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난을 당하다 -- >
"크으윽. 이게 무슨 짓이냐?"
"항복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런 짓을 하다니."
"미안해요. 하지만 우린 당신들처럼 뛰어난 실력자를 금제할 방법이 없어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약한 거예요. 우리 남편은 관절이라는 관절은 모두 못질을 당했어요. 지금 당신들처럼 에테르가 움직이는 통로만 막은 것이 아니죠. 더구나 우리 남편은 단검을 몸에 박았지만 당신들은 고작 송곳 정도잖아요."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럼 당신들은 포로를 어떻게 하죠? 따로 금제하는 방법이 있나요? 그게 확실한 방법이라면 가르쳐 줄래요? 그럼 그 방법으로 당신들을 금제하도록 하죠."
자넷이 그렇게 물었을 때, 그랜드 마스터는 물론이고 다른 마스터들 역시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세진은 그 꼴을 보고, 그들 역시 획기적인 금제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처에 몬스터는 없는 것 같으니까 어리는 잠시 이쪽에 있어도 되겠다. 우린 들어가서 상황 파악을... 뭐지?"
"또 다른 사람들이 오는 것 같아. 피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니 그런 것 치고늘 별로 대단치 않은데? 그랜드 마스터도 없어. 마스터급 일곱이 전부야."
세진은 감지 범위 안으로 들어온 새로운 무리의 수준을 파악했다.
"일단 이 사람들부터 넣어."
세진의 말에 어리가 포로로 잡힌 두 명의 그랜드 마스터와 마스터 여섯을 테멜 안으로 넣어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새로운 이들이 천천히 세진과 자넷이 있는 공터로 다가오고 있었다. 세진과 자넷은 죽어 넘어진 시체들을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그대로 두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다가오고 있는 이들은 제압하거나 처리하자고 마음먹으면 어려운 이들이 아니었다.
"그냥 나와요. 당신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자넷이 연방 언어로 숲을 향해서 조금 목소리를 높여 말했고, 곧이어 숲에서 일곱 명의 사람들이 나왔다.
그들을 보면 자넷과 세진은 활짝 웃었다.
그들의 중에서 네 명이 툴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툴틱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연방이나 연합과 연관이 있다는 소리였다.
"당신들이 이곳 게이트 테멜에서 나온 사람들입니까?"
긴장한 티가 역력하게 보이는 사내가 자넷에게 물었다.
일곱 사람의 마스터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귀가 약간 뾰족하거나, 코가 유독 길고 휘어 있거나, 눈썹이 귀까지 이어질 정도로 길어서 문신처럼 보이거나 눈동자의 색이 서로 다른 오드아이거나 살짝 송곳니가 보이거나 하는 등의 개인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일곱의 겉모습은 세진이나 자넷과 다르지 않았다.
수인족이나 거인과 같이 차이가 확 나는 종족 특성은 보이지 않았다.
"맞아요. 우리는 얼마 전에 이곳에 있던 테멜에서 나왔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 테멜이 없네요. 우린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테멜 코어를 지닌 몬스터와 싸워야 했어요. 그래서 그 몬스터를 처치했고, 결과는 테멜의 붕괴로 이어졌죠.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었어요. 여기 죽은 이들은 우리에게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고, 우리를 강제로 끌고 가거나 죽이려고 했어요. 그래서 대가를 받은 거지요."
자넷이 길게 설명을 했다. 테멜이 붕괴 된 것에 대해선 책임감을 느끼지만 다른 문제에 대해선 떳떳하다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테멜의 붕괴에 대해서 따질 생각이 없습니다. 이곳은 우리들의 영역이 아닙니다. 사실 이곳에서 테멜이 사라진 것을 알고 무슨 일인지 살피기 위해서 오기는 했지만 우리는 굉장한 위험을 무릅쓰고 온 것입니다. 우리는 덱터들과는 적대관계에 있습니다."
일곱 중에서 귀가 뾰족하고 오드 아이의 눈을 지닌 사람이 대표였던 모양인지 계속해서 그가 이야기를 했다.
"덱터요?"
"게이트 테멜을 두고 서로 대치중인 적들의 명칭입니다. 우리를 부를 때에는 저들은 틸터라고 부르지요.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 행성에는 덱터와 틸터가 대치하며 싸우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왜 싸우죠?"
"우리에게 필요한 게이트 테멜을 덱터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마 그 게이트 테멜이 데블 플레인 연합에 속한 행성과 통하는 곳인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저들은 그것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틸터의 수가 얼마나 되는 거죠? 행성을 양분해서 싸울 정도면 적지 않은 수일 것 같은데요? 그 많은 틸터가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가 있죠? 이곳으로 왔다면 그 게이트를 이용하면 돌아갈 수가 있지 않나요?"
자넷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고, 그것은 세진도 가진 의문이었다.
"틸터는 아주 오래 전에 이 행성으로 왔습니다. 데블 플레인 연합이 안정된 이후에 확장 정책을 펼치며 새로운 연합 행성을 찾기 위해서 게이트 테멜을 이용할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에 틸터는 이 행성이 아주 중요한 곳임을 알았습니다. 이곳에 있는 던전, 아, 요즘은 테멜이라 하죠. 테멜의 게이트들이 다른 행성으로 통하는 것을 알았고, 때문에 이 행성에 본부를 설치하고 다른 행성들과 연계를 맺어 나가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도시를 건설할 무렵에 덱터들이 등장해서 게이트 테멜을 파괴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틸터들의 세력이 훨씬 강했지만 그들의 기습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갈 길이 없어진 이들이 틸터가 되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틸터는 어떻게든 게이트 테멜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틸터에 비해서 덱터들이 훨씬 빠르게 게이트 테멜을 찾아 내고 또 그 게이트 테멜의 행선지를 파악해서 유지와 파괴를 결정했습니다. 행성 전체에 그 수가 20개 남짓의 게이트 테멜이 있을 뿐인데, 그것을 그들 덱터가 선점을 한 것입니다. 초창기의 틸터들은 게이트 테멜을 감지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걸 얻게 된 것은 제법 긴 세월이 흐른 후였지요. 덱터들은 게이트 테멜에 대한 문제만 아니라면 우리 틸터들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이 행성의 원주민들과 틸터들이 어울려서 세대 교체가 되었습니다."
"아, 이 행성에도 원주민이 있었던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틸터들과 덱터들은 간혹 충돌을 하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틸터들은 참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없애버리 덱터들에게 복수를 하고 말겠다고 틸터의 지도부가 힘을 기르고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들의 복수는 성공했습니다. 당시 수가 많지 않았던 덱터들 대부분을 처치하는 데 성공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덱터의 세력도 강한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도망갔던 덱터들이 그들의 세력을 이끌고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계속해서 싸웠습니다. 세대 교체가 되어서도 그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원주민들도 덱터 세력과 틸터 세력으로 나뉘게 되었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행성 전체가 양분된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데블 플레인 연합으로 갈 수 있는 게이트 테멜에 대한 이야긴 뭐죠?"
자넷은 그런 테멜들을 모두 파괴하는 덱터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게이트 테멜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의 오드아이는 덱터들이 그런 테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서 밝혀진 게이트 테멜에 대한 연구 성과입니다. 저들 덱터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겠지만 워낙 비밀로 했던 것이라 우리들이 연구를 거듭해서 겨우 밝혀 낸 것이지요."
"그래서 그게 뭐냐는 겁니다."
"테멜 게이트가 일정 지역에서 순환하며 등장하고, 파괴 이후에 다시 생성되는 것도 거의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에서 데블 플레인으로 통하는 게이트 테멜이 일정 기간마다 등장했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생긴 게이트 테멜을 관리하면서 출입을 금지하고 있거나."
"왜 파괴가 아니라 관리를 할 거라고 생각하죠? 생기는 즉시 파괴하면 좋지 않나요?"
"그렇게 되면 게이트가 생기고 파괴되는 것을 우리들도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놈들의 영역 중에서 데블 플레인으로 통하는 게이트 테멜의 위치를 추측할 수 있게 되지요."
"그 말은 지금은 덱터의 영역 어디에 데블 플레인으로 통하는 게이트 테멜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소리네요?"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만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자칫하면 덱터들이 다시 몰려올 수가 있습니다. 여긴 덱터의 영역입니다."
"덱터 영역에 들어와 있는 당신들은 괜찮다는 건가요?"
"정보 수집을 위해서 잠시 들어온 것일 뿐입니다. 이제 돌아가야 하는 거지요. 게이트 테멜 하나가 파괴된 것은 중요한 일이니 가서 보고를 해야합니다."
"우리도 같이 갈 수 있나요?"
"당연합니다. 당신들과 같은 틸터가 간혹 있습니다. 테멜 게이트를 넘어서 이곳까지 오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여행의 자유를 위해서 우리에게 힘을 더해 주기도 하고, 아주 간혹 연방이나 연합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오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일단 우리도 잠시 틸터의 신세를 지겠어요. 여긴 내 남편인 세진, 그리고 나는 자넷이에요."
"환영합니다."
"우와, 놀랐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는데 덱터 놈들을 일곱이나 처치를 하셨다니 말입니다. 그 놈들도 대부분 마스터였을 텐데 말이죠."
"우리 부부은 그랜드 마스터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꽤 되었으니까, 그런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이지."
세진은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예전 게슈너처럼 그는 과묵하고 단단한 성격으로 보이게 포장하고 있었다.
"와와. 역시, 역시 그런 거였군요. 두 분이 모두 그랜드 마스터라니 정말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해요."
세진은 팔뚝에 툴틱을 꺼내 끼고 틸터 소속의 마스터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테멜이 있었던 공터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후로는 틸터들도 여유가 생겼는지 긴장감이 떨어졌다.
테멜에 대한 감지 능력은 대단하지만 사람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넓은 숲에서 덱터들과 마주칠 일은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다만 게이트 테멜 근처에는 수시로 순찰을 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 것 뿐이란다.
그런 곳이 아니라면 덱터가 아니라 몬스터가 훨씬 더 위험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긴요, 파란색 이상의 몬스터가 굉장히 많은 편이에요. 뭐 정확하게 말하면 테멜이 나타나는 지역에는 거의 파란색 이상 등급의 몬스터만 있다고 보면 되는 거죠. 대신에 다른 지역에는 또 그만큼 강력한 몬스터들이 적은 거죠.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살고 있어요. 우리처럼 덱터와 싸울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 게이트 지역을 두고 덱터들과 분쟁을 지속하는 거죠."
다른 이들에 비해서 성격이 밝고 붙임성이 좋은 빈엘르라는 마스터는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것이 많은지 세진에게 툴틱이 있다는 것을 알고, 대화가 가능해지가 줄곧 곁에 붙어서 이런 저런 말을 걸었다. 세진은 그런 빈엘르의 접근을 막지 않았다. 서로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덱터와 틸터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지금 당장 이 행성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도 시급한 일이었다.
"테멜, 그 중에서도 게이트 테멜이 나타나는 지역이 일정하단 건가? 다른 곳에선 나타나지 않는 게 확실한 건가?"
"그야 당연하죠. 사실 덱터 놈들이 먼저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테멜 감지 장치는 정말 대단한 것이거든요. 그건 정말 엄청난 물건이라고요. 그걸 덱터 놈들이 먼저 만들어서 사용하는 바람에 우리가 손해를 많이 봤지만, 지금은 우리도 테멜 감지 장치를 가지고 있어서 놈들이 아는 것은 우리도 알 수 있게 된 거죠."
"잠깐, 그 장치라는 것이 작은 건가? 소지하고 다닐 정도로?"
"네? 아, 그건 절대 아니죠. 어떻게 디퀴피트를 들고 다녀요? 대략 마을 하나 크기가 넘는 건데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테멜을 파괴한 것을 알고 곧바로 몰려 올 수가 있지? 덱터라 는 놈들도 그랬지만 너희도 그러지 않았나?"
"아 그거야 그렇죠. 하지만 대신에 디퀴피트의 신호를 받아서 일정 범위를 살필 수 있는 도구는 소형으로 제작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게 있으면 테멜의 상태를 알 수 있어요. 저기 코제크가 지고 있는 등짐에 그게 들어 있어서 일정 시간마나 확인을 하곤 했던 거죠. 뭐 이 근처에 다른 테멜은 없으니까 한동안 볼 일은 없겠지만요."
세진의 시선이 코제크란 사람이 지고 있는 배낭에 가서 닿았다. 유독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큰 짐을 지고 있다 했더니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