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의 칼을 빌려서 적을 치는 수법 -- >
LA는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리는 괴수 군단과 녹두병사들을 앞세워서 차근차근 도시 중심으로 진군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포획하는 쪽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세진은 모든 것을 박살내도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어리는 세진과 정신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세진의 진심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화가 나기는 했지만 과격한 파괴나 살육이 이후에 후회가 될 것을 어리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벤진 회장의 빌딩이 있는 곳까지 도착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그런 중에 세진은 자넷과 함께 벤진 회장의 펜타하우스 창밖에서 회장과 그가 거느린 몬스터와 대치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선 분명히 인간과 약속을 했다. 인간과 우리 사이에서 평화를 유지하고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폴리몬은 세진이 자신의 어머니가 한 약속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에테르는 어쩔 거지? 너희는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우리 지구의 생명체들은 그것이 있으면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 따지고 보면 너희의 존재 자체, 에테르의 존재 자체가 곧 지구 생명체에 대한 공격 행위와 같다. 네 말대로 그 행성 코어가 인간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기로 했으면 에테르부터 정화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건..."
20대 후반 백인 남성의 외모를 지니고 있는 폴리몬은 세진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에테르의 존재 자체가 위협이며 공격이라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너희가 지구에 온 것이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래봐야 지구 생명체들의 탄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다. 그런데 너희는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지구의 생명체 모두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너희와 같은 존재들이 이미 이 우주의 많은 행성들을 멸망으로 이끌었다고 말이다. 내가 아는 행성의 숫자만 수백이 넘는다."
"지금은 우리와 너희가 공존하고 있지 않나?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하하하. 그게 가능할까? 네 어머니라는 그 행성 코어에게 물어봐라. 에테르 생산을 멈출 의사가 있는지. 아마 아닐 걸? 언젠가는 모든 기운을 에테르로 바꾸는 것이 그 행성 코어의 목적일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되면 지구의 생명체들은 멸종을 하게 되는 것이고 말이지. 물론 가장 먼저 멸종을 당하는 것은 인간들이지. 너희에게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를 먼저 말살하는 것이 너희의 행동 패턴이니까."
"..."
폴리몬은 세진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세진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진에게 어떤 항변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 덜 여문 폴리몬으로선 세진과 말싸움을 해서 이길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정말 다른 행성들에 갔다는 건가? 눈으로 확인을 했다는 건가?"
벤진 회장이 놀람 가득한 눈빛으로 세진에게 물었다.
"어차피 끝을 볼 사이에 거짓말을 해 서 뭐에 쓰겠어? 맞아. 내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거야."
세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세진이 경험한 것은 지구의 행성 코어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코어가 아니었지만 에테르 기반 생명체란 사실은 분명하니까, 거짓말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변명했다.
그리고 벤진 회장은 잠시 세진의 말에 흔들렸다. 세진의 말이 모두 옳은 것이라면 자신의 행동은 뭐가 된단 말인가.
하지만 벤진 회장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누가 그것을 증명할까? 그리고 네가 말하는 행성 코어란 것이 정말로 지구를 멸망시킬 의사가 있다고 어떻게 장담하지? 네가 말하는 것을 너도 증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몬스터라 부르는 존재들과 우리 인간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 아니냐. 너는 그런 평화를 깨려고 하는 것이다. 네가 옳음을 증명하지 못하지만 네가 옳지 않음은 이미 이렇게 증명되지 않으냐. 평화를 깨는 것은 바로 너다. 너와 프랜드!"
벤진 회장은 그렇게 주장해야 했고, 그렇게 믿어야 했다.
세진도 그런 벤진 회장의 입장을 알아차렸다.
"그렇겠지. 그래서 내가 여기 있고, 너희가 거기 있는 것이다. 서로 적이 되어서!"
세진은 말과 함께 그의 힘을 한껏 끌어 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벤진 회장이 곁에 머물고 있던 몬스터들이 대응을 해 왔다.
"큿, 괴수급이군."
세진은 벤진 회장 곁에 애완동물처럼 엎어져 있던 표범과, 벽에 서 있던 장식 갑옷, 그리고 인간의 외피를 찢으며 나타난 인간형 몬스터까지 세 마리의 몬스터를 확인했다.
하지만 벤진 회장과 그 곁에 있는 세 명의 폴리몬들은 아무 변화도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차차창!
벤진 회장의 집무실 창을 깨고 세 마리의 몬스터가 뛰쳐나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보통 괴수들이 그러하든 그 몬스터들 역시 20미터 이상의 체구로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세진은 깨진 창을 통해서 벤진 회장을 바라보았다. 당장 벤진 회장을 처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마음만 먹으면 일반인에 불과한 벤진 회장의 목은 떨어져 나갈 것이다.
하지만 세진은 시선을 돌려서 이제 몸집을 다 키운 세 마리의 괴수급 몬스터로 향했다.
표범 한 마리와 완전무장한 중세 기사, 그리고 인면지주나 아라크네를 연상시키는 거미인간.
세 마리의 괴수가 세진과 자넷이 타고 있는 탈것을 중심으로 포위를 하기 시작했다.
괴수급이라 그런지 가뿐하게 허공을 밟고 있거나 다른 빌딩의 옥상에 올라서서 세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정도 수준이면 이미 어느 정도 거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마리는 내가 맡을게."
자넷이 표범 쪽을 택하며 말했고, 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당할 자넷이 아니고, 자넷이 위험하면 어리의 지원이 있을 것이다.
아직도 어리에겐 어마어마한 괴수 군단이 남아 있었다.
적어도 지역 코어 등급의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고선 어리를 막을 수 없다.
세진은 괴수급 몬스터 세 마리에게 동시에 디버프를 걸었다.
이미 벤진 회장과 마주칠 때부터 깔아 놓은 디버프 계열의 에테르가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디버프 기반 에테르는 세진의 의지에 따라서 괴수급 몬스터의 체내에도 어김없이 자리를 잡았다.
지금 세진의 경지는 일반적인 그랜드 마스터의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
그런 세진에게 괴수급 몬스터는 그리 부담이 되는 상대는 아니었다.
다만 한꺼번에 두 마리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 번거로울 뿐이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몬스터들이었다. 세진의 디버프에 당하고 몸에 이상을 느낀 순간 곧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표범에겐 자넷이 검을 들고 짓쳐 들어가고 있어서 표범 괴수는 자넷에게 집중을 해야 했고, 거미인간 괴수가 입에서 쏘아낸 빛줄기는 세진이 내민 손 앞에 허무하게 막혔다.
그리고 중세 갑옷 모양의 괴수는 생긴 것 대로 거대한 양손 검을 휘두르며 세진에게 달려들었지만 세진은 살짝 탈것을 이동시켜서 칼을 피했다.25미터 정도 길이의 검이 세진의 곁을 스치듯 지나갔고, 세진은 이어서 괴수들의 몸 안에서 디버품을 작렬시켰다.
디버프 기반 에테르들이 괴수들의 몸 안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괴수급 몬스터라고 해도 이미 세진의 디버프 기반 에테르를 막지 못하는 상황에선 싸움은 끝난 것이라고 봐야 했다.
작은 충격이라도 쌓이면 감당이 되지 않은 한계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괴수들의 몸 안에서는 계속해서 작은 폭발들이 일어났다. 갑옷 괴수는 커다란 고함을 질렀다.
몸 안에서 생체 에테르를 폭발시키듯 끌어 올려서 이질적인 기운과 함께 밖으로 쏟아 내는 쪽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쏟아낸 기운도 그냥 버리진 않았다. 갑옷 괴수는 그 기운을 모두 검끝에 모아서 세진에게 빠르게 찌르기를 시전했다.
제법 먼 거리에서 찌르고 들어온 검은 세진에게 닿을 수가 없었지만 검 끝에서 쏘아진 어마어마한 기운은 곧바로 세진을 집어 삼킬 듯이 밀려들었다.
"읏차. 제법이야. 버릴 기운도 재활용을 할 줄 아는군."
세진은 어쩔 수 없이 양손을 뻗어서 에테르 방패를 만들어 냈다.
그대로 피해서 뒤로 흘려버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아마도 뒤쪽에 있는 건물들 수십 개는 박살이 날 것이고, 그 안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할 것이다.
아무리 LA시민들이 밉다고 하지만 그렇게 횡액을 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막을 수 있으니 막아주겠다는 세진의 생각인 것이다.
콰과과광!
우르르르르.
세진의 에테르 방패에 부딪힌 갑옷 기사 괴수의 에테르가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폭발을 일으켰고, 가장 가까이 있는 벤진 회장의 빌딩이 그 충격에 몸을 떨었다.
키에에에에!
그 순간 거미인간 괴수가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세진과 그 주변으로 넓은 거미줄을 펼쳤다.
마치 투망을 던지는 것처럼 넓은 범위를 점하며 세진을 옭아매려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세진은 슬쩍 손을 들어서 내리 긋는 행동으로 그 거미줄 그물을 잘라냈다.
이미 따로 무기가 필요 없는 세진이 빈손으로 허공을 격해서 거미줄을 잘라 낸 것이다. 투두두두두둑. 투툭, 퍼벙!
그리고 동시에 거미 인간의 여덟 개 다리의 관절에서 작은 폭발들이 일어나면서 거이 인간의 다리가 전부 해체되었다.
그리고 배와 몸통을 이어주는 잘룩한 허리까지 제법 큰 폭발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키이이이익. 키이익.
거미 인간은 상체와 하체가 따로 떨어진 상태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갑옷 괴수는 그런 거미인간 괴수를 구하기 위해서인지 더욱 맹렬한 기세로 검을 휘둘러왔다.
"둔하고 느리다."
하지만 세진은 그 갑옷 괴수의 공격을 파르티크가 함유된 탈 것을 이용해서 자유롭게 허공을 날아다니며 피했다.
거대한 몽둥이로 파리를 잡으려는 거인의 모습이 아닐까. 세진은 자신을 파리에 견주며 살짝 웃었다.
"이런 운이 없으면 간혹 몽둥이에 맞아서 곤죽이 되는 파리가 있기는 하지. 그러데 그러려면 속도가 더 빨라야 하는 건데, 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세진은 더 이상은 시간을 끌지 않기로 했다.
괴수 따위는 이제 세진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세진의 머리 위로 거대한 에테르 창이 나타났다.
마치 기사들이 마상창 시합에서 사용하는 랜서를 닮은 창은 곧바로 갑옷 괴수에게 쏘아져 나갔다.
"아, 방패가 없구나. 미안하네."
콰과과광!
갑옷 괴수도 그냥 당할 수 없다는 듯이 에테르 랜서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지만 그 결과는 검을 박살내며 짓쳐 들어간 창에 꽤뚫리는 꼴이 된 것 뿐이었다.
"아, 너도 그만 가라."
퍼버버벙!
세진의 눈길이 상체만 살아서 꿈틀거리는 거미인간에게 닿는 순간, 거미 인간의 몸 안에 가득 차 있던 디버프 기반 에테르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세진은 두 마리의 괴수급 몬스터를 처리하고 시선을 돌려서 자넷과 표범의 싸움을 봤다.
표범은 이미 몸 여기저기를 베이고 찔린 상태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오래지 않아서 결착이 날 것이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세진은 다시 벤진 회장의 집무실까지 탈것을 상승시켜서 다가갔다.
"이런!"
하지만 세진의 눈에 보인 모습은 예상치 못했던 모습이었다. 벤진 회장은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고, 폴리몬들 역시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빈사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쿨럭. 강하구나. 하지만 그래봐야 어머니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겠지. 나도 알아. 그 행성 코어가 강하다는 것을. 하지만 그 코어도 지금은 멋대로 움직이지 못하잖아."
"그걸 어떻게?"
"멋대로 움직였다가는 도리어 당할 테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자유로운 거 아니겠어? 나는 잔챙이를 상대하는 역할인 거지."
"설마?"
"뭐? 묻고 싶은 거라고 있나? 죽기 전에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물어 보도록. 나는 설마하니 저 놈과 너희가 이런 꼴이 될 거라곤 생각을 못했어. 괴수급이 싸우는데 뭘 믿고 버티고 있었던 거지? 대책이 없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군."
세진은 슬쩍 폴리몬에게 시간을 주면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머리를 쓰고 있었다. 질문이 곧 정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세진은 알고 있었다.
"정말로 너희와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폴리몬의 질문은 세진의 예상과는 달랐다. 세진이 그 미지의 존재, 즉 행성 코어와 싸우고 있는 존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하는 그런 식의 질문이 나오길 기대했는데 전혀 다른 방향의 질문이 나온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너희 어머니라는 행성 코어에게 달린 문제야. 그가 에테르의 생산을 조절해서 지금 지구의 에테르 농도를 절반 정도로 낮춰 주고, 그 상태를 유지한다면, 그렇다면 어쩌면 공존이 가능하겠지. 하지만 내가 아는 행성 코어는 그런 경우가 없어. 끝없이 에테르를 늘려서 행성을 점령하고 끝내는 행성 전체를 너희 에테르 기반 생명체들의 세상으로 만들려고만 했지."
"그럼, 가능성은 있는 것인가?"
"의지를 지닌 코어이니 또 모를 일이지만 아쉽게도 행성 코어가 약속을 해도 그 약속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지. 조약이거나 약속이거나 그것을 어기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어야 하는 거거든."
"그럼 가능하지 않은가? 지구의 의지와 어머니는 서로 비슷한 힘을 지니고 있고 서로 감시하는 것이 가능하니 서로 약속을 하게 되면, 공존의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게 네 어머니, 그러니까 행성 코어의 생각이야?"
세진은 혹시 하는 마음에 물었다.
"아니다. 다만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
세진도 진심으로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명의 기반이 전혀 다른 상황이라 양측이 공존하는 것은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세진을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