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초보 헌터 레트시(市) 적응기 -- >
세진은 문을 밀고 나오며 눈을 깜빡거렸다. 두꺼운 나무와 철판을 겹쳐서 만든 문은 처음 고리를 잡고 아무리 당겨도 열리지 않더니 힘껏 밀어붙이자 어렵지 않게 열렸다.
속으로 그럴 거면 문고리 따위는 무슨 이유로 만들어 놨냐면서 투덜거리던 세진이지만 조금씩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뭔지 모를 불안감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세상이 어두컴컴하다.
잔뜩 찌푸린 날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진은 툴틱을 통해서 지금 시간이 이곳 행성 기준으로 오후로 접어드는 시간임을 알고 있었다.
지구로 치면 오후 두 시 정도인 것이다.
곳에선 하루를 서른 여섯으로 나누고 그 시간을 기준으로 살고 있으니 21시를 조금 넘은 시간인 셈이다.
앞으로는 이 시간에도 적응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세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루 36시간과 24시간은 차이가 커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여간 이 시간이 이렇게 어두운 것은 사실 별 이유가 아니다. 데블 플레인은 원래 이렇게 어둡다.
행성 전체를 감싸고 있는 어두운 구름이 태양의 빛을 막아서 지표까지 닿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에테르가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행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상 현상이다.
짙은 구름은 사실, 에테르가 성층권으로 올라서 뭉친 결과물인 것이다. 이제 이곳에 발걸음을 놓은 세진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오늘 날씨가 무척 흐리다는 생각만 하면서 어째 날씨도 자기를 돕지 않는 것 같다며 투덜거렸다.
세진은 몇 걸음 걸은 후에 뒤를 돌아서 자신이 나온 건물을 살폈다. [생체에테르바디 보관소 no101-678500]툴틱의 도움으로 건물 위에 현판처럼 붙어 있는 간판을 확인한 세진은 무지막지한 숫자에 깜짝 놀랐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보관소가 있으면 저런 번호가 나오는 거지?"
세진은 툴틱을 통해서 보관소에 대한 확인을 했다. 그는 될 수 있으면 툴틱 사용을 습관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생존을 보장해 줄 중요한 수단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정보의 중요성은 두말 하면 입이 아픈 일이라고 생각하는 세진이다.
때문에 보관소 현판을 보자마자 툴틱을 찾아 정보를 확인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세진은 한 가지 재미있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
이 보관소의 현판 번호는 보관소 안에 생체에테르바디가 있으면, 즉 보관중이면 표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번호가 떠 있는 창고만 안에 들어가서 의체를 보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번호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단다. 어차피 다시 의체로 이곳에서 깨어날 때에는 도우미가 알아서 해 주는 일이라서 따로 신경을 쓸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저 번호는 이곳 보관소가 비었으니 사용할 사람은 사용하라는 광고와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는 내용이다.
세진은 그것까지 확인을 하고는 미련 없이 보관소에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좁은 앞마당 너머로 보이는 담을 보고 그 담에 달려있는 문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낮은 담 너머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세진의 심장은 쿵쾅거리며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새로운 세상과 진짜로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흥분한 것이다.
"하아, 이건 뭐 종족 전시장이야?"
세진은 보관소 정문 옆,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툴틱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세진이 보관소 정문에 닿았을 때, 그는 밖으로 나가서 거리를 걷는 사람들 틈으로 끼어드는 것에 강렬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온통 흑인이나 백인만 있는 곳에 자신이 들어간다고 해도 어색할 마당에, 지금 세진이 보고 있는 거리에는 세진과 같은 외모를 지닌 사람이 절반 정도라면 나머지는 솔직히 감당하기 어려운 외모의 생명체들이었다. 그것도 세진과 같은 외모란 말은 비슷하게 생긴 인간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비슷하다고 하기도 어려운 이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키가 2미터 50은 되어 보이는 거구의 남녀가 있고, 등에 갈기가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마뱀처럼 꼬리가 있는 이도 있고, 방아깨비처럼 생긴 사람도 있었다.
그 외에도 참으로 적응 안 되는 외모를 지닌 이들이 득실득실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거리로 끼어들기가 어디 쉬울까.
세진은 툴틱을 통해서 그 모든 사람들이 인류로 분류가 되며 결혼도 가능한 이들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혼이 가능하단 이야기는 혼혈이 태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생긴 것이 다르기는 해도 비슷한 종이란 말인데 세진은 여전히 특이한 외형의 사람들에 적응하지 못하고 툴틱의 정보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두 시간이 넘도록 툴틱을 살피던 세진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거나 노숙자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이리저리 발품을 팔아야 한다는 것을 툴틱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이곳, 레트시만이 아니라 이 행성은 전체의 물가가 굉장히 비싼 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어느 수준이 이상이 되는 생필품의 가격이 무척 비쌌다.
대신에 그저 먹고 살면서 죽지 않을 정도를 유지하는 데에는 별다른 비용이 들지 않았다.
여기저기 싼 값에 사람을 부리려는 일자리는 흔한 곳이 이곳인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라훌들이었다. 라훌은 헌터들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로 이곳 행성에서만 라훌이라고 부를 뿐, 다른 행성으로 간다면 당당한 주민으로 인정받는 존재들이었다.
다만 이곳에서 다른 행성으로 가기 위해선 적잖은 에텔론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꿈을 이루는 라훌들이 많지는 않다고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라훌들은 자신들도 언젠가 헌터가 되어서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고 에테르몬을 사냥하며 살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가까이 보는 가장 성공한 이들이 헌터이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물론 그런 희망은 이 데블 플레인을 떠나서 다른 행성의 주민이 된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이곳에서 의체를 사용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헌터가 의체를 라훌에게 주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툴틱에 있었다.
헌터가 되려면 이곳 주민으로 있어선 불가능하단 소리다.
아무튼 세진은 이제부터 먹고 살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툴틱에 기본으로 제공된 300만 텔론은 크고도 작은 액수였다. 하룻밤 고급스러운 곳에서 질펀하게 놀자고 하면 그것으로도 턱없이 모자랄 것이고 싸구려 숙박업소에선 두 달 정도는 먹고 잘 수 있는 액수라니 세진의 선택이야 당연히 그런 여관을 찾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여관을 정한 다음에 내일부터 레트시의 일거리를 찾아 볼 생각이었다.
사실 괜찮은 일이 있기는 했다.
- 헌터(남) 구함. 기본급 600만텔론 보장[email protected] 숙녀클럽.
뭐 이런 구인 광고가 몇 건 있었다.
딱 봐도 느낌이 오는 광고 아닌가.
거기다가 툴틱 광고라서 영상도 있었다. 말 그대로 호스트다.
세진은 딱 보고 그걸 알았다. 그런데 알아보니 그 일도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여성 헌터들의 생체에테르바디는 워낙 단련이 되어 있어서 잘못 걸리면 아주 작살이 난다는 경험담이 툴틱 여기저기에 올라와 있었다.
물론 물주 잘 만나면 예비용 의체 몇 개 정도 얻을 수 있다는 성공담도 있긴 했다.
"이거 아르바이트 새끼가 올린 거 아냐? 사람 구하기 어려우니까 이런 미끼 던지는 거."
세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흥미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 방에 인생이 피는 거 아니겠는가. 초보 헌터가 허리 잘 놀리면 예비용 생체에테르바디를 마련할 수 있다는데 혹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일 거다.
하지만 세진은 그래도 아직은 스스로를 타락의 길로 갈 수는 없다는 묘한 반발심으로 그쪽 일은 선택사항에서 제외한 상태다.
"사나이 체면이 있지, 그냥 사귀는 거면 몰라도 말이지."
대학교 휴학하고 군에 가면서 친구들 덕분에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에게 동정을 잃은 후로, 술기운에 돈 주고 산 여자가 아니면 잠자리도 해 보지 못한 세진이었다. 그래서 세진은 자신의 성을 매매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술이 깨고 나서 자신과 함께 잤던 여자가 기억에도 남지 않았을 때, 그 기억나지 않는 여자가 얼마나 하찮고 또 가엾게 느껴졌던가.
스스로 그런 놈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사면 또 몰라도.'
세진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어땠어?"
"별로야. 분배하고 나니까 300에텔론 정도 되는 것 같아."
"오올? 제법인데? 주황색?"
"제법은 무슨, 남는 것도 없구만. 아무튼 그래 맞아. 주황색."
"사고는 없었어? 헌터로만 간 거야?"
"당연하지. 라훌을 어떻게 믿고 파티에 끼워? 그러다가 뒤통수 맞으면 한 방에 훅 가는데."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라훌용병단은 괜찮잖아."
"완전히 믿긴 어렵지. 그쪽에서 소개한 용병도 간혹 사고를 치잖아."
"그래도 그런 놈들은 그쪽에서 확실히 처리를 한다잖아. 용병단 쪽은 괜찮은 편일 텐데?"
"싫어. 그냥 헌터끼리만 모이는 것이 좋아."
"헌터도 마냥 믿을 수는 없지. 밑에 라훌을 데리고 있는 녀석들도 적지 않아. 뭐 그게 전부 나쁜 놈들인 것은 아니지만 헌터를 잡는 건 라훌들이니까 조심해야지."
"그러니까 우리 헌터들도 라훌을 처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니까? 이건 뭐 먼저 당하지 않은 이상은 공격할 수가 없으니 그것들이 우릴 밥으로 보는 거 아니냐고."
세진은 투덜거리는 헌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거친 빵을 묽은 스프에 찍어 먹고 있었다.
이곳은 레트시의 외곽에 있는 하급 헌터들의 여관이다.
하급 헌터들은 대부분 에텔론과 텔론을 아끼기 위해서 싼 가격으로 끼니와 숙박이 가능한 여관이 필요했고, 그에 맞춰서 생겨난 여관들이 있었다.
지금 세진이 앉아 있는 곳도 그런 여관들 중에 하나였다.
저녁 시간이라서 헌터들로 가득한데 그나마 이 여관이 헌터들 사이에선 괜찮은 곳이라고 소문이 나서 그런 것이다. 일면 하급 헌터들 사이에서 소문난 맛집 정도 되는 곳이다.
그럼에도 세진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 빵과 스프다. 세진은 식사를 하면서도 주변 헌터들을 살피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대부분이 검이나 도, 창과 방패 따위의 무기를 들고 있다. 하급 헌터들은 아직 에테르 활용을 능숙하게 하지 못하고 또 괜찮은 에테르 운용 기술을 익히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정신 능력을 사용하는 하급 헌터는 찾기 어렵다.
거의 대부분이 육체 능력을 사용해서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곳에서 만나는 헌터들 대부분은 근접 타격 무기나 날붙이들을 가지고 다닌다. 그렇게 사냥을 해서 에텔론을 모아서 그것으로 에테르 기관을 업그레이드 하거나 혹은 에테르를 사용하는 기술을 익힌다. 그렇게 한 단계씩 발전을 해 나가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에텔론만 쏟아 부으면 생체에테르바디의 능력이 쑥쑥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이것도 스스로 단련하지 않으면 한계에 닿게 되고, 에텔론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생긴다고 한다.
그거야 아직까진 세진이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는 영역이다. 익스퍼트 상급이나 최상급이 되어야 닿게 되는 벽이라고 하니 에테르 유저도 되지 못한 세진에겐 까마득한 이야기인 것이다.
유저, 익스퍼트, 마스터, 그랜드 마스터.
이것이 헌터들의 수준을 나눈 기본적인 단계다. 하지만 그것들도 각각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등의 구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세분화된 단계는 훨씬 많다.
어쨌거나 세진도 기본적인 에테르 기관은 가지고 있다.
모든 생체에테르바디에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이용해서 에테르를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연습이 없이는 안 되는 일이다.
그냥 본능처럼 사용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세진은 그걸 연습해야 하고 또 그러는 사이에 생계에 필요한 텔론을 벌기 위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미래를 위해서 헌터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과 귀에 담아 두는 것을 게을리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후우, 이건 뭐. 여기가 더 팍팍한 삶인데? 그냥 돌아가서 편하게 사는 것이 좋을까?"
말뿐이지만 세진을 그렇게 중얼거렸다.
당연히 말 뿐이다. 그리고 돌아가려고 해도 적어도 10에텔론은 벌어야 지구로 돌아갈 에테르 코어를 얻을 수 있다.
게다가 목표한 어리를 작동시킬 에테르를 생각하면 훨씬 많은 에텔론이 필요할 것이다.
세진은 모든 것이 에텔론으로 통하는 현실이 마뜩찮아 혀를 차다가 여관 직원의 안내를 받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삐걱거리는 목재 건물의 1인실 방은 좁아서 아늑하단 느낌 이외엔 모든 것이 기대 이하였다.
"옆방에서 일어나는 일은 볼 필요도 없이 알게 되겠군. 젠장."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얇은 벽이다. 주먹으로 치면 뚫어지지 않을까 생각하던 세진은 방을 거의 가득 채우고 있는 침대에 몸을 뉘였다.
하지만 아직은 할 일이 많았다.
조금이라도 이곳의 상황을 알아야 내일 아침부터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세진은 그 때문에 툴틱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