었다. 자정에 음원이 풀렸고,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앨범이 올라왔다. 예약 구매자도 어제부터 앨범을 받아 보는 사람들이 나왔다.
프로듀스 마이 슈퍼스타에서 불렀던 노래들과 새롭게 고른 노래들로 꾸며진 에프엑스의 데뷔 앨범이다.
수록곡은 모두 12곡이니, 미니 앨범도 아닌 정규 앨범이다. 90년대 이후엔 미니 앨범으로 데뷔를 하고서 탄탄한 팬층이 만들어져야 정규 앨범을 발매하던 게 트렌드였는데, 이를 완전히 깨부수는 일이었다.
앨범도 단순한 주얼 CD에 비닐로 봉인한 단순 형태가 아니라 고급스러운 종이 케이스에 두툼한 포토북, 그리고 개인 포토 카드와 엽서까지 그야말로 소장판 수준의 퀄리티를 자랑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면 멤버들 개별 사진에 랜덤 포토 카드, 랜덤 굿즈 등등으로 중복 구매를 압박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드림 엔터테인먼트나 유재원은 아직 거기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봤고, 앨범 하나만 구매해도 모든 종류의 굿즈를 얻을 수 있었다. 대신 1/1000의 확률로 포토 카드에 멤버들의 사인이 들어간 것도 있다.
이렇게 앨범에 공을 들인 덕에 10만 장의 수량은 빠르게 동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이나 중국을 오가는 보따리상들이 큰손 역할을 하며 몇백 장씩 사서 자국으로 돌아가 비싸게 되팔기도 했다.
그나마 보따리상들은 정품이라도 사 줘서 다행이다. 아직도 지적 재산권 의식이 약한 중국에서는 벌써 짝퉁 앨범이 나돌고 있었으니 말이다.
에프엑스는 이 기세를 몰아서 2009년도 최고 신인이 될 가능성이 넘쳐났다.
더욱이 에프엑스만 뜨거운 데뷔를 한 것이 아니었다. 출격 준비를 마친 대형 신인들은 또 있었다. 프로듀스 마이 슈퍼스타의 우승자인 이매진 드래곤스, 아델 그리고 에드 시런이 차례차례 데뷔를 준비 중이었다.
2009년의 연예계는 프로듀스 마이 슈퍼스타의 우승자와 본선 진출자들이 다 해 먹는 해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3월 초가 되었을 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인공지능 비서 골드가 오랜만에 유재원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좋은 소식부터 말해 봐.”
-좋은 소식은 ID 하이테크에서 전고체 배터리 프로토타입을 완성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전고체 배터리는 앞으로 ID 그룹이 펼칠 공세적 전략의 핵심 아이템이었다. 너무나 좋은 일이었다.
“와! 진짜 좋은 소식이네. 그럼 나쁜 소식은?”
-모니터링 키워드 H1N1가 포착되었습니다.
이어진 인공지능 골드의 말에 기분좋은 느낌은 순식간에 날아갔다.
이는 신종플루 사태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였고, 묵직한 부담감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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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주말이네요!
모두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시고, 다음 주에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