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39화 (39/298)

< -- 추석이라 달이 휘영청 -- >

- 심심해요. 세진님.

"왜? 친구들이 안 놀아줘?"

세진은 에테르 로드 수련법에 집중하다가 어리의 투정에 깨어났다.

- 어린애들이라서 재미없어요. 매일 친구들 이야기 아니면 선생님 이야기나 하잖아요.

"좀 더 나이가 있는 아이들하고 놀지 그러냐? 그런데 초딩들도 까똑을 하냐? 걔들이 글이나 제대로 알아? 넌 저학년이랑 놀잖아."

- 나름 똑똑한 아이들이죠. 어리는 그 정도는 되어야 친구 삼아 줘요.

"그러냐? 그런데 그렇게 똑똑한 아이들이 왜 어리를 심심하게 했을까?"

조금 있으면 추석이라고 모두를 바쁘데요. 사실은.

"어쭈? 이젠 거짓말도 해? 어리 많이 컸다.

- 거짓말 아니에요. 어리는 세진님께 거짓말은 안 해요. 사실이 아니어도 세진님과 무관한 거면 거짓말이 아닌 거예요.

"그러셔요? 네네."

- 그런데 세진님은 추석에 뭐 해요?

"우리 집안은 추석이나 설날 그런 거 없다. 이번에도 부모님은 여행 가실 거고, 나는 여기서 너하고 놀아야지 뭐. 연휴 전에 집에 가서 인사나 드리면 그걸로 끝나는 거지."

세진은 일가친척 없는 부모님의 외아들이라 명절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세진의 부모님도 제사는 못 지내도 차례는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예전에는 차례 상을 차리고 설날과 추석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상을 차려도 부부와 어린 세진만 있으니 흥도 나지 않고 오히려 서러움만 커지는 것 같아서 그만 둔 것이다. 그 때문에 세진도 철이 들고 나서는 차례를 지낸 경험이 없었다.

이번 추석도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는 세진이다.

- 그렇구나. 그런데 수련은 어때요? 전에 이야기한 유저 수준은 되는 거 같아요?

"아직 멀었다.

여기 지구의 에테르가 저쪽에 비하면 30%도 안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아무래도 진도가 느려. 저쪽 지하창고도 에테르가 없고, 헌터룸에도 에테르가 없으니 따로 수련을 하려면 생체에테르바디를 모두 폐기하고 이 몸으로 직접 데블 플레인에 가는 수밖에 없는데 그건 너무 위험해서 안 되고."

- 맞아요. 위험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해요. 우리 세진님 무슨 일 생기면 어떻게 해요.

"그렇지? 역시 우리 어리는 날 무척이나 위해 준다니까. 하하."

세진은 어리의 둥근 표면을 쓰다듬어 준다. - 음, 그런데요 세진님.

"왜?"

-그럼, 그 디버프라는 건 어때요?

"보통 걸음으로 열 걸음 정도니까 8미터 정도? 그 안쪽은 에테르를 펼칠 수 있지. 하지만 그래봐야 별 소용은 없어. 사람들을 공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 왜 안 되는 건데요? 설마 여기 사람들 몸에 에테르가 없어서 그런 건가요? 서로 충돌할 일이 없으니까?

"그렇지. 역시 똑똑한 우리 어리. 바로 그 때문에 디버프가 별로 소용이 없는 천덕꾸러기가 된 거지. 하지만 익스퍼트가 되면 충분히 위력적인 무기가 될 거다.

그 때는 대상의 몸에 심은 에테르를 뭉쳐서 터트릴 수 있게 되니까 말이지."

말 그대로 몸 안에 에테르가 없는 경우에는 디버프를 이용한 공격을 할 수가 없다. 서로 충돌할 에테르가 없기 때문이다.

- 그런 건 몬스터한테나 써야죠. 사람에게 쓰실 생각은 아니시죠?

"사람에게?"

세진은 어리의 질문에 자신이 지금까지 익스퍼트가 되어서 그런 능력이 생기면 그걸 사람에게 쓸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딱히 누구라고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내심으로는 그런 능력이 있으면 완벽한 살인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었던 것이다.

'디버프를 익히면 사람들을 들키지 않고 해치울 수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던 거네? 내가 무슨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뭐야? 이건.'

사실 정확히 말하면 세진은 능력에 대한 욕구가 있었던 것이지 살인에 대한 욕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그 능력 자체가 살상에 사용하기 딱 좋은 것이니 그런 식의 발상이 이어졌을 뿐이다.

그런 것을 두고 세진은 약간 엉뚱한 걱정을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써야겠다는 생각은 없는데? 그리고 지금은 그냥 주변을 살피는 용도로 쓰고,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반응을 살피는데 쓰는 정도지 뭐."

- 그렇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어."

- 뭐가요?

"내 몸 안에 에테르가 있고, 이걸 몸에 퍼트리면 분명히 방어력이 올라가야 하는 거거든?"

- 그런데요?

"그런데 망치 같은 걸로 때리면 아프거든."

- 그게 이상해요?

"야, 칼에 찔려도 상처가 안 나야 정상인데 망치 맞았다고 아프면 되냐?"

- 그거 세진님 에테르가 아직 약하기 때문 아닐까요? 여긴 워낙 에테르가 적으니까 말이죠.

"하긴 이제 유저 초급이나 겨우 될까 말까 하는 수준이니 어리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 우와, 어서 빨리 세진님이 무징무징 강해져야 하는데 말이죠.

"무징무징은 또 뭐냐?"

- 귀욤 어리의 필살기 용어 중에 하나요.

"그것도 까똑 친구가 알려 준 거냐?"

세진은 추석이 예전과 같이 한가롭게 지나가리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절대 그런 꼴을 볼 수 없다는 인물이 있었다.

"그럼 추석에 부모님은 여행가시고 세진씨는 공방에서 혼자 지낸단 말이에요?"

"그렇지. 뭐."

"아니 그게 말이 되요?"

선정은 살짝 목소리가 높아졌다.

'추석인데, 그러면 당연히 차례를 지내고, 차례 상을 물리면서 모여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또 아직 결혼 안 한 과년한 남녀는 당연히 사귀는 사람 있냐? 없냐? 묻고, 있다고 하면 왜 안 데리고 오냐고 하고 뭐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선정은 내심 이번 추석에 세진의 소개로 세진의 부모님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앙큼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사귄지 100일이 넘었는데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느냔 욕심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얼마 전부터는 세진이 자신에게 말을 놓도록 하는데 성공해서 이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집 앞에 바래다 줄 때는 의례 그랬다는 듯이 짧은 입맞춤도 해 주고 그러는 걸 보면 확실히 가까워진 상태라 그런 기대를 했던 건데, 그런 추석 계획이 물거품이 되게 생긴 것이다.

"어쩌겠어? 부모님 모두 일가친척이 없는 분들인 걸."

"그럼 말이죠. 세진씨가 우리 집에 와서 송편도 빚고 그러면서 놀아요. 추석 전날에요."

"엉? 뭐?"

"집도 가까운데 와서 놀다가 가면 되잖아요. 추석 당일도 아니고 전날이면 부담도 적잖아요."

선정은 이참에 계획을 바꿔서 세진을 먼저 자기 집에 소개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까짓 순서가 뭐가 중요해? 내가 나중에 가도 되는 거지.'

세진은 선정의 갑작스런 제안에 꽤나 당황했다.

선정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고, 또 약간의 스킨십도 하고 그런 사이가 되었지만 아직 결혼이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이제 곧 서른이 되는 나이에 여자와 사귀면서 미래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이제 만난 지 100일이 조금 지났을 뿐이고, 세진으로선 중간에 식었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고난의 시간도 있었던 터다.

그런데 선정이 집에 가잔다. 그게 그냥 추석 전날 와서 놀다 가라는 의미가 아님은 세진도 뻔히 알 수 있다.

집안 어른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겠다는 의미다.

'여기서 못 간다고 하면?'

세진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물론 선정의 집에 가는 것도 식은땀이 흐를 일이지만 그보다 선정에게 쥐어뜯기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비, 빈손으로 갈 수는 없고, 뭐 사가지고 갈까? 아버님 뭐 좋아 하시지? 어머님은?"

"아버님? 어머님?"

"그럼 뭐라고 해? 선정이 네 아버지 어머니잖아."

"아니. 그냥 세진씨가 우리 엄마 아빠를 그렇게 부르는 게 낯설어서 그런 거에요."

선정은 돌아서며 살짝 머리를 두드렸다.

'이그, 설마 첨부터 장인, 장모라고 할까? 뭘 기대한 거야? 바부팅! 호호 그래도 온다고 하는 걸 보면 역시 세진씨도 마음이 영 없는 건 아니야. 그럼.'

그 '바부팅'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 세진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몰라도 선정은 그렇게 살짝 투정을 부렸다.

"뭘 꼭 가지고 올 필요는 없는데요. 그래도 빈손으로 오기 어색하면 보통 추석에 들고 다니는 그런 걸로 사면되겠네요. 선물세트 뭐 그런 거. 식용유나 올리브유 같은 것 들어 있는 거 말이에요."

"그런 걸로 될까? 그래도 뭐 좀 더 나은 걸로 해야 하지 않아?"

선정으로서야 더 좋은 선물을 들고 오고 그래주면 고마운 일이지만 또 대놓고 그렇게 하라고 하기도 어렵다. 갑작스럽게 집으로 초대를 하는 건데 거기다가 추석이라 선물도 부담이 되게 생겼다.

세진에겐 솔직히 미안한 일이다.

"아네요. 갑자기 가는 건데 준비고 뭐고 필요도 없는 거죠. 그러니까 그냥 오기만 하면 돼요."

선정은 이번에는 진심으로 아무거나 손에 들고 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 빈손이라도 오기만 하면 성공인 거라 여겼다. '오케이. 일단 온다고 했으니까 이걸로 한 껀 한 거다.

화이팅 심선정!'선정은 살짝 뒤를 돌아서 주먹을 쥐고 살짝 들었다가 가슴 앞으로 끌어 내렸다. 세진이 보지 않는 틈을 탄 행동이지만 디버프 기반 에테르를 깔고 다니는 세진은 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는 행동이다.

'하는 짓을 보면 귀엽단 말이지. 하하.'

세진은 선정의 그런 행동들이 사실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욕심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보면 소박한 면이 많은 여자다.

자신이 하는 공방의 수입이 제법 된다는 것을 모르는 척 하지만 또 알고 있다는 티를 철철 흘리고 다닌다. 세진이 돈을 제법 번다는 것을 알고 마음에 들어 하지만 또 그것만이 세진과 만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란 것을 때때로 보여준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작은 행동이나 표정이나 심장의 고동소리 같은 것으로.

세진은 그래서 아주 느리지만 꾸준하게 심선정이란 여자에게 물들고 있었다.

"그럼 우리 좀 늦긴 했지만 구리 백화점에 가 볼까?"

"백화점요? 설마 선물 사려고요?"

"응. 가는 김에 선정이가 내 옷도 하나 골라주면 좋고. 이번 추석에 입고 갈 걸로 말이야."

"아, 옷. 하긴 세진씨 양복은 안 입고 다녔죠? 양복이 없어요? 그런데 굳이 양복을 입어야 하나요? 아, 그건 당연한가?"

"아니 있긴 하지. 전에 회사 다닐 때에 입고 다니던 것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특별하니까 새로 맞추진 못해도 사 입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리고 선정이도 내가 추석 선물로 소품 하나 사 줄게. 지갑이나 목걸이 같은 거? 어때?"

"아아아뇨오. 전 괜찮아요. 추석 선물은 무슨. 나도 준비 못했는데요. 그, 그냥 세진씨 옷이나 사요. 그리고 우리 집에 들고 갈 선물은 요 앞 슈퍼에서 하나 구하면 되요. 오는 날 사면 되겠네요."

선정은 기겁을 했다. 백화점에 가서 선물을 사고, 옷을 사는 것 까지는 좋은데 자신에게 줄 선물도 사 준단다.

그럼 선정도 세진에게 선물을 하나 해야 할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그걸 백화점에서 사려면 추석 보너스가 나와도 모자랄 일이다. 극구 사양할 일인 것이다.

하지만 선정은 백화점으로 향하면서 이번 추석 보너스는 세진의 선물을 사느라고 날아갈 거란 예감이 진하게 들었다.

뭐가 되었건 세진이 선물을 할 테고, 그걸 받으면 그 자리에서는 아니어도 세진이 집에 오는 날에 맞춰서라도 선물을 준비해야 할 테니까 말이다.

'비싼 거 안 사주면 좋겠는데. 세진씨 의외로 씀씀이가 헤픈 것 같던데 걱정이네. 히잉.'

선정은 그렇게 걱정을 하며 세진에게 끌려서 구리에 하나뿐인 대형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날, 선정은 세진이 정말로 씀씀이가 헤프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래서 세진을 말리느라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다른 사람들은, 남자들이 여자하고 쇼핑하기 싫어한다는데, 나는 세진 씨랑 쇼핑가는 거 싫어 할 거 같아.'

결국 세진이 사 준 스카프 한 장으로 선물을 마무리하는데 성공한 선정은 집으로 돌아와서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세진 씨 양복 입은 모습 멋졌어. 캐주얼 보다 훨씬 나은 거 같아. 히힛.'

인상을 쓰다가도 세진의 모습을 떠올리곤 푼수처럼 웃는 선정이다.

선정의 머리 위로 이제 곧 만월이 될 달이 슬그머니 내려다보고 있다.

============================ 작품 후기 ============================오늘도 열심히 했습니다.

추천!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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