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시 레트 시(市)에 서다 -- >
세진은 현관문을 열고 제이앤과 알프론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서다 굳어버렸다.
"어? 어떻게 이렇게 일찍 왔어? 난 적어도 아침은 되어야 올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그래도 왔으니 이리 와서 앉아요. 참, 여긴 후안이라고 해요. 우리와 같은 라훌헌터죠."
알프론은 세진의 등장에 눈이 커졌고, 제이앤은 담담하게 후안이라는 손님을 소개했다.
후안은 라훌들 중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종족의 피를 이은 라훌이었다.
세진은 후안이란 사내의 세모꼴 귀가 머리 위쪽으로 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옷에 가렸지만 머리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갈기가 있을 거란 사실도 알 수 있었다.
후안은 여러 인류들 중에서 외형에 동물의 흔적이 남아있는 인류의 생체에테르바디에서 태어난 라훌의 후손이거나 혹은 그 당사자인 것이다.
"이거 불청객이 된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후안입니다.
후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세진은 혼란한 마음을 추스르며 그런 후안의 손을 잡았다.
여러 행성인들 중에서 외형이 동물을 닮은 구석이 있는 이들은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특정 부위 외에는 인간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후안 역시 겉으로 드러난 귀 말고는 보통 인류와 구별되는 점은 없었다.
그와 손을 잡으면서 당황스런 상황에서도 행여 후안의 손에서 조금 다른 점이 있지 않을까 했던 세진의 묘한 기대감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불청객은 오히려 제가 된 것 같습니다. 모처럼 제가 자리를 비워서 후안씨를 불렀을 텐데, 제가 이렇게 불쑥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세진은 마음속에 있는 말을 숨기지 않았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손님이 마침 자신이 없을 때, 집에 와 있다는 것은 자신을 피해 그를 불렀다는 말이 된다.
그것을 짐작하지 못할 세진이 아니었다.
"세진.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어. 사실 우리도 세진이 조심스러워서 함부로 사람들을 집으로 부를 수가 없잖아. 세진은 헌터고 우린 라훌이니까 말이야."
알프론이 나서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하고 세진이야 조금씩 사이가 좋아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른 라훌을 세진이 있는 집에 부를 수는 없었거든. 세진이 불편해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데 세진이 집을 비운다고 하니까 오늘은 불러서 한 잔 해도 될 것 같았단 말이지. 뭐 그런 그거뿐이야."
"맞아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알프론에 이어서 제이앤도 나서서 세진의 기분이 상할까 상황을 이해시키려 했다.
"아, 괜찮아. 후안씨가 와 있다고 내가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야. 약간 놀란 것뿐이야. 친구를 만나는 건 개인의 사생활이지, 그런 것까지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잖아. 두 사람도 내게 그런 간섭은 하지 않는데 내가 그럴 수는 없지. 더구나 여긴 알프론과 제이앤의 집이잖아. 걱정하지 마. 조금 정말로 놀랐을 뿐이지 별 다른 감정은 없어. 그럼 계속 놀아. 난 차라리 여관에서 자고 올게. 모처럼의 파틴데 방해해서 미안해."
세진은 그렇게 말하고 후안을 바라보며 양해를 구했다.
"미안합니다. 후안씨. 괜히 자리를 어색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제가 자리를 피해 줄 테니까 즐기다가 가십시오."
"아, 아니. 그래도 이렇게 가시면..."
"세진, 함께 즐겨요. 그래도 되잖아요."
"맞아. 세진 제이앤 말대로 함께 마시자. 응?"
후안이 어색해하고 제이앤과 알프론이 세진을 말렸지만 세진은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집에서 가까운 여관에 방을 잡았다.
세진은 그것이 그들을 위해서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처럼의 파티를 자신 때문에 망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관방에 누워서 상황을 되짚으며 세진은 묘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알프론과 제이앤이 자신에게 뭔가 속이는 것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친구를 불러서 간단한 술자리를 하는 것이 이상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마침 자신이 없을 때에 그렇게 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거기다가 라훌헌터의 보증인으로 이름이 난 세진인데 라훌 친구 하나를 소개 못할 이유가 있는가 싶었다.
알프론과 제이앤의 해명이 세진을 충분히 이해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지. 사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말이지.'
세진은 스믈스믈 피어오르는 의심을 떨치며 침대 시트를 끌어 올리고 잠을 청했다.
이곳에선 하루지만 세진은 지구에서 8개월을 보내고 온 날인 것이다.
세진이 여관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집에 들렀을 때, 집에는 후안이 없었다.
늦지 않게 술자리를 끝내고 돌아갔다고 알프론이 이야기 해 줬다.
세진은 별 관심 없다는 듯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에텔론 상점으로 출근을 했다.
집에 남은 제이앤과 알프론은 한동안 다시 수련을 한다고 했고, 세진도 앞으로 이틀만 더 보증인을 하면 에텔론 상점에 라훌들을 위한 보증인 상인이 등장하게 될 거라고 둘에게 이야기를 해 줬다.
그 이야기에 제인앤과 알프론은 무척 놀라고 또 기뻐했다.
이제부터 많은 라훌헌터들이 에텔론 상점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진은 에텔론 상점에서 일정 배당을 받게 된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속으로 내린 결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틀을 더 지나고 툴틱을 통해서 에텔론 상점에서 공식적으로 세진에게 이미 알고 있었던 상황이 확정되어 라훌족을 위한 보증인 직원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물론 세진에겐 특정 비율에 따른 배당금이 매월 한 번씩 지급될 거라는 에텔론 상점의 공식 확인도 있었다.
그렇게 세진은 일자리를 잃었고, 그 날 알프론과 제이앤에게 따로 집을 얻어서 살겠다는 통보를 했다.
"어째서?"
"그래요. 왜 따로 살겠다는 거죠?"
제이앤과 알프론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이 세진에게 물었다.
"이제 우리가 파티로 묶여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세진은 덤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제이앤과 알프론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어. 나 이외에 라훌족을 위한 보증인들이 생겨난 후로, 두 사람은 나와 파티를 계속 유지할 이유가 없었던 거야. 그런데도 나와 파티를 맺고 있으면서 에텔론을 손해 봤지."
"하지만 그건 나중에 세진이 그 이상으로 과하게 보상을 해 줬잖아."
"맞아요. 우린 세진이 우리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해 준 건줄 알았어요."
"그리고 이제 세진이 보증인을 할 수 없다면 세진도 사냥을 해야 할 거 아냐? 그렇다면 당연히 파티가 있어야 하지 않아? 그럼 우리하고 해도 되잖아."
"그렇죠. 이제부터 분배도 정확하게 삼등분 하는 걸로 하면 세진도 마음이 편하고 우리도 불만이 없을 거고 말이죠. 그럼 되는 거 아닌가요? 굳이 따로 나가 살아야 해요? 그리고 파티를 깨야 하는 거예요?"
알프론과 제이앤은 어떻게든 세진과 파티를 유지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사실 세진도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 둘과 세진 사이에는 실력 차이가 존재했다.
아무래도 알프론과 제이앤의 실력이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하면 세진은 떳떳하게 자기주장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따로 집을 얻고 새로 파티를 구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거기다가 헌터끼리의 파티는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라훌을 낀 파티보다 안정감이 있었다.
"굳이 나와 파티를 할 이유가 없잖아. 사냥을 해도 비슷한 실력끼리 해야지. 나도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주눅 들고 싶은 생각도 없고 말이야."
"주눅이 들다니 도대체 왜?"
알프론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원래 성격이 좀 그런 면이 있어. 파티란 것이 원래 대등한 조건이 되어야 하는 건데, 이젠 내가 두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이 없으니까 내 스스로 자격지심이 생기는 거야. 그래서 그런 거니까 둘이 이해를 해 줬으면 좋겠어."
"알았어요. 세진이 마음을 굳혔다면 우리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소용없는 일이겠죠. 하지만 우리가 친구인 것은 변함없는 거죠?"
알프론에 비해서 제이앤은 포기가 빨랐다. 다만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자세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야 당연하지. 우리가 싸우고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 상황이 좋아져서 헤어지는 거잖아. 라훌헌터들은 이제 에텔론 상점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되었고 말이야."
"세진만 손해를 보는 거 아냐?"
"무슨 소리를 모아둔 에텔론이 많으니까 앞날은 걱정이 없다고. 그리고 둘이 내게 맡겨 두고 있는 에텔론 때문에라도 우린 앞으로도 몇 번은 더 만나야 한다는 거 알잖아."
"그걸 줄 생각인가요?"
제이앤이나 알프론은 세진의 툴틱에 들어 있는 에텔론을 포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진은 제이앤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거야 당연하잖아. 그건 두 사람의 것이니까 말이야. 물론 아직까지도 두 사람에게 그 에텔론을 쥐어 줄 방법이 없지만, 둘이 그걸 쓰고 싶다면 언제든 이야기만 하면 함께 에텔론 상점으로 가 줄 거야. 각자 7500에텔론씩이나 내게 맡겨 뒀으니 우리가 파티를 해체해도 자주 만나야 할 이유는 있는 거지."
"정말이야? 그럼 다행이네. 난 또..."
"그렇군요. 앞으로도 우린 다시 만날 이유가 분명히 있네요. 다행이에요."
알프론과 제이앤은 그렇게 다행이란 말을 거듭했다.
세진은 그 '다행'이 에텔론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과의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알까. 궁금증만 품고 두 사람과 헤어진 세진이었다.
세진은 한동안 여관에서 머물렀다. 이전보다는 처음 레트시에 왔을 때 보다는 조금 수준이 높은 여관에 방을 얻은 후에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그런데 집을 사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집은 헌터 신분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레트시(市)의 주민으로 등록을 해야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헌터 신분만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그런 신분으로는 이 행성에선 부랑자나 마찬가지인 상황인 것이다.
물론 헌터를 부랑자 취급하는 경우는 없지만 일단 무적자(無籍者:국적이나 학적 등의 소속이 없는 사람)란 것은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집을 사기 위해서 세진은 레트시의 주민으로 등록 했다.
알고 보니 헌터들도 대부분 시민증이나 주민증 같은 신분증을 만든다고 했다.
아무래도 여관에서만 지낼 수는 없으니 초보 헌터들도 어느 정도 적응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집을 구하는데 그러자면 자연스럽게 신분증을 만든다는 것이다.
세진은 집을 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1년이 넘는 시간을 레트시에서 보내고도 신분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물론 초보 헌터들이 적응해서 집을 사는데도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으니 딱히 세진의 시민 등록이 늦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신분이 생긴 세진은 300에텔론을 투자해서 아담한 집을 하나 구했다.
제이앤과 알프론의 집과는 많이 떨어진 레트시 남문 근처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했던 것이다.
특히 세진이 그 집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집을 관리하고 의식주를 책임질 고용인이 딸려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전 집주인이 누구였는지 몰라도 그 집에 고용되어 있던 라훌족이 있었다.
드레드와 일랜드라는 남녀 라훌족이 그들인데 둘이 남매라고 했다.
이전부터 그 집에서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는 평범한 라훌족이었다.
라훌헌터가 아니면 몬스터 사냥은 할 수 없으니 무엇이건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
그것은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같은 것이다.
드레드와 일랜드는 이십대 초반으로 철이 든 후로는 계속해서 헌터들의 집에서 일을 해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집주인이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집이 시(市)의 재산이 되었다가 또 세진이 새로운 주인이 되면서 얼떨결에 세진의 집에 그대로 고용 승계가 이루어진 경우였다.
어쨌거나 세진으로선 그들에게 적절한 임금을 주고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편한 것이 좋은 것이다.
그 비용만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