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완벽하게 당했군, 당했어! -- >
- 이산하 이강토, 그들이 적이 될까요?
테멜의 중앙 홀 탁자에 앉아서 고민 중인 세진에게 어리가 물었다.
세진이 고민을 하고 있는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석성에서 이산하와 이강토 두 사람에게 갑옷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는데 그 대가가 유람선이란 사실 때문이었다.
세진도 마음을 먹고 유람선을 만들자면 못 만들 것도 없었다. 그만한 돈이야 마련하자면 못할 것도 없는 세진이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다. 배 한 척을 만드는데 적어도 몇 년은 걸릴 텐데, 세진 성격에 그런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다. 차라리 중고라도 어디서 사고 말 사람이 세진인 것이다. 그런데 석성에서 방금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유람선을 대가로 주겠다며 벗에게 갑옷을 주문했다.
"갑옷을 입으면 각성자들의 성장이 빨라지지. 김혜인 박사와 정진이 경호원을 보면 알잖아. 벌써 떡배나 김형일을 거의 따라 잡았어."
- 점차 성장이 느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죠. 그리고 김박사님이랑 진이씨가 성장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애초에 생긴 차이가 메워진 것은 아니에요. 먼저 시작한 떡배씨랑, 형일씨를 추월하긴 어렵죠.
"아무튼 그 이산하와 이강토, 그 놈들에게 갑옷을 만들어 주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는단 말이지."
- 그런데 그 배는 가지고 싶다 뭐 이런 거죠?
"그렇지."
- 그냥 배를 만드세요. 음, 여기서 만들면 일종의 모듈 형식으로 찍어내서 조립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럼 설계 자체를 아예 새로 해야 하나요?
"그 정도 크기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아직은 너도 무리지 않을까?"
- 욕심이에요. 그렇게 큰 배를 가져서 어디에 쓰려고요?
"원래 남자는 그런 로망이 있는 거야. 차나 비행기, 배 같은 걸 가지고 싶어 하는 그런 거 말이야."
- 하지만 운전도 할 줄 모르시고, 또 딱히 갈 곳도 없잖아요. 그 배를 바닷가에 세워두고 뭐 하실 건데요?
"그냥 배에서 살면 좋지 않을까?"
- 그걸 거면 그냥 바닷가에 집을 하나 사시죠?
"역시 어리는 남자의 로망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 그래서 갑옷 만들어주고 그 큰 배를 받으시게요? 그거 200명 정도는 탈 수 있는 배라면서요?
"조금 큰가?"
- 조금이 아니죠. 그런 거 가지고 있으면 거기 직원들도 고용을 해야 하잖아요. 관리도 맡겨야 하고, 또 운항도 맡겨야 하는데요?
"그냥 한강에 띄워달라고 하고 거기서 살면?"
- 해마다 장마철이 되면 배가 떠내려가지 않을까 걱정하면서요? 참으세요 세진님.
"하긴 어리 네 말이 맞긴 하지. 그럼 그건 관둔다고 하고, 이번에 사고 친 기린그룹의 문제는 어떻게 할까?"
세진은 결국 석성의 제안을 거절하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사실 애초부터 유람선을 받고 갑옷을 만들어 줄 생각도 없었던 세진이다. 배는 탐이 나는데 석성의 산하와 강토 형제는 좀처럼 마음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이야기한 기린 그룹의 문제는 그곳에서 2등급 몬스터 영역을 만들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였다.
역시나 무슨 연구를 한다고 설치다가 그렇게 된 것인데, 지금 그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국민들은 정부가 에테르 코어에 대한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성토하고 있었고, 정부는 경찰 열 명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기린 그룹의 불법 행위를 질타하고 있었다. 덕분에 기린 그룹은 정부의 대대적인 감사를 받고 있는데 계열사 하나를 놓고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전체를 두고 이루어지는 감사여서 이번 일로 재계의 그룹 순위가 바뀔 거라는 소리가 있었다.
물론 2급 몬스터 영역의 발생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보상을 하려면 계열사 몇은 처분을 해야 할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니 기린 그룹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세진에게 2등급 이면 공간의 처리를 부탁해 왔다. 지금 세진이 어리와 의논하려는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어쩔까? 가서 도와줄까? 아니면 한 번 당해 보라고 그냥 둘까?"
- 세진님 그 회사가 일본 자본이 많은 회사라고 지금 그러시는 거죠?
"아니, 꼭 그런 것은 아닌데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문제를 일으켰으니까 좀 당해보라고 두고 싶다는 거지."
- 그럼 그렇게 하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또 그 놈들 때문에 고생하는 일반인들이 문제잖아. 그들이 무슨 죄가 있냐 고. 사실 우리가 힘이 없으면 몰라도 힘도 있는데 그냥 두고 보는 것도 못할 짓이고 그렇잖아."
- 솔직히 말씀하세요. 석성 특별팀이 인기가 많아지니까 우리 팀도 뭔가 해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신 거죠?
"뭐 그런 면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 그럼 기린 그룹에서 대가를 확실하게 받고 일을 해 주세요. 뭘 받으면 좋을까요?
"그 놈들 땅부자라던데? 알게 모르게 땅이 많다고 하더라고. 그거나 좀 달라고 하고, 아예 우리도 어리 공방을 새로 짓는 것이 어떨까?"
- 아, 그거 좋겠네요. 여기도 나쁘지 않긴 하지만 사람들이 접근하기가 너무 좋은 거 있죠? 그러니 좀 넓은 곳으로 새로 구해봐요. 옥상에 있는 텃밭도 마당으로 옮길 수 있는 곳으로요.
"겨우 텃밭? 아예 정원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넓은 땅으로 하자. 어떠냐?"
- 좋아요. 그렇게 해요. 그럼 이번에는 우리 식구들 모두 가는 거예요?
"그래야지. 김혜인 박사와 정진이씨도 1등급을 상대로는 충분히 연습을 한 것 같으니까 말이다."
결국 세진은 테멜까지 들어와서 고민하던 문제 두 가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테멜을 나섰다.
"쯧, 그래도 그렇지 화장실이 뭐냐?"
= 사람들 없는 곳. 제일 좋아. 안전해.
어리 앵무가 세진의 어깨 위로 올라오면서 쫑알거린다.
어리 앵무의 배에 테멜 목걸이가 들어 있다. 그러니 어리 앵무가 움직이면 테멜의 입구가 움직이게 된다. 세진이 밖으로 나올 때가 되면 어리 앵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 세진을 나오게 하는데 이번에는 화장실이었던 것이다.
세진 일행은 오산시 동쪽으로 나왔다. 오산 시청의 동쪽으로는 고속도로가 있고, 그 고속도로 동쪽으로 붙어서 이름도 없는 산이 하나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산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적지 않은 저수지들이 있다는 것이다.
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산척지라는 못이 있고, 그 산의 기슭에 산을 포위하듯이 장지리저수지를 시작으로 원동2지, 부산지, 원리저수지, 고현저수지가 있고 일부러 조성한 낚시터가 또 두 곳이나 있다.
높지도 않은 작은 산 하나를 중심에 두고 빙 돌아가며 저수지와 낚시터 등이 자리를 잡고 있는 특이한 곳인데, 여기에 기린 그룹의 인재양성소가 있다.
문제는 그 인재양성소라는 곳에서 실험을 한다고 설치다가 이곳에 2급 몬스터 영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속도로가 막혔다더니 정말이네요?"
"거기다가 오산 시청도 위험 범위 안에 들어가지. 아주 문제구먼. 그러니 기린 그룹에서 난리가 나고 정부에서 죽이네 살리네 하는 거겠지."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몬스터가 특이하다면서요?"
김형일과 떡배의 대화에 정진이가 끼어든다.
"남자의 로망이지. 딱 그런 건데 하필 여기서 나와서는. 쯧쯔."
"하긴 남자라면 어려서 한 번은 그런 꿈을 꾸지. 그렇게 예쁘고 착한 마누라 얻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그런..."
"맞습니다. 세진님. 딱 그거라니까요. 제가 읽은 동화책이 별로 없는 데도 그 이야기만은 가슴에 꽉 박혀서 잊히지 않았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하필 그런 동심을 오늘 여기서 버려야 하니 슬픕니다."
"떡배 아저씨 좀 참아 줘요."
"진이씨는 여자라서 몰르는 겁니다. 아마 여기 나타난 몬스터 소식 듣고서 남몰래 가슴으로 눈물 흘린 남자들이 엄청나게 많았을 겁니다. 저 보십시오. 선도일씨도 침울하지 않습니까."
"어머, 정말 그런 거예요? 도일씨도 그래서 출발 할 때부터 그렇게 말이 없었어요?"
김혜인 박사가 뜻밖이란 듯이 선도일을 보고 물었다.
[[우렁각시는 대한민국 모든 남자들의 꿈이나 다름없는 대상입니다. 최고의 배우자감이죠.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머나 정말인 모양이네? 그러고 보니 세진님은 물론이고 모두들 그리 썩 내켜하는 모습이 아니었던 이유가 그거였군요?"
= 남자의 로망. 우렁각시는 남자의 로망. 여자의 로망은 돈 많고 명 짧은 놈.
"저건 또 어디서 저런 말을 배운 거야? 확실히 새가 각성을 한 것도 특이하지만 아무튼 생각이나 말도 특이한 녀석이야."
정진이가 도일의 반응에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다가 어리 앵무의 이어진 말을 듣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자, 갑시다. 어서 들어가서 정리하고 나오는 걸로 하죠. 최대한 몬스터와의 싸움을 피하고 이면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세진이 흐트러지는 분위기를 바로 잡으며 몬스터 영역으로의 진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행들은 중간에 두 마리의 우렁각시를 처리하고 드디어 이면 공간으로 들어오는데 성공했다.
우렁각시는 그냥 엎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 집을 등에 지고 다니는 게를 연상시켰다.
산을 중심으로 저수지와 보, 낚시터 등이 많아서 그런지 우렁각시가 몬스터로 등장한 것인데, 어떻게 보면 달팽이집을 등에 지고 다니는 여자의 모습을 닮기도 했다.
우렁각시의 공격 방법은 원거리에서는 뾰족한 침을 쏘아 내고 가까이 다가가면 몸을 등껍질 안에 넣은 상태로 굴려서 부딪히거나, 벌떡 몸을 일으켜서 손으로 공격을 하는 형태였다. 그러면서 간혹 혀를 길게 뻗어서 공격을 하기도 하는데 가장 강력한 공격 수단이 의외로 바로 그 혀 공격이었다. 가장 많은 생체에테르를 품고 있는 곳이 바로 혀였던 것이다.
김형일 조차도 그 혀 공격을 정면으로 받으면 충격을 받고 멀리 밀려날 정도였다. 그래도 그것만 잘 피하면 어렵지 않게 공략이 가능했다. 물론 원거리에서 하는 침(針) 공격은 몸으로 때우며 전진해서 달라붙는 형일이 없으면 꽤나 곤란한 했을 수도 있지만 가까이 사람이 붙으면 그 후로는 근접 공격을 하는 녀석이라 다행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요?"
김혜인 박사가 이면 공간 안으로 들어오자 세진에게 물었다. 이면 공간 안으로 들어왔지만 막상 목표를 잡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게 여긴 저수지나 낚시터 같은 곳이 많아서 우두머리가 어디 있을지 특정하기가 어렵네요?"
"그렇죠? 어쩔 수 없이 시계 방향으로 모두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세진의 말에 도일도 난색을 표했다. 이면 공간에 몬스터 우두머리가 어디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정말 곤란한 일이었다.
전체를 다 뒤지고 다녀야 한다는 이야기니 말이다.
"하는 수 없지요. 그래도 돌아다니다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박사님이란 진이씨가 있으니까 사냥이 훨씬 쉬운 것 같은데 이참에 손발을 맞추는 연습이나 오지게 하고 나간다고 생각하면 되지요."
"떡배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천천히 하시죠."
"딱히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여기 지형을 보니 가장 가까운 곳이 장지리 저수지로군요. 크기도 제일 큰 곳이니 우두머리가 있을 가능성도 제일 많을 겁니다. 그리고 먼저 가도록 하죠."
세진이 일행을 이끌고 장지리 저수지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온다. 온다. 우렁각시 온다.
그런데 얼마 가기도 전에 어리의 경고성이 울렸다. 그렇게 세진의 길고 험난한 사냥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