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6회
2차 기술가속
=============================
“미친!”
나이아가라 폭포를 맞으며 디스플레이로 꾸며진 빛의 회랑을 통과해 컨벤션 센터 안으로 들어선 영식이는 격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평소 대단히 놀라운 일에는 대박이라는 말을 썼던 영식이지만, 이번만큼은 대박이라는 말도 부족했다.
올해 IDDC의 화두는 뭐니 뭐니 해도 로봇과 드론이었다.
동일본 대지진에서 가장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건 아틀라스였지만, 드론들의 활약도 그에 못지않았다.
실종자 수색과 쓰나미 물살에 떠내려가는 입수자들을 구해내는 데 드론의 맹활약은 대단했으니 말이다.
여기에 7월 독립기념일에 명예 훈장을 받은 마이클 머피 대위의 기적적인 재활 기록은 큰 화제였다.
이렇게 집중되었으면, 결정적인 순간 짠 하고 보여주는 게 보통인데, ID 그룹은 그냥 컨벤션 센터에 입장하게 되면 다 보였다.
ID 그룹에서는 전통적으로 IDDC가 있는 날이 곧 신제품 판매 개시일이었다.
오늘 발매되는 신제품은 2011년형 안드로이드 Z1과 패드, 2세대 스마트워치, 2세대 에어버드 그리고 보르도 TV였다.
각 제품별로 판매대가 큼지막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재고도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상태였다. 그 판매대엔 아틀라스 로봇들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 그 모습을 보고는 의문이 들었던 영식이었다. 그런데 아틀라스 로봇이 있는 매대의 앞에 서 있던 직원이 이거저거를 찍은 다음 카드를 제시하자 포장 담당 아틀라스 로봇이 해당 물건을 꺼내 종이봉투에 잘 넣어 내주었고, 결제까지 알아서 하자 ‘미친’이라는 격한 감탄사가 절로 나와 버린 것이었다.
IDDC에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던 영식이었으니, 판매대가 북적북적하다 못해 너무도 복잡해진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틀라스 로봇은 복잡한 주문도 찰떡처럼 알아들었고, 포장 파트와 계산 파트를 맡은 로봇들의 연계도 기가 막혔다.
“3,300억 원짜리 로봇을 캐셔로 쓰는 회사는 우리 회사뿐일 거야.”
반대로 3,300억 원짜리 로봇이라서 저렇게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두 발로 서서 양손을 자유롭게 쓴다는 것 자체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ID 그룹이 자랑하는 자연어 처리 기술은 아틀라스 로봇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었다.
주문자가 영어는 물론이고, 어떤 나라의 말을 하더라도 1초 이내에 완벽히 인식해서 바로 처리해 주니, 판매대가 밀릴 일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매대 근처에 쌓아 둔 재고가 떨어졌을 때를 대비한 것이 드론이었다.
드론이라고 다 하늘을 나는 게 아니라, 카트 형태의 드론도 있었는데, 잔뜩 재고를 실은 자동 카트 드론이 창고와 매대를 오가면서 제품을 운반 중이었다.
“음, 알바생들 숫자는 확실히 줄었어.”
영식이는 씁쓸한 맛도 느꼈다.
IDDC는 행사 기간 동안 대량의 단기 아르바이트를 제공하는 이벤트였다. 다른 회사들보다 높은 보수를 자랑해서 대학생들은 물론이고 쉬고 있던 실업자들도 솔깃한 단기 일자리였다. 그게 아틀라스와 드론으로 대체된 것이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자리가 다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틀라스 근처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도 있었고, 무인 카트에 물건을 올리고 내리는 건 사람의 몫이었다.
더욱이 지금 당장 아틀라스가 전면 보급되기도 힘든 게, 1대에 3,300억 원이나 하는 몸값 때문이었다.
이렇게나 비싼 아틀라스에게 판매대 일을 맡기는 건 정말 큰 낭비였으니 말이다.
다만 아틀라스를 작정하고 대량으로 생산하면 단가는 떨어지게 되어 있다. 현재의 가격은 20대만 찍어낼 때의 가격이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한 곳에만 납품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바로 펜타곤의 주문이었다.
펜타곤은 아틀라스에서 터미네이터라도 봤는지 지상 전투 로봇으로의 활용을 꿈꿨다. 그러면서 어디 팔지 말고 오로지 미군에게만 납품하길 원했다. 그래서 나온 게 3,300억 원이라는 가격이었다.
독점으로 팔아야 한다면, 연구 개발 비용과 소정의 보상까지도 모두 펜타곤에서 책임지는 게 맞으니 말이다.
반대로 대량 생산을 하더라도 컴퓨터나 스마트폰 수준으로 누구나 살 수 있는 가격까지 떨어지는 건 당장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영식이는 불쑥 생겨난 씁쓸한 걱정은 지금 당장 걱정할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덕분에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컨벤션 센터 전체를 돌아볼 수 있었다.
아틀라스 로봇 말고도 입이 떡 벌어지는 것들은 수두룩했다.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메인 스테이지의 정식 발표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행사장을 찾아주신 귀빈 여러분께 안내드립니다. 10분 후, 메인 스테이지에서 유재원 회장의 첫 번째 신제품 발표가 있습니다. 메인 스테이지 티켓을 예약하신 분들은 지정석에 착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영식이도 장내 아나운서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바로 메인 스테이지로 입장했다.
“자리 좋네.”
프리패스에 박힌 좌석의 번호는 첫줄 중앙이었다. 오랜만에 휴가를 나온 영식이를 위한 유재원의 센스가 넘치는 배려였다.
비슷한 시각.
“내가 발표를 하는 것도 아닌데, 긴장되는군.”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던 잡스의 한탄이었다.
가을비에 떨어져 바닥에 붙은 나뭇잎처럼 딱 달라붙어서 끈질기게 그를 괴롭히던 췌장암을 이겨내고 일선에 복귀한 잡스였다.
잡스의 손길에 의해 다시 만들어진 아이폰X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애플의 이름을 드높였다.
전 세계적으로 1억 대가 넘게 팔렸으니, 역대 아이폰 중에서 최고의 판매고를 올린 것이었다. 특히 중국에서의 판매가 호조였다. 1억 대의 매출 중에 반은 중국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한중 무역 전쟁의 수혜를 톡톡히 봤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였다.
대신 검색어 제한, 접속 제한, VPN 관련 앱 삭제 등등의 중국 공산당이 요구하는 사안들을 들어줘야 했지만, 철저한 현지화라는 명분으로 실행했다. 나중에 아랍의 봄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중국의 인권 탄압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난이 좀 일어나긴 했지만 말이다.
특히 ID 그룹의 무료 VPN과 HTTPS2 지원 패치와 애플의 행보가 대비를 이루면서 비난의 강도는 조금 더 커졌다.
그렇지만 기업이란 실적이 전부가 아니던가.
애플 이사회는 잡스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다시 표명하면서 잡스는 앞으로도 계속 애플의 CEO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잡스에게 IDDC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다.
동종 업계의 경쟁자로서 언제나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 같은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행사였으니 말이다.
IDDC를 통해 제품이 출시되자마자 입수되어 낱낱이 분석되고, 그러한 데이터가 다음 세대 아이폰에서 심화 발전되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프로세스였다. 그렇다고 애플이 중국 회사들처럼 대놓고 따라 하진 않지만,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건 이제 잡스도 부정은 하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곧이어 잡스의 모니터에 뜬 카운트다운이 0이 되었고, 암전되었던 화면이 밝아지면서 2011 IDDC의 메인 스테이지가 공개되었다.
“역시. 이번에도 쉽지 않군.”
메인 스테이지의 화면만 보고도 잡스는 딱 견적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인 스테이지 뒤편을 구성하고 있는 화면의 방식이 기존의 레이저 프로젝터가 아닌 인피니티 디스플레이라는 걸 바로 알아본 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LCD 인피니티 디스플레이가 아니라 OLED로 구성된 인피니티 디스플레이라고 말이다.
이번엔 좀 쉽게 갈 줄 알았던 잡스였다.
그도 그럴 것이 IDDC 전부터 바람을 잡은 건 아틀라스 로봇과 스마트 의수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스마트폰은 조금 힘을 빼고 가려나 싶었는데, OLED로 구성된 거대한 인피니티 디스플레이를 보니 헛된 기대였구나 하는 생각이 바로 든 것이다.
-7나노미터 미세공정의 힘으로 이전 세대에 비해 2배 이상의 성능을 자랑했던 전작의 안드로이드 Z0이었습니다. 딱 하나의 단점이 있다면 디스플레이였겠지요. 다만 당시에는 LCD를 채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OLED의 치명적인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번인(Burn-in) 현상이죠. 깨끗한 화면을 표시해야 하는 화면에 영구적인 잔상이 남게 되는 번인은 OLED에 치명적입니다.
-이제는 다 지난 옛날의 일이라고 당당히 선언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ID 하이테크 그리고 JNC와의 환상적인 협업은 OLED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청색 소자의 내구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디스플레이 회사인 ID 디스플레이는 개선된 OLED 모듈의 양산은 물론 대형화에도 성공했지요.
-OLED 모듈의 채용으로 완벽해진 안드로이드 Z1을 소개합니다.
“번인 문제를 완벽히 해결했다니.”
먼저 OLED 모듈을 전격 채용한 애플은 디스플레이 모듈의 품질 문제로 지금도 고통 중이었다.
백색 균일성부터,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오는 번인 문제 등등, 디스플레이 관련 문제만 매일 끊이지 않고 보고되고 있었다.
금성 디스플레이에서 불량 모듈 교체 비용을 감당하기로 한 덕에 애플이 보는 손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애플이 자랑했던 최상의 퀄리티 보증에 큰 오점이 남았다.
반면 유재원은 본인들의 OLED 모듈에 자신감이 넘치는 듯했다.
-OLED 모듈에 한해 7년 보증 서비스를 실시하겠습니다.
-7년 내에 번인이든, 얼룩이든, 불량 화소든. 디스플레이 모듈에 문제가 생겼다면 무조건 새 모듈로 교체해 드립니다.
유재원의 자신감은 곧 강력한 품질 보증 정책으로 이어졌다.
원래 ID 그룹의 제품들은 다른 기업들과 달리 3년 보증이 기본이었다. 반면 애플은 1년이었고, 그 이상의 보증을 받기 위해선 애플케어플랜이라는 보험에 가입해야 했다. 그런 보증 기간을 7년으로 늘렸다면, OLED의 번인 문제를 해결했다는 건 진짜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디스플레이 모듈만 교체해 주다가 망해 버릴 테니까.
-OLED는 궁극의 디스플레이라고 하지요.
-색감, 명암비, 시야각, 전력 소모율 등등 OLED는 LCD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좋습니다. 여기에 우리 ID 디스플레이는 한 차원 더 높아진 반응 속도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이게 전부일까요?
-울트라 와이드 시네마디스플레이 모니터와 보르도 OLED TV를 소개합니다.
곧이어 가로 길이를 엿가락처럼 쭉 늘인 모니터와 대형 TV가 메인 스크린에 공개되었다.
21:9라는 규격의 38인치 모니터는 시네마스코프의 2.35:1에 가장 근접하게 대응하는 비율이었다. PC를 통한 영화 감상과 게이밍 환경에 최적인 모니터였다. 회귀 전이었다면 2022년쯤에나 등장할 모니터였는데, ID 그룹의 역량이 총동원되면서 10년이나 일찍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보르도 OLED TV 역시 대단했다.
47인치라는 초대형 화면을 자랑했고, 심지어 아치형의 커브 모니터였다. OLED의 특성이 바로 휘어진다는 것인데, 이 특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4K인가?”
스펙을 보면서 감탄이 절로 나오는 잡스였다.
“금성 디스플레이에서는 분명 대형화는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OLED의 화질에 반한 잡스는 아이패드에도 OLED를 넣기 위해서 납품 업체인 금성 디스플레이에 9인치와 11인치 모듈을 주문하려고 했었다.
잡스의 주문에 금성 디스플레이는 매우 난감해하면서 대형 모듈의 양산은 아직 도전 중인 단계라고 했다. 그러면 저건 뭔가. 9인치도 어렵다 하는 판국이고, 아이폰용 5.6인치도 수율이 안 나온다고 난리인데, 유재원은 보란 듯 38인치와 47인치를 들고 나왔다.
페이퍼 런칭?
-그러면 지금 바로 실물을 보여드리죠.
마치 잡스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유재원의 멘트가 이어졌다. 그리고 베일에 가려진 대형 카트를 밀고 들어오는 로봇이 있었다.
잡스가 이번 IDDC의 주인공이 될 거라고 확신했던 이족 보행 로봇 아틀라스였다. 움직임은 매우 자연스러웠고, 소음도 거짓말처럼 작았다.
-아틀라스, 베일을 벗겨 주세요.
유재원의 말에 아틀라스가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베일을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메인 스크린에서 CG와 같은 화면으로 보여줬던 울트라 와이드 시네마디스플레이 모니터와 보르도 OLED TV의 실물이 나타났다.
이미 화면까지 띄워진 상태였는데, 메인 스크린에서 보였던 것처럼 짱짱한 화질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울트라 와이드 시네마디스플레이 모니터는 3,500달러, 보르도 OLED TV는 6,500달러에 판매될 겁니다.
비싸다. 그렇지만 무조건 사고 싶다. 그것이 잡스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아니, 이번엔 스페셜한 아이템을 두 개나 더 준비했지요.
나올 만한 아이템들은 다 나왔으니, 이대로 유재원의 발표가 끝나는가 싶었지만 역시나 깜짝 아이템은 준비되어 있었다.
박수가 쏟아졌지만, 놀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첫 번째 IDDC부터 지금까지 늘 스페셜 아이템은 등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빠지면 섭섭한 일상적인 순서였다. 그렇지만 이번에 나올 아이템은 과연 무엇인지 메인 스테이지에 있는 이들 모두 궁금증이 폭발했다.
잡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틀라스!
유재원은 아틀라스를 다시 호출했다. 그러자 아틀라스가 등에 짊어지고 있던 백팩을 풀었다. 배터리팩인 줄 알았는데, 그게 가방을 겸하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나온 건 잡스의 눈에는 의외로 단순해 보였다.
스포츠 선수들이 땀이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걸 막기 위해 쓰는 머리띠와 평범해 보이는 안경이었으니까.
-그냥 보면 단순한 헤어밴드, 선글라스 같죠? 이렇게 단순한 형태 속에 놀라운 기능이 숨겨져 있답니다. 바로 뇌파 인터페이스 그리고 증강 현실이란 미래의 기술말입니다.
스페셜 아이템의 외형만 보고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잡스는 유재원의 설명에 입이 떡 벌어졌다.두 단어 모두 그가 꿈꾸던 미래였기 때문이다. 잡스는 더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잡스는 자동차를 가져와 빠르게 몰았다.
목적지는 실리콘밸리 컨벤션센터였다.
=============================
[작품후기]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