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3회
충격과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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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방역 마스크는 낯선 아이템이었다.
의료인들이나 쓰는 것, 혹은 병에 걸린 나약한 사람이나 쓰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셰브롱 이사회의장의 이색 아이템.
-마스크 쓰고 출근하는 티파니 유 셰브롱 이사회의장.
빈말이 아닌 게, 티파니가 유재원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출근하는 모습이 파파라치의 카메라에 잡혔고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티파니가 어디 아픈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나중에 티파니가 개인 톡톡에 신종플루 예방 수칙을 지키기 위해 착용했다는 게시물을 올리고 나서야 조금 잠잠해졌다.
그렇지만 마스크를 쓰는 걸 신기하게 보는 시선은 여전했다.
덕분에 유재원이 세계피겨선수권대회가 열리는 LA 스테이플센터에 마스크를 쓰고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사인을 해 달라는 사람들이 많다. 유재원도 사인해 달라고 오는 사람들을 거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한때 유재원의 별명이 사인광이었을 만큼 유재원의 사인은 남발되었다. 사인 프리미엄 따위는 전혀 없었고 P마켓에 올라온 유재원의 사인 가격도 셀럽들 중에 최하위권이었다. 요즘에는 유재원의 사인 정도는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는 모양인지 사인을 해 달라는 사람 대신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셀피 한 장 부탁해요!
대신 셀카를 찍어 달라는 요청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어렵지 않죠. 질서만 잘 지킨다면요.”
셀카를 찍자고 말한 사람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에 안드로이드 로고가 찍혀 있었기에 더욱 흔쾌히 말할 수 있었다. 유재원과 함께 다니는 경호원들도 이제 알아서 셀카를 함께 찍고 싶은 사람들만 모아다 줄을 만들었다.
-마스크도 벗어주시면 안 돼요?
“이건 여러분을 위해서 쓰고 있는 거라서 절대 안 벗습니다.”
셀카를 찍으면서도 할 말 다 하는 일반인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신종플루 백신을 연구하다 온 거라서요.”
신종플루라는 소리에 셀카 구도를 잡던 일반인 팬은 히익 하며 놀랐지만, 이내 괜찮겠지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유재원과 같은 존재라면 차원이 다른 건강 관리 서비스를 받고 있을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이어진 덕이다.
“차라리 같이 쓰고 찍죠.”
유재원은 불쑥 뭔가를 건넸다.
KF80 방역 마스크였다. 미리 넉넉하게 챙겨온 것으로 줄을 선 사람들 모두에게 하나씩 나눠 줄 만큼의 물량이었다.
즉, 이번 상황은 갑자기 생겨난 해프닝이 아니라 철저하게 설계된 장면이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셀카를 찍자는 사람들이 섭외가 된 이들은 아니었고, 유재원 측에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어떻게 될지 예상을 하고, 마스크를 준비했다.
유재원이 건넨 마스크를 신기하게 보던 팬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포장을 뜯고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러면서 V자를 그리며 셀카를 같이 찍었다.
곧이어 다음 사람과도 비슷한 루틴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경기 시작 시간보다 1시간은 일찍 도착했으니, 줄을 선 이들 모두에게 마스크를 나눠 주고 셀카도 찍어 줄 수 있었다.
-LA 스테이플센터에 마스크갱 등장?
유재원이 LA 스테이플센터에서 마스크를 나눠 주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톡톡과 여타의 SNS의 대문에 사진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하얀 마스크를 쓰고 V자를 하며 찍은 사진이었다.
그렇게 셀카를 같이 찍은 사람들이 100명쯤 된다. 여기에 유재원과 수행원들 그리고 경호원들까지도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마치 갱단 하나가 출정 나온 듯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서 활동하는 다양한 갱들은 하나의 공통 상징을 정해 자기들의 세력을 표시했다.
파란색 후드티나 빨간색 후드티처럼 간단한 아이템을 쓰는 건 기본이었다.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뒷구석 할렘가에 잘못된 색깔의 옷을 입고 갔다가 총에 맞는 사고도 흔하게 벌어질 정도로 구분이 심했다.
돈맛 제대로 본 갱단의 경우에는 구찌 같은 명품으로 온몸을 둘둘 감싸기도 했다. 두건을 상징으로 쓰는 갱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유재원 일행 그리고 유재원과 셀카를 찍은 이들은 하얀색 마스크를 상징으로 삼은 갱처럼 보였다.
“흠, 나쁘지 않군.”
곧 경기가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스테이플센터의 VIP용 스카이박스로 이동하며 인터넷의 동태를 살피던 유재원에게도 마스크갱이라는 해시태그는 쉽게 보였다.
갱이라는 소리에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지만, 유재원은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마스크가 유행이 되는 게 방역에 더 좋았으니 말이다. 유재원도 직접 찍은 셀카 중에 제일 그럴싸하게 나온 사진을 하나 골랐고, 사진앱의 필터까지 적용해서 멋짐을 추가한 셀카를 톡톡에 올렸다.
-마스크만 착용한다면 누구나 마스크갱이 될 수 있습니다.
마스크갱 해시태그가 유행이 되면 참 좋겠지만, 아무리 유재원이라도 유행을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는 없는 법이다.
유행이 되진 않더라도 이렇게 한 번 화제가 되어 마스크를 쓰는 부담이 조금이나마 옅어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유재원 혼자만 걱정하고 있는 신종플루에 대한 경각심도 생겨나면 더 바랄 게 없다.
반면 잠시 후, LA 스테이플센터에서의 세계피겨선수권 대회에 대해서는 유재원은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김연아라는 이름에서 오는 신뢰감이란 그야말로 최고였기 때문이다.
빙상 종목 중에서도 피겨스케이팅은 한국에 있어서 너무도 낯선 종목이었다. 서양의 빙상 강국의 홈그라운드였다.
어쩌다 한 번 피겨스케이팅에 도전하는 선수가 있긴 했지만 유의미한 성과는 없었다. 그러다가 김연아 선수가 나타났고, 순식간에 세계 피겨스케이팅 무대 가운데 우뚝 섰다. 출전한 대회 모두에서 메달권에 진입하는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발휘했고, 작년 08시즌에는 그랑프리파이널과 사대륙선수권에서는 금메달을 세계선수권에서는 안타까운 실수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유재원의 전폭적인 지원 덕이었을까. 은메달이 금메달로, 동메달이 은메달로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넉넉하다 못해 넘쳐나는 후원 덕에 과거에 김연아 선수를 힘들게 했던 스케이트화 문제는 아예 삭제되었다.
최고의 스케이트화 제작 장인과 ID 그룹의 기술력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스케이트화가 무제한 제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케이트화가 안정되자 고질적인 고관절 부상도 크게 줄었고, 이는 곧 기량의 증가로 이어진 것이다.
이제 남은 불안 요소는 심판진의 장난질이었다.
피겨스케이팅 강국이란 말은 선수의 기량도 기량이지만, 심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밀어주기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구기 종목이라면 점수의 획득이 칼처럼 정확하게 나눠질 수 있었지만, 피겨스케이팅이라는 건 예술을 점수로 수치화시켜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점프나 스핀은 그나마 수치화가 가능한데, 나머지 부분의 예술성은 보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주관성을 이용해 심판들은 티가 날 정도로 자국 선수들을 밀어줬다. 반대로 김연아 선수 이전에는 피겨스케이팅에 별다른 존재감을 나타낼 수 없었던 한국은 마이너스를 받았다.
이러한 수작질을 이겨낼 만큼, 김연아 선수의 기량이 탁월했기에 출전 대회 모두에서 메달을 획득했던 것이었다.
특히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그 수작질이 더욱 심해질 거라는 예상이었다.
바로 내년에 있는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출전권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메달의 색과 출전권의 수량이 연동되어 있는데, 금메달을 배출한 나라에 3장, 은은 2장, 동은 1장이 나온다.
올림픽 메달을 노리는 나라들이 눈에 불을 켤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카르텔을 넘어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감히 장난을 치지 못할 만큼 압도적인 기량을 뿜어내는 것이었다.
-김연아, 세계피겨선수권 금메달!
-세계 신기록, 212.21점!
-여자 선수 중 200점 돌파는 세계 최초!
역시 김연아 선수는 유재원의 개입이 없던 과거보다 5.5점 높은 점수로 2009 세계피겨선수권 대회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과거에도 금메달을 따긴 했는데, 옥에 티가 있었다. 바로 피겨 프리스케이팅에서 세헤라자데 안무에서 스핀 구성 점수가 0점이 나오는 불상사가 있었다. 자세히 보자면 컴비네이션 스핀을 잘못 설정한 브라이언 오서 코치의 실수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가이드를 해 주었기에 스핀 점수도 제대로 받았고, 나머지 안무의 완성도도 올라가서 가산점이 추가되어 훨씬 나은 결과를 받았다.
이 정도면 김연아 선수의 우승은 필연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기에 밴쿠버 동계올림픽 역시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유재원은 대회 후 김연아 선수와 그녀의 부모님, 그리고 팀 김연아를 이루는 이들 전체를 초청해 근사한 저녁 식사를 대접했고, 소정의 보너스도 전달했다. 그리고서 올림픽에 최고의 기량과 컨디션으로 임할 수 있도록 최선의 지원을 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CF나 크고 작은 행사에 참가해야 한다는 조건이 덕지덕지 붙은 후원이 아닌 그야말로 순수한 후원이었다.
그렇게 LA에서의 스케줄을 끝낸 유재원은 시애틀의 ID 하이테크 바이오 팀으로 돌아가기 전에 집에 들렀다.
인공지능 골드의 백신 탐색 알고리즘은 다행히도 별다른 트러블 없이 잘 가동 중이었고, 바이오 팀의 연구원들도 시스템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유재원이 잠깐 짬을 낼 수 있었다.
“재원아, 혹시 멕시코 소문 들었어?”
“응? 멕시코에서 무슨 새로운 이야기라도 돌고 있어?”
오랜만에 셋이서 저녁을 먹던 중 나온 티파니의 물음에 유재원은 자세히 물었다.
“응. 멕시코 지부의 현장 근무자들 중에 신종플루로 의심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는 거야.”
멕시코만 개발 현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셰브롱은 오래전부터 멕시코만에 원유와 천연가스가 나올 것으로 예측하고 탐사 중이었는데, 아직 채굴에 성공하진 못했다. 그렇지만 꽝은 아니다. 돈 먹는 하마였지만, 끈기 있는 탐사로 2018년쯤에 유전을 찾아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단지 그때쯤 원유의 가격이 반토막이 나면서 채산성이 크게 악화되었고, 뒤이어 코로나 19라는 초유의 사태가 터지면서 존재감이 더욱 옅어졌다. 그렇지만 지금은 원유 가격이 1배럴당 100달러를 상회하고 있었기에, 그야말로 적극적인 개발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 멕시코 지부 임직원들 모두에게37.5도 이상으로 고열이 나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라고 했는데, 그 숫자로만 100명이 넘었거든. 병가를 내고서 못나오고 있는 직원들도 상당한 숫자란 말이야. 그런데 멕시코 당국에서 발표하는 신규 감염자 숫자는 꾸준히 10명대만 찍으니까 이상하잖아.”
“이건 뭐 100% 감염자 숫자를 속이고 있는 거네.”
티파니의 설명에 유재원은 단호히 답했다.
투명하지 않은 나라일수록 숨기는 게 많았다.
멕시코 역시 결코 투명한 나라라고는 할 수 없다. 공권력보다 마약 카르텔의 힘이 더 큰 나라가 멕시코였고, 멕시코의 행정 능력도 나라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못했다. 그렇기에 전염병과 같은 광범위한 재해가 일어나면 기민한 대응을 기대하는 것도 힘들다.
이 점은 미국 역시 동일하다는 게 문제였다.
미국 질병관리본부는 유재원에게 직접 연락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오염된 피 관련 자료를 얻어갈 만큼 적극적이었다.
신종플루 감지도 빨랐다. 하지만 그다음부터의 행보는 유재원을 많이 답답하게 했다.
3월 말인 지금에도 전격적인 통제는 없었다. 신규 감염자의 숫자나 사망자의 숫자도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라는 권고안을 내놓은 다음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타미플루와 리렌자 로타디스크에 대해서도 아직 검증 중인 모양인지, 신종플루 감염자에 대해 우선 투약한다는 말도 없다.
“조심해, 조만간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매우 커 보여. 그나마 치명률이 1% 이하로 보여서 다행이지만, 감염자 숫자가 수십만, 수백만이 되면 치명률 1%로 나오는 사망자 숫자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거든.”
“잘 알고 있으니 걱정 마. 게다가 나도 마스크갱의 일원이라고!”
티파니의 대답에 유재원은 미소를 지었다.
천만다행히도 마스크갱은 SNS에서 유행이 되고 있었다. 신종플루에 취약한 어르신들보다는 젊은 사람들이 대다수지만, 누구 하나 안 쓰고 있는 것보다는 좋은 상황이다. 게다가 제대로 따라 하려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지 P마켓에서 한국산 KF 인증 마스크가 매출 상위권 아이템에 오르기도 했다.
다음 날.
유재원은 전용기 편으로 시애틀의 ID 하이테크 바이오 팀에 복귀했다. 유재원이 없을 때에도 안정적으로 구동되던 인공지능 골드의 백신 탐색 작업이었지만, 유재원이 복귀하자 한결 빨라졌다.
반면, 신종플루 사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유재원의 예상 그대로 더욱 악화되었다.
신규 감염자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멕시코에서의 확산 속도는 오염된 피에서 플레이어 간 보였던 감염 속도보다 더 빠를 지경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 숫자를 숨기려고 했던 멕시코 당국이었지만, 사망자까지 속출하면서 공동묘지에 빈자리가 남아나지 않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멕시코는 수도인 멕시코시티는 물론 주요 대도시의 셧다운을 결심했다. 축제는 물론, 시장과 가게들, 심지어 성당까지도 문을 닫았다.
가톨릭 국가인 멕시코에서 성당이 문을 닫는다는 건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WHO, 신종플루 판데믹 선언!
멕시코가 국가 셧다운을 선언하고서 3일 후.
WHO가 신종플루의 판데믹을 선언했다.
원래대로라면 6월까지 질질 끌고서야 겨우 나올 판데믹 선언이었지만, 멕시코와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 심지어 유럽에서도 신종플루 환자가 확인되면서 판데믹 선언이 빨라졌다.
-미국 질병관리본부, 신종플루에 타미플루 처방 효과적.
때마침 미국 질병관리본부에서 타미플루 처방에 대한 권고도 나왔다. 치료제가 있다는 소식에 판데믹 선언 직후 폭락하던 세계의 증시도 하락세를 멈추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전 세계가 방역망을 강화하면서 급박하게 돌 때, 미리 이번 사태를 준비하고 있던 ID 하이테크의 바이오 팀에도 커다란 전기가 찾아왔다.
띵!
맑은 알람 소리가 유재원의 스마트폰에서 울렸다. 백신 탐색 작업이 완료된 것을 알리는 알람이었다. 예상헀던 30일보다 7일은 더 빠른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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