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회
용쟁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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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로 가는 길, 유재원은 의전용 차 안에서 스크랩북을 보는 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문사들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유재원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습관처럼 하는 작업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아주 명쾌했다.
깊이 있고 읽을 만한 기사의 숫자는 급속도로 떨어졌고, 그냥 책상에 앉아서 인터넷 검색만으로 쓴 것처럼 보이는 얄팍한 기사들이 대폭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신 인프라의 발달로 앉은 자리에서 전 세계를 다 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차세대 번역기 덕에 언어의 장벽도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검색 엔진을 사용하는 노하우가 제법 있는 기자라면 해외의 상황을 본인 손바닥 보는 것처럼 알 수 있었다.
-잡스, 유 회장에게 고마움 표시한 이유는?
-유 회장과의 라이벌 관계 강조함으로써 반 안드로이드 선봉장 강조!
-다가오는 IDDC 2010이 기대되는 이유!
-애플이 아이폰 X로 보여준 혁신, ID 그룹도 이어 나갈 수 있을까?
덕분에 엊그제 끝난 애플의 WWDC 행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에 유재원을 엮어낸 기사들이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었다.
첫 번째 기사부터 헛다리를 제대로 짚고 있었다.
WWDC에서 아이폰 X의 프레젠테이션을 끝낸 잡스는 개발자들을 파트별로 일으켜 세우며 감사하다고 했다.
소프트웨어 팀, AP팀, 카메라 팀 등등. 심지어 금성 디스플레이의 임원들도 소개했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에 특별히 고마운 사람들을 언급했는데, 본인의 부모님에 이어 유재원의 이름도 나왔다.
스트리밍으로 WWDC를 보던 유재원도 잡스가 본인을 언급하면서 고맙다고 짧게 한 마디 했을 때, 살짝 찡한 느낌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이 과거보다 조금 일찍 췌장암을 짚어 주었고, 대안 치료 따위가 아닌 제대로 된 치료를 권했었다. 그런데도 은퇴한 것처럼 일선에서 물러나 몇 년에 걸친 치료를 받아야 했을 정도로 치료가 어려웠다.
그나마 효과도 없는 대안 치료를 한다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덕에 치료를 잘 마치고 복귀가 가능했다. 그야말로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것이다.
잡스의 고맙다는 말에는 이러한 맥락이 숨어 있었다.
그걸 모르는 기자들은 완전히 엉뚱한 뜻으로 해석을 해 버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대신 유재원을 얼척없게 만드는 기사는 이거였다.
-500억 국산 마늘 시장 지키기 위해 10조 원 전자제품 시장 포기하나?대한민국 정부가 깐마늘에 대한 비관세 장벽을 세우자 언론들은 하나같이 중국의 편을 들어 기사를 써냈다.
실리만 따지고 보자면 깐마늘을 지키기 위해 전자제품 수출 피해를 감수하는 건 명백한 손해라는 이야기였다.
의미 없는 명분을 찾기보다는 실리를 찾아야 한다면서 중국과 타협을 해야 한다는 식의 기사들이 스크랩북에 가득했다.
농민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전국 신문은 두 개 정도뿐이고, 나머지는 천편일률적으로 중국과 대기업들의 이익을 말하고 있었다.
유재원이 스크랩북의 기사들에 실망하면서도 계속 받아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기업과 힘 있는 사람들의 현안 인식 수준을 바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와 같았으니 말이다.
“누가 의도적으로 부풀리고 있는 거 같은데.”
유재원이 보았을 때, 이상한 일이었다.
일사불란하다고 할 만큼 한쪽의 의견이 대대적으로 쏟아지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으니 말이다.
정작 중국의 전자제품 관세 인상으로 제일 피해를 보는 ID 그룹은 유재원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상태였다.
금성그룹인가?
ID 그룹 다음으로 중국의 조치에 피해를 볼 기업은 금성그룹이었다. 하지만 금성그룹이 언론들을 움직여서 죽는소리를 무제한적으로 퍼트리려고 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증거들은 턱없이 부족했다.
금성그룹과 유재원은 소와 닭의 사이였다.
애플은 겨우나마 라이벌이라는 타이틀이 붙을 수 있었지만, 금성그룹은 체급 차이가 너무 나는 바람에 라이벌이라고 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오히려 금성그룹은 친 ID 그룹이라고 분류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스마트폰을 비롯한 IT 사업 영역에서 금성그룹은 다각도로 ID 그룹과 협력 관계였다. 안드로이드 진영에 속했고, PC 분야에서도 ID 그룹의 표준을 잘 따르는 기업이었다. 금성그룹의 주변기기를 구매하면 드라이버 설치 등의 전문가적인 조치가 없이도 바로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이나 뉴에그 PC에서 사용 가능했다.
게다가 에너지와 석유 화학 분야에서는 긴밀한 협력 관계였다.
LG이노텍과 GC칼텍스.
두 개의 합작 기업으로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세계 최초 전고체 배터리를 만들어낸 LG이노텍은 금성화학과 라이트닝 볼트가 공동 출자해 만들어진 업체였다. 라이트닝 볼트가 전고체 배터리 기술을 제공했고, 금성화학이 생산을 전담하는 형태였다.
2차 전지 시장을 지배하던 리튬이온 배터리를 압도하는 전고체 배터리는 여전히 만들자마자 팔리는 최고의 히트상품이었다. 아니 앞으로도 10년은 예약된 물량이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배터리가 내장되는 모든 제품의 고질병은 작동 시간과 충전 속도였다. 또한, 온도가 영하로 떨어지는 곳에서는 방전 문제도 있다.
그런 문제들은 리튬이온 배터리를 전고체 배터리로 교체하는 것만으로도 해결된다. 모두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에서 특수한 군사 목적의 제품까지.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ID 그룹의 일원인 일본 산요전기에 라이센스를 주어 생산 라인도 죄다 전고체 배터리에 맞게 교체해 생산을 시작하고 있는데도 부족했다. 당연하게도 추가로 공장을 늘리는 것이 이미 결정이 되었다.
한국 주식시장에 LG이노텍이 상장만 되면 ID 일렉트로닉스를 능가할 수도 있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올 정도였다.
LG이노텍의 출범으로 난리가 난 건 중국이었다. BYD라는 중국의 배터리 업체가 대대적인 출자를 통해 세계 최대 규모의 리튬이온 배터리 공장을 완성한 게 불과 3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공장을 완성하자마자 배터리 분야의 판도가 180도 달라져 버린 것이다.
아직은 리튬이온 배터리의 수요가 있긴 했지만, 전고체 배터리에 모든 것이 열세인 상태였기에, 사양 산업이 될 게 분명했던 탓이다.
그렇기에 중국은 전고체 배터리를 복제하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당분간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고체 배터리의 비밀은 나트륨 화합물 충전제와 그래핀 전극에 있는데, 전자는 그래도 따라 할 수 있지만, 그래핀 전극은 오직 ID 그룹만의 기술이었으니 말이다.
GC칼텍스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셰브롱은 이르쿠츠크 유전과 북한의 두만강 유전에서 나오는 원유를 송유관을 통해 울산과 여수의 화학단지까지 공급했고 GC칼텍스에서 이를 가공해 가솔린과 디젤 그리고 각종 석유 화합물을 만들어 한국은 물론 아시아 전역에 공급하고 있었다.
이처럼 금성그룹은 ID 그룹과의 이해관계가 깊이 연결된 상태다.
금성그룹의 경영진과 유재원이 이번 중국의 결정에 대해 따로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금성그룹 쪽이 먼저 치고 나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정치 세력이 움직이는 건가?”
그러고 보니 한국의 대선이 내년 3월이었다. 현시점에서 1년도 채 남지 않았으니, 이미 대선 레이스는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 이후로 계속 야당 신세인 보수 세력은 정권의 탈환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정권 교체를 위한 동력을 마련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번 중국과의 무역 분쟁은 좋은 재료였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주변국과의 분쟁에서 주변국의 편을 들어주는 건 아주 몰상식한 짓이었다. 엄격하게 따진다면 반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지만 한국에는 본인의 이익이라면 국익이라도 팔아먹을 정치인들이 넘쳐나는 게 사실이었다.
아직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니 단정하기는 금물이지만, 이번에도 틀릴 것 같진 않았다.
잠시 후.
유재원과 수행원들이 탄 자동차들이 청와대에 도착했다.
복잡한 보안 절차를 모두 거친 다음에 청와대 본관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먼저 도착한 여러 기업들의 회장님들도 볼 수 있었다.
선객들이 있는 건 이번 노 대통령과의 만남이 독대 형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몇 주 전부터 예고된 경제 활성화 방안 모색을 위한 경제인과의 대화라는 타이틀로 대한민국 재계 순위 TOP 20 기업인을 초청하는 행사가 예고되었는데, 여기에 유재원이 꼽사리를 끼게 된 것이었다.
만약 중국의 관세 보복만 없었다면, 유재원을 빼고 진행되었을 행사였다.
대한민국 최대의 기업 집단이 ID 그룹이라는 건 두말 하면 입이 아플 정도지만, 한국보다 미국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은 유재원이었기에 청와대에서 배려를 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이 터지면서 유재원의 한국행이 결정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청와대에서 유재원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이번 행사에 초대장을 급하게 보내주었다.
“재원아!”
행사가 시작되기 전 삼삼오오 모여 있던 총수들 중에 유재원의 모습을 보고 반색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눈썰미 좋은 TG그룹의 이용권 회장이었다.
“응? 재원이라고? 어! 진짜구나!”
이용권 회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유재원을 보고 반색하는 사람은 부산 그룹의 박상권 회장이다.
이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유재원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더 있었다.
재계 순위 TOP 20에 당당히 오른 유경그룹의 류준식도 있고, 미래 그룹의 전재구와 미래 자동차 그룹의 전재근도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금성그룹의 구본무 회장도 웃음을 띠었고, 일성의 최재영 회장도 알은체를 했다.
최재영과 같은 경우는 한때 불편했을 때도 있지만, 지금은 눈인사를 주고받을 만큼 무난해진 상태였다.
“참석 못 한다고 하지 않았니?”
가장 적극적인 이용권 회장이 바로 유재원에게로 다가와 반갑게 물었다. 특유의 서울 말씨도 그대로였다.
“네, 그런데 최근 사안 때문에 한국행을 급하게 결정했어요.”
“아, 역시 그일 때문에 그렇구나.”
TG그룹의 주력 산업은 이동 통신이 된 지 오래다. 완전 내수형 기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자회사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TG 로고를 달고 출시되는 PC도 꾸준히 나오고 있었고, 최근에는 이동 통신 중계기 사업도 활발했다.
4G 중계기 시장에서 나름 가성비 상급으로 취급을 받는 게 TG그룹의 제품이었으니 말이다. 차세대 이동 통신 규격인 5G 연구 개발에도 큰돈을 투자 중이다. 4G 때와 마찬가지로 넥스트컴의 무선 사업부와의 협업을 통해 연구가 진행 중이었고,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헨리 사장의 로드맵이 성공리에 수행된다면 2012년쯤에는 5G 이동 통신의 시범 서비스가 가능하다고 할 정도다.
하여튼 이러한 제품들은 중국에도 수출되고 있었는데, 전자제품 관세 인상의 적용에 예외가 아니었다.
“뭐, 우리도 난감한 일이지만, 그래 봐야 재원이 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너는 괜찮은 거니?”
“네, ID 그룹 전체로 보았을 때 영향은 미미하다는 결론이에요. 나중에 추가 조치가 더해진다면 좀 달라지겠지만. 그건 그때 가 봐야 알겠죠.”
유재원의 말에 이용권 TG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추가 조치? 검역 강화 조치가 계속된 거라는 소리인가? 조카는 위에서 뭔가 언질을 받았던 모양이구나?”
대신 가까이 다가온 미래 자동차 그룹 전재근 회장이 즉각 반문했다.
미래 자동차 그룹의 경우 북미에서 도요타의 리콜 스캔들로 인한 반사 이익을 누리고 있는 기업이었다.
중형 세단인 소나타의 판매량이 월 몇 천대 수준에서 2만 대 수준으로 뛰어올랐으니, 그야말로 살판이 났다. 여기에 중국에서의 미래 자동차 판매량도 폭증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완성차가 중국에 팔리는 것보다는 중국에 세워진 미래 자동차 공장에서 판매되는 게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북미와 중국에서의 약진으로 내수 전용 자동차 기업이란 딱지를 떼고 글로벌 자동차 기업으로 부상 중이었다.
이런 상황이었는데, 만약 중국의 보복 조치가 전자제품 관세 인상에서 멈추지 않고, 더욱 강화된다면 다음 타깃은 자동차가 될 것이 유력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재원의 추가 조치란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뇨. 따로 연락이 온 건 없었어요. 그냥 제 예상이 그렇다는 거죠.”
“아, 그런가?”
이어진 유재원의 말에 전재근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어졌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전재근에게 말한 그대로 노 대통령이나 청와대의 수석들이 유재원에게 중국의 조치에 대한 대응 방향을 이야기한 적은 없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들어온 연락도 안부 겸 확인 전화였으니까.
대신 유재원은 노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엄살을 피우는 경제계 때문에 혹시라도 후퇴하는 걸 막기 위해 급히 한국을 찾은 것이었다.
한 번 호구 잡혀서 앞으로 계속 휘둘리기보다는, 차라리 지금 제대로 충돌해서 대한민국의 존재감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걸 알리는 게 훨씬 남는 장사였다.
이러한 내심을 전재근 회장이 알게 된다면 표정이 얼마나 달라질지 너무도 궁금해지는 유재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재근 회장은 중국돈이란 실리를 위해서라면 약간의 굴욕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마인드가 명백했으니 말이다.
이후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청와대의 의전비서관이 노 대통령의 등장을 예고하면서 행사장에 가벼운 긴장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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