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치다트에 남은 떠돌이의 흔적 -- >
아헤로는 작은 부족의 족장 아들로 태어났다. 아헤로의 부족은 계곡을 거점으로 삼아서 선상지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부족이었다.
부족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모두가 용맹해서 주변의 괴수들의 위협을 적절하게 막아내며 평온을 지킬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족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아헤로는 어려서부터 전사로서의 자질이 뛰어났다.
때문에 성인식 때에는 부족의 용맹스런 전사도 잡기 어렵다는 괴수를 잡아서 스스로의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헤로에게 독이 되었다.
그의 형제들은 아헤로의 뛰어남을 의식했다. 아버지를 이어서 부족의 족장이 될 큰 형은 물론이고, 부족의 용사들을 다스릴 둘째 형에게도 아헤로의 존재는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아헤로는 어느 날, 그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말을 하지는 않지만 두 형들이 그를 부담스럽게 느낀다는 것을 안 것이다.
아헤로는 며칠 고민을 하다가 스스로 부족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곳곳에 괴수들이 날뛰는 세상에서 부족을 떠나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아헤로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젊은 아헤로는 호기심이 넘치는 용감하고 지혜로운 전사였다.
그는 많은 고비를 넘겼지만 결국 고난을 이겨내며 성장했고, 결국 스스로 자신할 정도의 강자가 되었다.
그 동안에 아헤로는 수 많은 부족을 만나고, 그 부족들과 교류하며 배우고 또 가르쳤다.
그러다가 아헤로가 테멜 게이트의 여행자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아헤로는 처음으로 행성의 개념을 알았고, 또 다른 세상을 알았으며, 다른 인종을 알았다.
아헤로의 종족을 두고 게이트 여행자는 거인족에 속한다고 했다.
대체로 다른 인류에 비해서 덩치가 크기 때문이지만, 그 중에서도 거룡족 정도가 적당할 것이라 했고, 그 이유가 덩치가 굉장히 크면서도 머리를 뺀 나머지 피부에 비늘이 돋아 있기 때문에 듣기 좋은 소리로 용족이라 한다고 했다.
아헤로는 그런 분류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 여행자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때부터 아헤로 자신도 게이트 여행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충분히 게이트를 지날 능력이 있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이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종종 아헤로에게 밀려들기는 했어도 아헤로는 고향을 떠나 테멜 게이트에 몸을 실었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는 수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행성들을 여행했다. 그러면서 아헤로는 그의 종족이 다른 종족들에 비해서 수명이 굉장히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 자신의 능력이 늘어갈 때마다 수명도 늘어나고, 탈피를 할 때마다 다시 성장을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가 이곳 가늘인 행성에 왔을 때에는 고향을 떠날 때에 2미터가 조금 넘던 키가 4미터가 될 정도로 커졌고, 또 그만큼 강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수많은 행성들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끝없이 성장했고, 결국 가늘인 행성에 닿았을 무렵에는 한 단계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잠시 그가 지나온 삶의 기억들을 석판에 옮기고 그것을 그에게 호의를 보여준 이에게 넘겨주었다.
아헤로는 그것이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결국 의미있게 쓰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석판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몬스터의 기운이 아닌 다른 기운을 쓰는 이들로 한정했고, 결국 그것은 몬스터와 적대적인 인류를 돕게 되리라 여긴 것이다. 세진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석판에 집중했다.
그리고 세진은 석판이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뭐야? 여기에 그렇게 많은 내용이 있다는 거야?
자넷이 놀라서 물었다.
"그래.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능력이 모자라서 더 깊이 볼 수가 없어. 정말 간단한 내용들만 알아 볼 수 있을 뿐이야."
"응,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수련을 해서 좀 더 깊은 내용을 읽을 자격을 갖춰야 하지."
"그게 뭐야? 수련을 해야 내용을 알 수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어? 설마 그 수련 방법이 있는 거야?"
"그야 당연하지. 그런데 그게 재미있어."
"응? 뭐가?"
"그 수련법이 오러 로드 수련법과 통하는 점이 있어. 시작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지구의 수련법이 오러 로드 수련법과 닮은 것처럼, 여기 아헤로의 수련법도 닮은 구석이 있어."
"그래? 그래서 어느 것이 더 좋은데?"
자넷은 수련법의 등급을 나누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야 지구의 것은 말 그대로 기초적인 것밖에 없으니까 비교가 어렵고, 아헤로의 수련법도 지금으로선 기초밖에 없으니까 역시 비교가 안 되지."
"아니, 기초적인 것만 놓고 봐도 뭔가 차이가 있을 거 아냐. 응?"
"장단점이야 다 있는 거지. 지구의 기초는 넓고, 오러 로드는 구체적이고, 아헤로의 수련법은 성취가 빠른 것 같아."
세진은 세 가지의 수련법을 두고 그렇게 평가를 했다.
기(氣)를 받아들이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지구의 수련법 중에서 세진은 한국에서 전해지는 것을 선도일과 그의 스승, 그리고 다른 재야의 수련자들을 통해서 배웠다. 정확하게는 배운 것이 아니라 어리의 힘으로 슬쩍 얻어 냈다.
그런데 그것은 꽤나 관념적인 성격이 강해서 철학적인 면과도 연관이 많았다. 그래서 익히기가 까다롭고 수련 기간이 무척 길다. 대신에 수련의 위험이 무척 적은 장점이 있다.
그에 비해서 오러 로드 수련법은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수련 방법을 제시한다.
몸 안에서 오러가 움직여야 할 길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성장 과정에서 기본적인 틀이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오러 로드 수련법이었다.
때문에 수련이 쉽다. 물론 이후에 경지가 높아지면 정말 아득할 수준의 오러 로드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문제가 생기고, 그것을 이해하고 또 활용하기 위해서 엄청난 정신적인 능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것은 일단 기초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아헤로의 수련법은 구체적이고 단순하다. 그러면서도 큰 힘을 움직이는데 효과적이다. 세밀함으로 오러 로드가 앞서지만 힘으로는 아헤로의 수련법이 앞선다.
"역시 우열을 가리긴 어렵겠어. 하지만 지구의 수련법과 오러 로드 수련법을 섞어서 새로운 수련법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중간에 오러 로드 수련법을 넣고 앞뒤로 지구의 수련법과 아헤로의 수련법을 넣으면 괜찮은 수련법이 만들어 질 것 같아."
"하지만 지구의 것은 기초밖에 없잖아."
"괜찮아. 그건 그게 전부니까."
"무슨 소리야?"
"지구의 수련법, 특히 우리나라의 것들은 철학적인 사유를 중요하게 여기거든. 그리고 지구 수련법에서 내가 필요한 부분도 그게 전부야. 그것만 따서 오러 로드 수련법과 아헤로 수련법에 접목을 시키면 될 거야."
"지금까지 익힌 오러 로드 수련법을 버리겠다는 거야?"
자넷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본체에 당장 적용을 할 건 아니지. 새로운 의체로 실험을 해 보는 거야.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하나씩 고쳐가는 거지. 재미있을 거야. 솔직히 지금 우린 뭔가 다른 방법을 찾지 않으면 더 이상 성장하기 어려운 상황이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지."
"음, 세진님. 세진님은 연방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려고 게이트 여행자의 기록을 모으고 있는 거잖아요."
어리가 세진과 자넷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두 사람이 엉뚱한 일을 벌이려는 것 같아서 슬쩍 말려 본다.
"괜찮아. 평소처럼 생활을 하면서 의체만 바꾸는 거니까 문제없을 거야. 뭐 다른 사람들이 보이게 갑자기 약해진을 이상하게 여기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덤비면 그 땐, 그냥 박살을 내면 되는 거고. 또 우리 어리가 열심히 '쫑'을 관찰해서 결국 괴수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면, 괴수 몇 마리 만들어서 지구로 돌아가지 뭐. 그 정도면 지구의 문제도 해결을 할 수 있지 않겠어?"
"하긴 급하게 움직일 이유가 없기는 해요. 지금도 지구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면 어차피 지구의 문제는 세진님의 손을 떠난 거고, 시간이 멈춰 있다면 최대한 많은 준비를 해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일 테니까요."
어리의 말은 세진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부분을 담고 있었다.
지구의 상황에 대한 불확실성이 그것이다. 시간이 멈춰 있느냐 아니면 계속 흐르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지구 인류의 멸망과 구원이라는 엄청난 분기점을 가진 문제였고, 세진은 시간이 멈춰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쨌거나 아헤로의 석판이라고 이름 붙은 석판은 어리 홀에 귀중하게 보관이 되었다.
어리 홀은 어리 테멜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은 절대 침입이 불가능한 곳이니 세진에겐 가장 안전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헤로의 석판이 가진 수많은 행성의 기록들은 세진이 치다트에서 얻는 떠돌이들의 기록을 해석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아헤로가 여행한 행성들에 대한 정보에서 그 행성들의 언어와 문자를 배울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10만 데시나의 가치는 하고도 남았다.
세진과 자넷이 석판 하나를 10만 데시나에 구입했다는 이야기는 꽤나 빠르게 치다트 주민들 사이에 알려졌다.
그렇게 되자, 푼돈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이들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권력자 중에서 제일 먼저 세진을 찾은 이는 프로타고였는데, 그는 그의 집사를 보내서 떠돌이들의 기록과 석판을 거래하려 했다.
"양이 많군요. 석판이 셋에, 종이와 가죽, 나무판 등등의 기록문이 또 칠십여 종이 넘고 그 외에 자질구레한 소품들이 두 상자나 되니 말입니다."
세진은 프로타고의 집사가 가지고 온 물품들을 보며 꽤나 놀랐다. 역시 지역 유지의 가문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남다르긴 했다.
"우리 주인님께서 이번에 그 동안 가문에서 모았던 것들을 모두 정리하기로 하셨습니다."
"다른 것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이 석판들은?"
세진이 따로 꺼내 놓은 석판들을 가리켰다.
"떠돌이 중에서 몇몇은 이런 식으로 기억을 담는 돌을 만드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그런 이들은 다른 떠돌이에 비해서 월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아주 오래 된 기록이기는 합니다만. 제가 알기로는 얼마 전에 얻으신 그 석판, 그것이 가장 근래의 것입니다."
집사는 세진이 얻은 석판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요?"
"그렇지요. 그는 굉장한 거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거인을 대접했던 것이 바로 전에 왔던 그 사람의 조부였고, 그에 대한 답례로 그 거인이 석판을 줬다고 하지요. 그리고 그 석판에서 얻은 지식이 그 가문에게 약간의 부를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정도야 뭐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으니 전대 주인님이니 지금의 주인님도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지요."
'하긴, 대단한 뭔가가 있었다면 권력자들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겠지. 어쩌면 그런 이유로 기초적인 아헤로 수련법도 익히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조차도 읽어낼 수준이 안 되었을 수도 있겠지.'
실제로 가늘인들이 사용하는 능력은 에테르를 포함하고 있었다.
아헤로는 에테르를 사용하지 않는 기운에 반응하도록 석판을 만들었는데 가늘인의 능력에는 에테르가 포함되어 있으니 제대로 석판의 내용을 읽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완전히 에테르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파르티크를 사용하는 능력에는 선 천적인 기운도 포함이 되어 있으니 그것으로 석판의 내용을 약간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세진은 짐작했다.
"그래서 이 물건들의 가치를 어떻게 계산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세진은 집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길게 이야기를 해도 결론은 서로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인 것이다.
거기다가 세진의 생각에 프로타고는 다른 숨겨 놓은 것이 있을 것이다. 지금 가지고 온 것은 정말 맛만 보여주는 것이 분명했다.
"100만 데시나면 모두 넘겨 드리겠습니다."
집사도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미리 정하고 온 액수인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세진은 집사와 흥정을 하지 않았다.
아직 남은 것이 있으니 더 가치가 있는 것을 가지고 오게 만들려면 통이 크게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아헤로의 석판을 얻어서 마음이 넉넉해진 것도 집사에겐 득이 되었다.
집사는 세진이 부르는 대로 가격을 치르는 것을 보고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세진이 용납할 정도로 세진이 호인은 아니었다.
"이런 별 것 없는 이것들을 비싸게 사는 이유를 프로타고께서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가서 이야기를 잘 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거래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세진은 파르티크를 꺼내 주며 집사에게 적절한 충고를 건넸다. 괜한 욕심을 부리면 다음은 없다는 이야기다.
사실 가늘인들에겐 거의 쓸보가 없는 것들을 비싼 가격을 치르고 사는 것인데, 그것으로 과한 욕심을 채우려면 세진이 굳이 거래를 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까지 확보된 것들만으로도 이곳 가늘인 행성에 있는 테멜 게이트의 위치가 열 곳은 파악이 되었다. 더구나 그 열 곳의 테멜 게이트가 통하는 행성들에 대한 기록도 어느 정도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 세진이 급할 이유는 별로 없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어디에도 데블 플레인 연합 소속이라고 생각되는 행성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진과 자넷은 여전히 떠돌이들의 흔적을 쫓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