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클리르 행성에서 발이 묶이다 -- >
프랜드에그로메의 성장을 두고 덱터와 틸터의 지도자들은 고심이 깊어졌다.
하지만 틸터가 프랜드에그로메에 크게 신경을 쓰는 것은 세진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세진이 덱터와 불편한 관계인 것을 알고 있는 틸터가 세진의 확장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낼 거라곤 생각지 못한 것이다. 틸터의 지도부는 선주민들이 프랜드에그로메로 몰려드는 것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프랜드에그로메는 테멜의 발생 구역에 가까운 곳에 세워진 도시다. 당연히 강력한 몬스터들이 도시 근처에 있다는 것을 프랜드에그로메와 함께 떠올리게 된다. 그러다보니 프랜드에그로메에 정착하는 이들 중에는 실력이 뛰어난 선주민들의 비율이 높았다.
따로 몬스터 사냥을 하지 않더라도 위험지역에서 살게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이들이 프랜드에그로메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주민의 수가 늘어난 만큼 공직에 진출하는 이들의 비율도 늘어났다.
공직이라고 해봐야 치안을 담당하는 도시 방어군 소속이 되는 정도지만 그것만으로도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된다. 더구나 프랜드에그로메의 공직자에게 지급되는 툴틱은 그야말로 최고의 보상이다.
꽤나 먼 거리까지 통신이 자유로워서 위험에 대한 경고를 할 수도 있고, 또 구조 요청을 할 수도 있다. 몬스터가 도시 근처로 나오는 일도 거의 없지만 혹시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빠르게 소식이 전해진다. 틸터나 덱터에서도 디퀴피드를 이용한 통신이 가능하지만 그것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분쟁 지역과 테멜 발생 지역에서나 간혹 볼 수 있을 뿐이고 후방에선 규모가 제법 되는 마을에도 하나씩 비치하기 어려울 정도라서 군사적인 용도가 아니면 쓰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프랜드에그로메에선 툴틱을 공직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 혁명과 같은 것이었다.
클리르의 선주민들은 너도나도 프랜드에그로메의 툴틱을 갖고 싶어 했다.
그러자 세진은 통신이 허락되지 않는 툴틱을 주민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생체 에너지를 이용해서 작동하는 툴틱은 통신을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매우 유용한 물건이다.
일동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의미로 툴틱을 보급한 것인데, 그로 인해서 이주민의 수가 급증했다.
이즈음 틸터의 지도자들의 심기가 무척 불편해진 것이다. 그들은 세진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는 선주민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구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도시와 마을이 늘어나고, 그것은 결국 거대 세력의 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때문에 틸터의 지도부에서 세진의 성장을 두고 전전긍긍하게 된 것이다.
"길을 막고 있어?"
"응. 그렇다고 하더라. 이전에 없던 초소를 세우고 검문을 하는 모양이야. 그리고 트집을 잡아서 사람들을 막고 있는 거지."
"우리가 가야 하나?"
"음, 아무래도 그렇지. 저쪽에서 그랜드 마스터가 책임자로 나와 있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아, 곤란하다. 역시 우리 둘이서는 힘들어."
"그러니까 세진도 연구를 좀 해 봐. 디퀴피드 에너지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을 거 아냐?"
"내가 무슨 천재야? 그런 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지금 어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
"어리가 설계를 하는 건 아니잖아.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어휴. 그것 참."
세진은 자넷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어리는 창조를 하는 능력이 무척 무족하다. 모방이나 복제는 샘플이 있으면 거의 못하는 것이 없는데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에는 한계를 보이는 것이다.
어리가 잔머리를 굴리는 듯 보이는 행동을 하곤 하지만 그것들 역시 학습된 모방이다. 지구에서 여러 매체를 통해서 습득한 행동 양식들 중에서 흉내를 내는 것이다.
그나마 그렇게 다양한 모방이 어리를 어리로 만들고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창조적인 면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직 극복하지 못한 일면이다. 어리는 코어 에너지와 충돌을 일으키는 디퀴피드 에너지를 이용해서 본래의 감지 범위를 회복하고, 휘하에 몬스터들을 통솔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에너지 자체가 어리와는 상극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어리가 아닌 어떤 장치를 이용해서 디퀴피드 에너지를 이용해야 하는데, 그건 어지간한 기술이 아니고는 어려웠다.
"김혜인 박사도 방법이 없는 거야?"
자넷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김혜인 박사가 만든 통신기에서 디퀴피드 에너지를 사용하게 하는 것이 안 되고 있어. 그건 과학이 아니거든. 나도 아직 디퀴피드가 어떻게 만들어진 물건인지 알 수가 없다고. 그리고 그 소형 디퀴피드 통신기도 제대로 만들어 낼 수가 없으니 실험을 하기도 어렵고 말이야."
"그건 참 신기해. 어리가 못 만드는 물건도 있고 말이야."
"다른 것은 다 되는데 그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부분이 안 되는 거야. 그걸 만드는 순간 어리의 코어 에너지와 충돌해서 망가지는 거니까. 방법이 없지. 어리의 테멜 에너 지를 바탕으로 합성을 하는 건데, 완성이 되는 순간 디퀴피드의 에너지가 발생하니까 대책이 없어."
"마지막 부분만 남겨두고 그걸 어떻게 수공으로 만드는 방법은 없는 거야?"
"그게 간단하면 이미 만들었게? 솔직히 그냥 똑 같이 카피를 하는 거지 그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야. 전혀 다른 체계로 만들어진 거라고. 아마도 어느 행성에서 독자적으로 발달한 문명의 결과물일 거야."
"그런데 얘는 왜 반응이 없어? 아까부터 조용하네?"
자넷이 세진의 어깨 위에 있는 어리 앵무를 살짝 건드리며 물었다.
"의기소침이지 뭐."
"하기 클리르에 온 후로는 어리가 고생이 많기는 하지."
자넷도 어리의 마음을 짐작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네."
그런 중에 세진과 자넷이 타고 있는 탈것이 틸터에서 세웠다는 검문소에 거의 도착을 했다.
반대쪽에서 프랜드에그로메로 오는 길에는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이 가득했다.
하지만 검문소를 지나서 프랜드에그로메로 가는 것을 허락 받는 이들은 없는 모양인지 이쪽 길은 한산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래는 무슨, 겨우 반 년도 안 되었는데."
세진이 시큰둥하게 대꾸를 한다.
그리고 상대의 이름을 기억하려 애쓴다.
본 기억이 있지만 그리 가깝게 사귄 사람은 아니다.
마함브 중에 한 명이고, 자세이크 계파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만 기억이 날 뿐이다.
"에세돈님 그런데 여기 어쩐 일이신가요? 지금 우리가 눈을 보고 있는 것을 설명해 주시겠어요?"
자넷이 세진의 곤란함을 해결해 준다.
그의 이름이 에세돈인 것을 이제야 기억하는 세진이다.
"달리 설명이라고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늘어놓는다고 해봐야 의미가 없지요. 우리 틸터에서는 세진님과 자넷님의 팽창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에그로메로 들어오려는 이주민들을 막고 있는 건가?"
세진의 기세가 뭉클 피어올랐다. 분노를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잘못은 아니지요.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것은 몬스터 조차도 당연히 여기는 본능인데, 제 밥그릇을 챙지기 못하면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세돈은 세진의 기세에 밀리지 않았다. 그 역시 그랜드 마스터. 세진에게 맞서면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 프랜드와 틸터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라고 봐도 되는 건가요? 그게 틸터의 선택인가요?"
자넷이 물었다.
그 사이에 저 멀리 길을 따라서 한 무리의 인물들이 초소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세진은 그들 사이에 그랜드 마스터가 셋이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들을 믿고 있는 건가?"
세진의 턱이 다가오는 무리를 향해서 치켜 올랐다가 내려왔다.
"두 분이 감당할 힘은 아닐 텐데요?"
에세돈은 쓸데없는 반항은 하지 말라는 듯이 세진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세진은 그런 에세돈과 다가오는 틸터의 군세가 우습기만 했다. 겨우 그랜드 마스터 넷에 마스터가 백여 명, 거기에 그보다 못한 수준으로 오백 정도다.
"저들은 나와 내 아내를 잡기 위해서 오는 거겠지? 그래서 지금까지 숲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거고 말이야."
세진이 에세돈에게 물었다.
"저들이 전부가 아니지요."
그 말에 세진과 자넷은 프랜드에그로메로 향하는 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멀리서 느껴지는 한 무리의 병력을 감지했다.
"오호? 뒤쪽에도 있었나? 우리가 여기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딱 맞춰서 우리 감지 범위 밖에 있다가 움직였군. 준비가 잘 되어 있는데?"
"어떻습니까. 항복을 하시는 것이?"
에세돈은 대수롭지 않은 함정에 고스란히 걸려든 세진과 자넷을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어디서나 우두머리는 행동을 무겁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두머리가 모든 일에 앞장서는 것은 장점과 함께 큰 단점을 가지게 된다. 더구나 겨우 기지개를 켜는 세력의 경우에는 우두머리를 잡으면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세진과 자넷을 잡기만 하면 아마도 프랜드에그로메는 기세가 꺾이고 오래지 않아 몰락의 길을 갈 가능성이 높았다.
틸터에서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세진과 자넷이 그 무리의 우두머리란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프란드에그로메에 거주하는 이들을 통해서 정보를 모으고 분석한 결과는 세진과 자넷이 그 세력의 우두머리가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분위기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고 대우하는 것은 말로 하고 행동으로 하고, 생각으로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그것까지 거짓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차라리 가까 세진과 자넷을 만들어 잠시 위험을 피하게 할 수는 있지만 세진과 자넷이 아닌 다른 우두머리가 있을 수는 없다.
그렇게 결론이 나자, 그 둘만 잡으면 소소한 문제는 모두 해결이 된다는 결론이 나왔고, 오늘 그 작전이 실행된 것이다.
"내 부하들이 전부 프랜드에그로메에 있다고 너무 나를 무시하는 것 아닌가?"
"그러게 우릴 어떻게 생각했으면 이런 웃기는 함정을 판 걸까? 차라리 선전포고를 하고 전면전을 하자고 하지."
자넷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에세돈을 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세진과 자넷 주변에 녹두병사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엇?"
에세돈이 깜짝 놀라서 몇 걸음 물러난다.
그리고 그가 물러난 자리에는 또 다른 녹두병사들이 나타나 빈 공간을 메운다. 그리고 세진과 자넷 주변에 녹두병사가 포진을 한 후에는 그 외곽으로 또 다른 병력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헌터룸을 이용하여 의체로 테멜에서 사냥을 하며 수련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이들이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들이 몇 명 있고, 나머지는 익스퍼트 정도의 실력이지만 그 수가 2천에 가깝다. 어느새, 에세돈과 그의 부하들이 완전히 포위가 된 상태가 되었다.
"이게? 어떻게?"
"듣지 못했나? 내가 가진 테멜은 너희가 찾지 못한다고 말이야.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진이 에세돈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에세돈과 그 일행들은 물러설 자리도 없었다. 세진은 손만 뻗으면 에세돈과 악수를 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갔다.
에세돈은 몸을 빼고 싶었지만 녹두병사들 때문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녹두병사들은 모두가 에세돈과 비슷한 기세를 뿜고 있었다.
'그, 그랜드 마스터급이 수십이란 말이 정말이었나?'
에세돈은 믿지 않고, 거짓이라고 치워버렸던 정보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세진과 자넷이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에 다른 그랜드 마스터들과 함께 움직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 수가 수십이라는 보고가 있었다. 하지만 멀리서 관찰한 것이라 잘못 본 것이라고 치부하고 폐기한 보고였다.
그것이 지금 눈앞에 현실로 드러나 있었다.
'이것도 전부가 아니겠지? 그렇다면 지금 우리 틸터는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다. 싸워 이긴다고 해도 덱터에게 밀려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에세돈은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바로잡고 세진과 자넷을 호의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