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191화 (191/298)

< -- 우리가 좀 오래 있었나봐. -- >

"으음. 후아아."

"아아아."

세진과 자넷은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잠시 말없이 의자 등받이에 기댄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다시 하라면 못 할 짓인 것 같아."

침묵을 깬 것은 세진이었다.

"그래?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경험하고 싶은데?"

자넷은 세진과는 다른 감상을 토로했다.

"후훗, 자넷은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호호홋 맞아. 나 지금 아주 신나!"

자넷의 목소리에 생생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지. 확실히 이번 경험은 다시 얻기 어려운 기연이라고 할만 했으니까."

"나 있잖아. 갑자기 6등급 이면 공간 유지 코어가 막 가지고 싶은 거 있지?"

"너, 전에 거기 괴수 등급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 건 기억 안 나는 모양이지?"

"괴수가 없는 곳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던 기억은 나는데? 그리고 괴수라도 한 번 붙어 볼만 하지 않을까? 안 되면 물량전이라도 하는 거지 뭐."

"쯧,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나기 마련이야. 그리고 어리가 준비가 될 때까지는 어림도 없어. 그리고 어리의 준비가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그건 자넷 너도 알지?"

"그래 알아. 하지만 기회가 되면 반드시 6등급 이면 공간 유지 코어를 얻어 둬야 해.  그래야 나중에 어리가 준비가 되면 으흐흐흐흐."

"그러다가 한 방에 훅 가는 수가 있어. 이번에도 엄청 힘들었다고."

자넷의 묘한 웃음소리에 세진이 살짝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 타박을 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어리홀이었다. 어리의 코어가 있는 단을 탁자로 쓰는 곳에 마주 앉아 있는 것이다. 곁에 있어야 할 어리의 의체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 어리는 5등급 이면 공간 유지 코어의 흡수로 인한 여파를 마지막으로 정리하느라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번 코어 흡수는 무척 힘겨운 과정을 거쳤다.

의외로 5등급 이면 공간 유지 코어가 지니고 있는 의지가 강렬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이 코어가 어리와의 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하자 곧바로 게릴라 작전을 펼쳐서 어리와 세진, 자넷을 힘들게 했다.

사실 처음에는 5등급 이면 공간 유지 코어의 의지가 어리를 압도했다. 예상치를 훨 씬 초과하는 강한 의지에 어리가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평소 어리가 꼬마 여자아이의 모습을 주로 하고 있었던 것도 문제가 되었다. 어쩐지 어리의 정신이 그 외양에 맞춰서 조금씩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모에 따라서 행동과 말을 하다보니 그 정신까지 닮아간 것이다.

그렇게 확 밀리는 어리의 위기를 구한 것이 세진이었다. 세진은 어리와 정신이 연결되어 있었으니 다급한 어리 앞으로 나서서 이면 공간 코어의 의지와 맞서 싸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되었는데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루해진 자넷이 여기에 난입을 했다.

자넷 역시 에테르를 이용한 정신 능력을 사용하고 그 수준이 그랜드 마스터의 초입까지 이른 사람이었다. 그런 탓에 몇 번의 시도 끝에 어리와 세진이 한참 싸우고 있는 전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우연이 겹친 결과라고 봐야겠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된 후부터 5등급 이면 공간 유지 코어는 확실하게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망친 녀석이 숨은 곳은 하위 코어들. 어리가 관리하던 코어들 속으로 숨어들어간 것이다.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숨은 복병을 그대로 방치했다가 나중에 어떤 일을 겪게 될 지 알 수 없으니 반드시 잡아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이 때부터는 역할 분담을 했다.

어리는 5등급 이면 공간 유지 코어의 의지가 빠져나간 코어의 흡수에 전력을 다하고, 세진과 자넷은 숨어버린 의지를 찾아서 하위 테멜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결국 그 놈을 찾은 곳이 하필이면 모랜, 즉 몬스터 랜드였고, 그 중에서도 요로이 갓파를 가둬 두었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요로이 갓파를 차지한 의지는 한편으로는 7등급 몬스터들을 양산해서 몬스터 랜드를 장악하려 들었고, 한편으로는 의지를 외부로 연결해서 모랜을 차지하고 더 나아가서는 어리를 공략하려는 수작을 부렸다.

그런 녀석과 끝도 없는 싸움이 벌어졌다.

세진과 자넷은 이면 공간 유지 코어의 의지와 싸우느라 따로 몬스터를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결국 몬스터는 모랜과 어리가 상대를 해야 했는데 모랜에서 생성 가능한 수준은 고작 4등급 몬스터. 그러니 요로이 갓파가 만들어낸 몬스터와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끝도 없는 패배의 연속.

하지만 그래봐야 모랜의 영역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일 뿐이었다.

물론 그 때문에 헌터룸은 모랜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서 운영을 해야 했다.

모랜 내부가 갓파들에게 점령되다 시피 했으니 실력이 보잘것없는 의체들이 나설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리 공방의 5인조 파티도 마찬가지였다.

얼떨결에 헌터룸에 있다가 세진과 자넷이 지하 창고로 오면서 함께 딸려온 그들은 우이동에 있는 어리 공방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냥 테멜에서만 생활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어쨌건 그들조차 겨우 2등급을 넘어서 3등급 몬스터를 사냥하는 수준이니 7등급이  날뛰는 모랜에 의체 사용자들을 풀어 놓지 못하고 다른 테멜에 작은 사냥터를 만들어서 임시로 운영을 했다.

어쨌건 제법 긴 시간동안 싸움이 이어졌고, 결국 모랜과 어리가 요로이 갓파가 부하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본떠서 7등급 몬스터들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고 나서야 모랜의 몬스터 전쟁은 끝이 났고, 그 결과 요로이 갓파까지 죽을 지경에 이를 정도의 타격을 받게 되자 결국 5등급 이면 공간 유지 코어의 의지도 견디지 못하고 세진과 자넷에게 함께 죽자고 달려들었다.

그 때부터 세진과 자넷, 그리고 어리까지 한꺼번에 그 의지의 공격에 휩쓸려서 엄청난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모든 역경을 헤치고 돌아온 것이다.

"이 얘는 왜 이리 늦어?"

자넷이 어리가 나타나지 않자 살짝 짜증은 부렸다.

그런데 그 순간 탁자 위에 음식들이 한 가득 나타났다.

"와, 먹을 거다."

자넷이 반색을 했다.

"그러고 보니 배가 무척 고프네?"

"응, 맞아. 맞아."

"그건 두 분이 워낙 오래 아무것도 드신 것이 없어서 그래요. 이곳에서 머무시는 동안에 계속해서 회복 캡슐의 힘으로 버티신 거예요. 그래서 지금 몸의 영양 상태는 최악에 가까워요."

어느새 어리가 나타나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리의 모습은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꼬마 여자아이의 모습이다.

이번에 힘든 싸움을 거치면서 적잖게 성장을 했지만 어쩐 일인지 어리는 능력이 성장한 것에 따라서 정신 자체의 성장은 이루지 못했다.

이번 싸움에서도 코어의 의지와 싸운 것은 대부분 세진과 자넷이었다. 그러는 동안 어리는 코어의 기능이나 힘을 흡수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이를테면 어리는 어른들 뒤에 숨어서 맛난 것을 먹으며 놀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고난속의 성숙 따위는 알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 있었지? 어리야 우리가 이곳으로 와서 얼마나 지난 거야?"

"우웅, 어리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3년 6개월 정도 지난 거 같아요?"

"뭐? 뭐라고?"

"3년이냐? 아니 우리가 여기 온 것이 3년이나 지났다고? 그게 정말이야?"

세진은 물론 자넷도 깜짝 놀랐다.

"맞아요. 두 분이 모랜에서 그 녀석을 찾아 낼 때까지는 약 닷새 정도 걸렸고, 거기서 다시 모랜의 몬스터 전쟁을 하느라고 두 달이 넘게 걸렸죠."

"좋아. 그 정도는 이해를 한다. 그런데 나머지 시간은? 그 빌어먹을 놈이 우리에게 확 달려들어서 정신 세계에서 싸웠던 시간이 3년이 넘게 걸렸단 말이야?"

"어리도 세진님하고 언니하고 함께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어리도 왜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는지는 몰라요. 그냥 정신을 차리고 테멜의 전체 상황을 살필 수 있게 되었을  때 확인을 해 보니까..."

"잠깐만."

세진이 어리의 말을 멈추고 스스로 테멜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한 번에 한 곳을 살피는 것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한 번에 열 곳을 살필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의 영역이 확장되어 있는 세진이었다.

"이건 뭐야? 떡배가 아빠가 되었어?"

"뭐?"

"형일이는 거기다가 쌍둥이네?"

"풋!"

떡배 이야기엔 그냥 잠깐 놀라던 자넷이 형일의 이야기엔 입에 물고 있던 음식을 뿜었다. 그나마 옆으로 고개를 돌렸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탁자위의 음식들 전부에 찜을 할 뻔 했다.

"선도일도 연애를 시작한 건가? 왠 여자하고 돌아다녀? 어쨌건 정말로 3년 넘게 시간이 흐른 것은 맞는 모양이네. 그나저나 그 사이에도 용케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네? 어리가 관리하는 시스템들이 많이 다운되어서 편의 시설도 끊기고 외부와 연결도 되지 않고 했을 텐데?"

"정말 그러네? 그렇게 시간이 흘렀으면 뭔가 일이 생겨도 생겨야 하지 않나?"

"어리는 바보가 아니에요. 다른 테멜들에게 일을 분담시켜 뒀었어요. 특별히 새로운 일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이미 하던 일들은 그 녀석들이 알아서 처리를 해 줬을 거예요. 물론 외부와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여긴 지구가 아니니까요."

어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한다.

부하들이 일처리를 잘 해 둔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는 표정이다.

"그래 잘 했다."

세진은 어리에게 칭찬을 해 준다. 이젠 어리가 제 외모에 어울리는 정신 연령을 지녔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테라포밍을 위한 기계의 인공지능에서 출발한 어리는 태생적으로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존재라는 틀을 벗어나진 못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이면서도 온전히 하나의 인격체로 거듭난 어리는 또 그에 맞는 대접을 해 주는 것이 옳다고 세진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럼 지구는 어떻게 된 거지?"

자넷이 뜬금없이 물었다.

"뭐가?"

"3년 넘게 지났으면 지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는 일이잖아. 벗이 3년 넘게 활동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우리가 떠나기 전에 지구엔 108개의 G스페이스가 생긴 상황이었다고. 그게 지금까지 어떤 변화를 만들어 냈을지 궁금하지 않아?"

"그건 또 그러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 것이에요. 이제 어리는 무적 군단의 주인인 것이에요. 호호호. 5등급 이면 공간이고 뭐고 어리가 다 점령을 해 버릴 것이에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리가 큰소리를 친다. 어리는 모랜에서 요로이 갓파를 상대하면서 몬스터들의 생성 등급을 7등급까지 끌어 올렸다.

다시 말하면 어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몬스터의 등급이 7등급 몬스터까지가 되었다는 소리다. 물론 중간에 5등급과 6등급은 아직 만들지 못하지만 어리는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았다. 이젠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런 등급의 우두머리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호호호, 이제 어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에요."

"쯧, 어리야. 그래봐야 7등급이다. 그 위로 괴수, 지역 코어, 대륙 코어, 행성 코어가 있다. 응?"

"뭐, 어리는 괴수도 무섭지 않은 것이에요. 엄청난 물량으로 공략을... 에헤헤헤헤. 어려울까요?"

신이 나서 떠들던 어리가 빼꼽 세진의 눈치를 본다.

"어째 더 어려진 것 같네. 참, 어리 너 아직은 5등급 흡수하고 새로 생긴 능력은 확인 하지 못했지?"

"그거야 지구에 가야 확인을 하죠.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 것이에요. 분명히 가능한 것이에요. 어리는 드디어 이면 공간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이면 공간 안쪽으로도 통신이 가능하게 된 것이에요. 우리의 전사들이 이면공간에서도 활동이 가능할 것이에요."

이번에 어리가 5등급 이면 공간 유지 코어를 흡수한 후에 가장 큰 변화라면 바로 이것이다.

어리의 영향력이 이면 공간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것. 그러니 헌터룸에서 의체들을 움직여서 이면 공간 안쪽까지 활동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욱 대단한 것은 이제 모랜에서 만들어지는 몬스터들을 어리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테멜 안에서만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지구의 행성 코어가 있는 곳에서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른다. 다만 이전에는 몬스터를 제어하지 못했던 것이 이젠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어리가 '군단의 주인' '물량전의 대가'라는 소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 돌아가 보자. 별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세진이 지구로의 복귀를 선언하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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