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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주
“영식아.”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하고, 손가락은 모터 달린 듯 움직이면서 복잡한 프로그램을 설계하며 굵은 땀방울이 날 정도로 집중하던 영식이는 갑자기 본인을 부르는 소리에 소름이 들었다.
“상병 최, 영, 식!”
영식이를 부른 사람은 이곳 전산실에서 제일 싫은 이 중령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토요일 오후부터 보장되는 개인정비 시간에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것도 중령이 시킨 작업 때문이었다. 덕분에 관등 성명을 대는 영식이의 목소리에는 불만과 짜증이 담겼다.
게다가 본인에게 늘 띠껍게 대했고, 틈이 날 때마다 친구인 유재원을 향해 근거 없는 비난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기를 영식아라고 친근하게 부르다니. 그것도 엄청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이다.
오늘은 저 양반이 짬밥을 잘못 먹었나 보다.
“지금 하던 작업은 여기까지만 저장하고 일어나라. 바로 생활관으로 가서 A급으로 싹 다 갈아입고 와.”
“여기서 멈추라는 말씀입니까? 이거 중령님이 오늘 중에 끝내놓으라고 하셨던…….”
“아니, 그건 괜찮다. 얼른 다녀와라.”
갑자기 말을 바꾼 이 중령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영식이는 속에서 다시 짜증이 밀려왔다.
아니 괜찮다고?
그럼 애초에 작업을 시키지 말던가!
진한 짜증이 밀려왔지만,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대는 상명하복이었으니 말이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영식이는 곧 이 중령이 어째서 이전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면회다. 이건 외박증이니, 일요일 저녁 점호 전까지만 복귀하도록.”
면회라니!
엉겁결에 외박증을 받아든 영식이는 면회 소리에 ‘누가?’라는 의문부터 떠올랐다.
본인이 생각했을 때, 본인을 찾을 사람은 마땅히 없었다. 어머니는 8월 휴가에서 만났고, 한국의 친구들 역시 8월 정기 휴가 때 만났었다. 그렇다고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맘때 본인을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누가 날 찾나 하는 의문을 가지고 위병소로 내려가 보는데,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어? 재원아!”
“이제 나오냐.”
어제 개성의 일로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친구 유재원이 거기에 있었다.
경호원만 10명이 넘었고, 이들이 이동하는 데 쓰는 대형 밴과 유재원의 전용 불칸 SUV까지 여러 대의 자동차들도 번쩍번쩍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어쩐지 세상 모든 일에 투덜거리던 이 중령이 갑자기 친근하게 부르더라니.
잠시 후.
계룡대에서 직접 영식이를 픽업해 온 유재원은 대전의 ID 일렉트로닉스 반도체 공장으로 갔다. 대전에서 가장 안전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보안 등급만 따져도 ID 그룹에서 바이오로직스와 같은 최상급 시설이었다.
더욱이 직원들을 위한 각종 편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대전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가 나오는 커피 전문점도 있었다.
ID 일렉트로닉스 반도체의 커피숍에 자리를 잡은 유재원과 영식이의 대화는 역시나 군대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그나저나, 벌써 상병이야? 시간 빠르네.”
“빠르다니! 그건 절대 동의 못 하겠다.”
전산실에 걸린 시계의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를 생생하게 느끼고 있는 영식이었다.
계룡대의 육군 본부 전산실에서 특급 전산병으로 근무하는 터라 전방 철책 근무를 서는 소총수들보다는 편한 군 생활이지만, 그렇다고 군대 시간이 빨리 가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 중령과 같이 짜증을 유발하는 상관도 있었고, 계룡대에 있는 장성님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이것저것 관심을 보이는 것도 짜증스러웠다. 그들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라서 싫었다.
안전한 곳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갑자기 찾아온 덕에 긴장감이 풀린 영식이는 전산실에서 겪은 일들을 마구 풀었다.
본인 전입 신고식 때 계룡대의 별들이 몰려왔다는 것부터, 주기적으로 찾아와 편의를 물어보는 별도 있다는 것, 이 중령과 같이 이유도 없이 싫은 티를 팍팍 내는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까지. 8월 정기 휴가 때는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 그런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 그래도 대놓고 그러니 좀 낫네.”
“낫다니. 짜증만 나는데.”
“세상 모두가 우리를 좋아할 수는 없잖아. 그냥 호감을 보일 수도 있고, 그냥 싫어할 수도 있는 거지.”
유재원은 이 중령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를 인정했다. 오히려 이 중령처럼 대놓고 티를 내는 게 유재원 입장에서는 좋았다. 반ID 그룹 동맹에 모인 면면만 봐도 필요할 때는 유재원의 힘을 빌려 놓고, 이젠 셔먼 액트 운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부당한 지시나 부조리 같은 건 절대 가만히 있지 말고 바로 신문고에 넣어.”
“당연하지! 내가 그런 호구는 또 아니라고!”
영식이가 가슴을 쫙 펼치고 당당히 말했다.
반면 유재원은 그 모습에서 영 믿음이 가진 않았다.
오늘도 본인이 면회를 오지 않았더라면 토요일 개인 정비 시간에 코딩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본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유재원이었다면 부대 내 문제아로 찍히더라도 참지 않았을 것이다.
회귀 전에 멋모르고 입대했을 때는 군대 내 부조리를 그저 묵묵히 감내했었는데, 전역하고 보니 그게 다 미련한 짓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군대에서 부조리한 일을 당하면 무조건 신고하는 게 최선이다. 신고가 먹히지 않으면 보다 높은 상급부대, 혹은 국민신문고에 올리는 게 좋다.
“그런데 무슨 바람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지금 한창 바쁠 때잖아.”
계속 본인 이야기만 하던 영식이가 유재원에게 턴을 넘겼다.
유재원도 어제 그 망할 편지만 아니었으면, 원래 계획대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내년도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개성의 스마트 종합병원 공사도 가끔 챙기고, 이곳 대전 반도체 공장에서 생산할 AMD의 신형 CPU 준비 상황도 체크하면서 이런저런 조언도 해 주며 할 일이 많았다. 영식이의 면회도 지금이 아니라,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왔을 거다.
이러한 유재원의 겨울 시즌 계획은 어제 날아온 상원 상업과학통신위원회의 출석 요청서 때문에 다 어그러졌다.
“청문회라고?”
영식이도 격한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식이의 뇌리에 박혀 있는 청문회라는 건 국회의원들이 증인들 불러다가 호통을 치는 그런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5공 청문회부터 옷 로비 사건 청문회까지.
“미국은 좀 달라. 입법 활동의 일환으로 청문회는 상시로 이뤄지거든.”
“그럼 더 큰일이잖아. 반독점법을 진짜로 밀어 붙일 수도 있다는 말이니까!”
침착한 유재원과 달리 영식이가 더 열을 올렸다.
“하고 싶다면 하라지 뭐. 일부 계열사가 떨어져 나간다고 해도 상관없어. 우리의 능력은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거니까.”
“에이, 말은 정확히 해야지. 재원이 네가 다 하는 거잖아.”
이번에도 영식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셔먼 액트가 발동되진 않을 거라고 보는 유재원이지만, 만에 하나 발동한다고 해도 별걱정은 없었다.
ID 그룹의 계열사들을 억지로 갈라서 경쟁사에게 공짜로 주는 건 아니고, 지분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대가를 챙길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떨어져 나간 계열사들을 다른 업체들이 주워 간다고 해도 ID 그룹을 능가할 기술은 얻지 못한다.
영식이의 말대로 ID 그룹의 파괴적이고 혁신적인 기술은 모두 유재원의 머릿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의문이었다.
일찌감치 유재원은 미국의 정보 공동체가 유재원 파일을 만들어 공유 중이라는 걸 알고 있다. 존 매케인 대통령이나 미국의 수뇌부에 해당 파일이 공유되고 있을 테니,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을 거다.
그런데도 문제의 청문회가 진행되고, 본인까지 출석시키는 것을 묵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몇 가지는 유재원도 파악했다. 현재 제일 뜨겁게 달아오른 건 인터넷 여론이었다. 반ID 그룹 세력을 이끄는 쪽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의 이슈 선점을 잘 했다.
4차 산업혁명이 이뤄지면 일자리를 빼앗기는 건 물론이고, 사생활까지도 사라진다는 식의 루머가 빠른 속도로 번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확대 재생산되었다.
인공지능 골드의 핵심 알고리즘이 기계학습이고, 기계학습을 위해선 방대한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게 완성된 인공지능 골드가 아틀라스에도 도입이 되었으니, 일을 배울 때 작업자를 보고 배우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데도 이런 루머라니.
유재원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온 세상의 빅데이터가 모이는 ID 클라우드 시스템의 보안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 완벽히 구축했다. 매일 어마어마한 공격이 쏟아지고 있지만, 단 한 번의 유출도 일어나지 않았을 만큼 완벽했다.
“아무래도 의도적으로 인터넷 여론을 왜곡하는 작전 세력이 있는 것 같아. 그들이 누군지 알아봐야겠어. 그런데 그 일은 네가 잘하는 거잖아. 오랜만에 면회인데 일을 시켜서 미안해. 의뢰비는 전역하면 잘 챙겨줄테니, 부탁 좀 하자.””
“아하! 그건 내 전문이지!”
유재원의 말에 영식이가 반색했다.
마음만 먹으면 유재원도 못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매번 짜증이 난다고 어떤 일이든 본인이 다 처리하다 보면 마지노선을 넘겨 버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레밍턴과 최강욱, 김대석 그리고 영식이처럼 믿을 수 있는 전문가들에게 일을 맡기는 걸 원칙으로 했다.
희희낙락거리는 영식이에게 i웍스 노트북을 내밀었다.
“우와, 역시 회장님은 준비가 철저하구먼!”
영식이가 쓰던 노트북이었다. 대전으로 출발하기 전에 영식이네 집에 들러 어머님께 사정을 설명하고 받아온 것이었다. 덤으로 ID 그룹 슈프림 네트워크 매니저 권한이 담긴 OTP 카드도 있었다.
“바로 시작한다.”
본인의 노트북을 받아든 영식이는 OPT 카드를 통해 바로 클라우드 시스템에 관리자로 로그인했다. 그러곤 인터넷을 넘나들면서 SNS와 인터넷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이들의 계정에 대한 조사부터 시작했다.
“좀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회장님은 할 일 하셔.”
영식이는 바로 옆에서 유재원이 지켜보고 있으니 귀찮았던 모양이다.
유재원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이 반도체 공장인 만큼, AMD의 신형 CPU나 내년도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위한 M12 프로세서 개발 상황에 대해 살펴보는 등의 유재원 나름의 할 일이 있었다.
“여기 직원분들에게 말해 놨으니, 먹고 싶은 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해. 그리고 뭐 단서가 나오면 바로 연락 주고.”
“OK!”
당부의 말을 하는데도 영식이는 본인의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 손을 놀렸다. 군대에 들어간 지 1년이 훌쩍 넘었지만, 실력은 여전했다.
듬직한 모습에 유재원은 영식이를 두고 일어났다.
“회장님께 반도체 사업부 현황을 보고하겠습니다.”
미국으로 떠난 리사 수 박사를 대신해서 대전 공장을 맡고 있는 사람은 이효종 교수였다. 이효종 교수의 핀펫 공정은 지금도 요긴하게 사용 중인 미세공법이었고, 이효종 교수는 핀펫 이후의 미세공정과 새로운 반도체 소재를 찾는 연구에 집중 중이었다.
연구도 거의 완성 단계였다.
“1, 2라인의 5나노미터 미세공정 전환이 성공했고, 리스크 생산 중입니다.”
리스크 생산이란 경제성은 포기하고 일단 웨이퍼를 넣어서 찍어보고 있다는 말이었다. 수율도 아직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300미리 웨이퍼의 리스크 생산에서 양품은 3% 이하였으니 말이다. 구조가 간단한 메모리 칩은 그나마 수율이 높은데, AP 같은 복잡한 비메모리 칩의 수율은 1% 이하였다.
그렇지만 양품이 나오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긍정적이었다. 일단 시범 생산에 들어갔다는 건, 양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니 말이다.
-AMD의 새로운 ZEN 아키텍처를 설계 중.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인 M12 설계 완료.
-DDR4는 시범 생산 중.
5나노공정이 완료만 되면 출격할 제품이 셋이나 된다. 모두 2012년 8월을 겨냥하고 있는 신제품이었다. 시간표상으로는 AMD의 신형 ZEN 아키텍처 CPU가 간당간당하지만, 리사 수 박사와 수석 아키텍처 디자이너 짐 켈러를 믿는 유재원이었다.
다음 날.
유재원은 가족과 아침을 먹은 후, 미국행에 올랐다. 미 상원 상업과학통신위원회의 청문회 참석을 위해서였다.
아쉽게도 출발할 때까지 영식이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유재원 회장, 미국 국회 소환. 반독점법 본격 논의하나?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법률 체계, 혁신 발목 잡는다.
대신 미리 설정한 타이밍에 따라 친ID 그룹 성향의 언론들이 일제히 유재원을 국회로 소환한 것에 대해 비난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작정하고 여론전을 시작하면 ID 그룹도 밀릴 게 하나 없다.
유재원의 전용기가 태평양을 반쯤 넘었을 때는 기다리던 소식도 전해졌다.
-이놈들 꽤나 은밀하고, 조직적이었어! 게다가 생각지 못한 거물도 있더라. 직접 봐.
영식이의 리포트였다.
거기엔 유재원도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은밀한 커넥션이 있었다.
“엑손 모빌?”
영식이가 전송한 문서에 담긴 인맥도에는 세계 최대의 석유화학기업 엑손 모빌의 오너인 우즈 회장의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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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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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수능일이네요.
시험 보는 동안 밀집해 있을 텐데, 코로나19 절대 조심하세요. 수능일도 미뤄지고, 마스크도 계속 쓰고 있어야 하는 역대 최악의 수능이네요.
그래도 혹시나 계실 수능 보실 우리 독자님, 가족 중 수능 응시하는 독자님 집안에 모두 대박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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