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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노트-213화 (213/298)

< -- 치다트에 남은 떠돌이의 흔적 -- >

치다트의 권력 쟁투는 네 명의 세도가들이 힘을 겨루는 양상이었다.

이들은 대를 이어가며 치다트의 권력을 사분하고 있는 가문의 수장들이었다.

피노나 행성, 세진이 가늘인 행성이라 부르는 이 행성은 의외로 몬스터들과 가늘인의 세력이 균형을 맞춰서 살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 열세에 처한 상황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세진이 지나온 행성들 대부분이 몬스터가 큰 세력을 떨치고 있는 것에 비하면 그나마 가늘인 행성은 살만한 곳이라는 소리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이곳 가늘인 행성에서는 거대 도시들마다 인간들의 권력 다툼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그것이 피를 부르는 경우도 적잖았다.

지금 치다트의 문제는 이를테면 누적된 힘의 분출이라고 봐야 했다. 거느린 무사들의 수가 많은데 그 힘을 따로 쓸 곳이 없으니 괜한 욕심들을 부리는 것이다.

넷이 나눠 가지던 것을 하나로 뭉쳐서 가지고 싶은 욕망.

"그래봐야 한 세대에 한 번씩 그런 일을 벌이고 나면 또 그럭저럭 균형을 맞춰서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마르시나는 치다트의 권력 싸움을 그렇게 평가했다.

이전에도 수도 없이 일어났던 싸움이라는 것이다. 어느 한쪽이 완전히 몰락을 할 때까지 가는 경우도 없이 한 세대의 우열이 어느 정도 판가름이 나면 약간의 이권을 양보하면서 끝이 나는 싸움이라고 마르시나가 말했다.

하지만 그런 치다트의 싸움이 이번에는 양상이 조금 달라졌다.

세진이 나서서 파르티크를 풀기 시작하면서 일이 복잡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치다트의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소소한 기록들이 전부였다.

어떤 경우에는 기록이 아니라 전해지는 이야기를 가지고 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파르티크 조각을 얻어 갔으니 치다트가 후끈 달아올랐다.

제대로 된 기록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세진과 자넷이 인정하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파르티크를 얻게 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세진과 자넷이 머무는 여관의 별채에는 문턱이 닳도록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때로 세진과 자넷을 속이려고 말을 꾸미거나 거짓 기록을 가지고 왔던 이들이 몇 군데 부러져서 쫓겨나는 이외에는 대부분 후한 보상을 받아서 희희낙락하며 들어왔던 문을 나섰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는 사이에 치다트에 풀린 파르티크가 적지 않았다.

이쯤 되니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 이건 뭡니까?"

세진이 석판 하나를 가지고 온 가늘인에게 물었다.

"이것은 제 할아버지께서 떠돌이에게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 손을 올리고 기운을 불어 넣으면 이 석판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듣기로는 꽤나 다양한 지식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 피노나들이 사용하는 기운이 이 석판에 어울리지 않아서 우리들은 단편적인 지식들만 얻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세진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많이 놀라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석판과 같은 것을 세진도 알고 있었다.

지하 창고에서 오러와 마법진에 대해서 배운 석판이 눈앞에 있는 석판과 비슷한 것이었다.

물론 석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석판에 들어 있는 내용의 가치가 중요한 것이지만 일단 세진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물건임엔 틀림 없었다.

"흐음. 대단하군요. 하지만 이것이 지니고 있는 내용이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가치를 논하기 어렵군요. 그래 여기서 어떤 지식을 얻으셨습니까?"

세진은 석판의 주인에게 물었다. 전부는 아니라도 조금은 내용을 알 수 있었다고 하니 내용을 물어보고 가치를 따지자는 생각인 것이다.

"흠. 그것은 일종의 일기나 자서전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했고, 또 어떤 이를 만났으며, 무엇을 먹었다는 등등의 이야기들입니다."

석판의 주인이라는 가늘인은 조금 목소리가 줄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리 가치가 있는 내용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저는 그 이야기들 속에서 색다른 생각들을 많이 얻었습니다. 또 그것으로 괜찮은 사업을 일으키기도 했고 말입니다. 다만 그것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해서 곤궁에 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내용들이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제 사업이 어려움에 처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것을 가지고 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나름 장사를 하는 사람이어선지 석판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 자신에게 어떤 쓰임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것이 세진이나 자넷에게는 쓸모가 없을지 몰라도 자신에게 가치가 있으니 그것을 가지고 가려면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 이상은 대가를 줘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음, 그렇군요. 그럼 얼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원하시는 가격을 말씀해 보시지요."

세진은 얼마가 되었건 석판을 구입할 생각이었다.

세진에게 파르티크는 어리가 조금만 힘을 쓰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금속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쓸모가 많은 금속이기는 하지만 어리가 있는 이상은 만들어 내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20만 데시나면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흐음. 20만 데시나?"

200데시나로 고급 여관의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가격이다.

세진은 대략 그것을 지구의 가치로 환신을 해 보았다.200데시나를 지구의 20만원 정도로 생각을 해도 2억 정도라는 액수가 된다.

'비싼가? 그렇지는 않지만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이와 비슷한 것을 들고 오고, 그보다 가치가 높은 것을 들고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과하긴 하지. 이것 하나만 있다면 모르지만 앞으로 더 많은 것이 나올 것을 생각하면...'

세진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10만 데시나를 드리지요. 그게 아니라면 이것을 사용해 보고 그 가치를 제 입장에서 평가해서 다시 가격을 논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쓸모가 없는 내용이라면 구입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0만 데시나는 당신에게 석판의 가치가 그 정도 될 거라는 제 추측에서 나온 가격입니다."

세진은 값을 반으로 깎았다. 어차피 정해긴 가격이 없는 물건이고, 세진이 아니면 그것을 구입할 사람도 없다. 그런데 부르는 대로 값을 쳐 주는 것은 말 그대로 호구짓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너무 후려치면 다른 이들이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좋습니다."

하지만 세진이 살짝 긴장한 것과는 달리 석판을 가지고 온 가늘인은 단번에 세진의 조건을 수용했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세진이 조금 더 밀고 당기면서 값을 아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품 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어떤 내용이건 석판에 정보를 담아 전하는 방식은 흥미롭고 그것을 얻게 되는 것에 쇳조각 얼마가 아쉬울 것은 없었다.

입이 귀에 걸려서 파르티크를 들고 석판의 주인이 밖으로 나가고 나서도 세진은 한동안 이런 저런 가늘인들을 더 만났다.

하나같이 과거의 가늘인 행성을 다녀갔던 떠돌이들이 남기고 간 물건들을 들고 와서 파르티크와 바꾸기를 원하는 이들이었다.

분명 기록에 대한 것을 원했는데, 이제는 떠돌이가 남기고 간 소소한 물건들까지 모두 들고 와서 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세진과 자넷은 그러 것들을 귀찮아하지 않고 소소한 가격을 셈해서 사들였다.

그렇게 정해진 시간까지 사람들을 받은 이후에, 시간이 끝나자 별채는 조용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따로 사람들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여관에서도 사람들의 출입을 막아 주었다.

별채를 사용하는 특별한 손님에게 여관에서도 꽤나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우와, 신기한 것들이 많군요. 그래도 가늘인 행성에서 볼 수 없는 것들만 이리저리 챙겨 가지고 온 모양이네요."

어리는 탁자 위에 늘어놓은 문건들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겉으로 봐선 도무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는데, 그 대부분은 장신구들이었다.

그런데 장신구들을 놓고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는 뭘까?

당연히 인종이 다르니 장신구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누가 코걸이나 어금니 덮개 같은 것을 알 수 있을까.

그나마 설명을 들은 물건들은 용도를 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정말 모를 것들도 있었다.

"이 천은 굉장히 부드러워요."

"그러게. 비단 같기도 하고."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동물성이에요. 털을 가지고 만든 것이거나 아니면, 가죽일지도 몰라요."

"비단도 동물성인데?"

세진이 듣고 있다가 끼어 들었다.

"네?"

"비단, 그거 애벌레가 만든 고치를 풀어서 만든 거잖아. 애벌레가 몸에서 뽑아낸 거니까 동물성 아니냐?"

"흐응, 그렇군요. 그런 거 같아요. 하지만 이건 그것과는 달라요. 뭐라고 할까 몸의 일부인 것 같아요."

"그러냐? 그런데 그건 어디에 쓰는 것 같으냐?"

세진이 어리가 들고 있는 손수건 모양의 천을 두고 물었다.

"그거야 모르죠. 이게 제 손에 들린 대로 손수건일 수도 있고, 몸이 작은 종족들의 깔개일 수도 있고, 이불일 수도 있잖아요."

어리는 천을 이리 저리 돌려 보며 말했다.

"어머나, 어리도 이젠 제법 생각이 트였네? 제법이네?"

자넷이 어리의 대답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똥그랗게 떴다.

"에헴. 저도 이제 우주에 여러 종족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요. 키가 큰 종족이 았고, 작은 종족이 있다는 것도 알아요. 그러니까 이런 것을 이블로 삼을 정도로 작은 종족도 있을 수 있는 거라구요."

"그래. 기특하네. 그런 생각도 할 줄 알고."

세진은 어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나름대로 생각이 넓어진 어리에 대한 칭찬이다.

그러면서 세진은 석판을 들고 이리저리 살핀다.

"역시 이건 겉으로 봐선 알 수 없군. 지하 창고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겉모양이 같은 것도 아니야."

"거기 있는 건, 일단 고정되어 있잖아."

자넷이 세진의 손에서 석판을 받아 살피면서 중얼거린다.

"그런데 내용은 누가 확인하는 거예요. 어리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어리의 본체는 누가 뭐라고 해도 테라포밍을 위한 물질합성기였다. 그것이 지금은 어리 테멜의 코어로 바뀐 상태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의체와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해도 석판이 전하는 지식을 받아들일 정도의 연결 수준은 아니었다.

그 정도가 될 수 있었다면 어리의 의체가 테멜 밖에서도 사용 가능했을 것이다.

어리가 헌터룸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석판을 직접 읽을 수는 없었다.

"내가 해야지."

세진이 자넷의 손에서 석판을 다시 빼앗아 들었다.

"엣? 왜?"

"그거야 당연히 내가 남자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데?"

"당연한 거야."

"차별이야. 그거, 알아?"

"그래도 하는 수 없어. 자 시작한다."

세진은 자넷의 항의를 무시하고 석판에 에테르를 주입시켰다.

"응?"

"왜?"

"반응이 없는데?"

"뭐?"

"반응이 없어."

"줘봐."

세진의 에테르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석판. 그것이 자넷의 에테르에 반응을 할 거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세진과 자넷은 석판의 내용을 하나도 읽을 수가 없었다.

"가늘인들도 전부는 아니고 약간만 가능하다고 했었지? 그런 가늘인이 사용하는 기운이라면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긴가?"

세진이 석판의 해독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저기, 주인님?"

어리가 그런 세진을 불렀다.

"왜?"

"그거, 수련 능력자들이 사용하는 기운을 주입하면 어떻게 될까요?"

"응?"

"에테르 말고 다른 기운이라면 대부분 행성 본연의 기운이잖아요. 그러니까 행성의 기운을 사용하는 수련 능력자들의 기운이라면 어쩌면 반응을 할지도 모르잖아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 한 번 해보자 세진."

자넷이 어리의 의견에 반색을 했다.

"그럼 그렇게 해 볼까?"

세진은 어리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고 헌터룸에서 의체를 바꾸었다.

프락칸 능력을 기르는 의체가 아니라 에테르가 아닌 행성의 기운으로 오러를 수련하는 용도로 만든 의체였다.

에테르가 없는 행성에서도 힘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자넷이 만약을 대비하자며 만들어 놓은 의체였다. 물론 그 능력이 대단치는 않지만 테멜 안에서 엄청난 능력을 보이는 어리 덕분에 제법 수련을 해 놓은 의체였다.

그리고 그 의체로 석판에 기운을 불어 넣었을 때, 석판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내용을 세진에게 전달해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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