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디어디 숨었니, 머리카락 보일라 -- >
세진과 자넷 그리고 어리는 데블 플레인 연합의 타모얀 행성에 도착해서 곧바로 클리르 행성으로 통하는 테멜 게이트를 이용했다.
물론 연합의 승인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이미 세진과 자넷의 실력이 널리 알려져 있는 상황이고, 그 전에 두 사람이 괴수 퇴치를 밥먹듯 하면서 쌓아 놓은 빚이 있어서 누구도 두 사람의 행보를 막지 못했다.
다만 허서르 프락칸이 어떻게든 세진 일행을 따라 나서려고 해서 그걸 말리느라 진땀을 빼긴 했다.
허서르는 세진과 자넷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었지만 어리 테멜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니 그녀도 방법이 없었다.
아쉬워하는 그녀를 뒤로 하고 곧바로 클리르 행성의 테멜로 나온 세진과 자넷은 또 다시 덱터의 사람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역시 무력 시위를 한 세진과 자넷, 그리고 어리의 괴수들 덕분에 세진은 어렵지 않게 테멜을 벗어날 수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덱터의 본부가 있는 에그로메로 달려가서 그곳의 디퀴피드를 낱낱이 해부를 해 보고 싶었지만 아직 클리르 행성의 균형을 깰 때가 아니란 생각에 참았다.
그리고 곧바로 이전에 세웠원 프랜드에그로메에 들러서 어떻게 유지가 되고 있는지 살폈다.
세진이 직접 관리를 할 때에 비하면 생활 환경이 나빠지긴 했지만 에그로메, 즉 도시의 기능은 제대로 살아 있고, 사람들도 잘 적응하고 있었다.
어렵게 세웠던 도시가 아직도 건재한 것에 살짝 보람을 느낀 세진은 프랜드에그로메에 약간의 지원을 해 주고는 곧바로 다시 틸터에그로메로 향했다.
그곳에 디퀴피드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정말 너무한 것이에요."
어리는 여전히 투덜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디퀴피드의 끈적거리는 에테르 때문에 자신의 감각이 제한을 받는 것은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리가 타모얀 행성에서 지역 테멜 코어를 흡수한 보람이 있어서 반경 2Km까지는 어리의 감지 범위가 늘어났다.
이전에는 겨우 30미터가 고작이었던 때도 있었다. 그럴 생각하면 그야말로 세숫대야에서 풀장으로 뛰어든 느낌일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제한받는 감각 때문에 눈썹을 찌푸리는 어리다.
"유후, 다 도착을 한 것이에요."
어리가 틸터에그로메에 도착했다고 알린다.
세진과 자넷이 테멜 안에 있는 동안에 밖에 있는 어리 앵무가 연속으로 순간이동을 사용해서 틸터에그로메까지 내달린 것이다.
초당 두 번 정도씩 순간이동을 하니 어리는 1초에 4Km를 이동하는 셈이다.
그러니 세진과 자넷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파르티크 탈것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이동을 할 수가 있다.
"음, 굳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디퀴피드를 스캔할 수 있지 않나?"
세진이 어리에게 물었다.
"안 되는 것이에요. 안쪽으로 디퀴피드의 에테르가 어마하게 쌓여 있는 것이에요. 마치 엑스레이 촬영을 막는 납 방어벽 같은 것이에요."
"그럼 하는 수 없이 직접 들어가야 되겠네. 그런데 안 들키고 움직일 수 있으려나?"
세진이 살짝 투덜거렸다.
굳이 틸터에그로메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도 디퀴피드를 살필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단 숨어 들어가 보고, 가서 걸리면 그 때는 뭐 상황 설명을 하고 당당하게 움직이면 되겠지. 우리가 너무 우리 생각만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틸터 쪽에 손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잖아."
"하면 안 되는 짓이지만 어쩌겠어. 내 코가 석 자인데. 자, 어리야 들어가 보자."
세진은 이렇게 저렇게 상황을 설명하고 대가를 치른 후에 디퀴피드의 정보를 얻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막상 클리르에 도착을 해 보니, 틸터나 덱터나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아무도 모르게 정보만 얻어서 떠날 생각을 한 것이다.
"난리가 났다더니 그 이유가 당신들이었던 모양이로군."
양쪽 눈썹이 길게 늘어져서 광대뼈 밑까지 이어진 노인이 처진 눈꺼풀 밑으로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세진과 자넷을 맞이했다.
세진 일행은 외부에서부터 디퀴피드의 모든 것을 샅샅이 파악하며 점차 디퀴피드 에테르의 양이 짙은 내부로 들어갔다.
운이 좋았던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디퀴피드의 중심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좋았지만 마지막 관문을 남겨두고 노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곧게 뻗은 복도 끝에서 막다른 벽과 문을 만났는데, 그 문을 열고 나온 것이 이 노인이었다. 세진은 그 노인의 실력이 자신과 비슷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린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만 그 안쪽에 있는 디퀴피드의 핵심을 보고 싶을 뿐이다."
"허허. 이게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얼마 전에 저쪽 행성에서 이쪽으로 건너온 이들이 있다고 해서 지금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회의를 하네 어쩌네 하면서 시끄러운 틈에 여긱까지 잘 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안쪽까지 들여보낼 수는 없지."
"우린 디퀴피드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여기 있는 것을 가지고 가거나 부품을 욕심내는 것은 아니다. 그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만 알면 된다. 그러니 견학을 할 수 있게 해 줬으면 좋겠다. 부탁하겠다."
세진은 이례적으로 노인에게 부탁이란 말까지 써가며 협상을 하려 했다.
"디퀴피드는 우리도 덱터 놈들에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얻어 낸 것이지. 그것을 공짜로 내 놓으라는 것인가? 흘흘, 그건 강도짓이나 다름이 없지."
"그럼. 뭘 원하는가? 솔직히 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면 고려해 보겠다."
"흘흘흘. 원하는 것이라. 그런 이 늙은이와 대화나 좀 하려는가? 처음에는 겉모습만 젊은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속도 그리 늙은 것은 아닌 듯 하군."
노인은 세진이 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세진은 그런 노인의 대우에 발끈했다.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속한 인종은 내 나이면 관을 짜고 죽음을 대비해야 할 나이지."
"흘흘흘. 그런가? 그럼 내가 실수를 했다고 하지. 자자, 이리 오게."
노인은 세진과 자넷은 한쪽 구석의 테이블과 의자 쪽으로 이끌었다.
방도 아니고 복도의 끝에 그런 것이 놓여 있다는 것이 세진과 자넷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흘흘.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지지. 나는 벌써 몇 십 년을 이곳에서 디퀴피드를 연구하며 지내고 있네. 사실 이 디퀴피드를 만든 것도 나였지.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겉만 흉내를 낸 것이지만."
"흉내?"
세진은 노인의 말에 인상을 썼다.
여기 있는 디퀴피드가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니라는 소리인 것이다.
"뭘 그렇게 인상을 쓰나? 그래도 지금 상요하는 용도로는 확실히 저 쪽 덱터 쪽의 것과 다를 바 없는 기능을 지니고 있네. 그러니 그렇게 인상을 쓸 일이 아니지. 다만 덱터 쪽의 것이 쓸 수 있는 기능을 우리 쪽에서 쓰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점이 문제지. 솔직히 그게 내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야. 그래서 이곳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머물고 있는 거지."
"그럼 차라리 덱테 쪽으로 갈 것을 그랬군. 그랬으면 일이 쉬웠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흘흘. 그러다가 자칫 공들여서 만든 디퀴피드가 박살이 날 수도 있지. 클클. 잘못 건 들면 행성에 있는 몬스터들이 전부 그 디퀴피드를 부수기 위해서 몰려들지. 클클. 재미있지 않나? 행성 전체의 몬스터가 몰려든다니 말이야. 그건 괴수도 예외가 아니고, 심지어는 지역 등급의 몬스터도 몰려오지. 전해지는 기록에 의하면 분명히 지역 등급의 몬스터까지 여럿 등장했다고 하더군. 뭐 그러니 대책없이 박살이 나는 거지."
"아니, 디퀴피드가 어쨌다고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흘흘. 저건 잘못 조작을 하면 행성에 퍼져 있는 에테르 전체에 간섭을 해서 에테르를 흡수, 동결, 정화 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 물건이지. 지금처럼 그저 감지 장치로 쓰일 물건이 아닌 것이야."
"아니 그럼 그 범위 전체의 에테르를 흡수하거나 동결시키거나 정화할 수 있다는 건가? 그게 가능한가?"
"물론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흡수나 동결은 그나마 조금 빠르게 되지만 그건 별로 의미가 없어. 흡수해서 어떻게 할 건가? 그것을 따로 모아서 응축시킨 기술이 없으면 소용이 없지. 에테르를 그렇게 뭉쳐서 얼마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지. 그 후엔 다시 풀어 줘야 해. 그리고 일정 지역의 동결, 그게 지금 사용하고 있는 감지 장치로 쓰이게 된 기능이지. 동결이라고 하지만 완벽하게 굳혀 버릴 수는 없고, 지금처럼 끈적거리는 정도로 만드는 거지. 완전 동결을 하면 역시 이곳으로 이 행성의 몬스터가 모두 몰려 올 테니까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거지."
"그럼 정화라는 것도?"
"그렇지. 에테르를 행성의 본래 에너지로 전환하는 기능이지. 하지만 이건 시늉만 하더라도 몬스터들이 죽자고 덤비지. 대책이 없는 거야. 그래도 이 기능을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너무 에테르 농도가 높아져서 행성의 생명체들이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을 때, 함께 죽자는 심정으로 사용을 했다더군."
"그래서 결과는?"
"에테르 농도를 낮추는데 성공했지. 대신에 디퀴피드가 있던 지역이 완전히 초토화 되고 말았지."
"몇 개를 만들어서 연속으로 사용을 하면 행성의 에테르를 완전히 없앨 가능성도 있겠군."
"허허허. 지금 디퀴피드의 규모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자그마치 거대 도시 하나의 크기야. 이걸 여럿 만든다고?"
"아니면 몬스터가 닿지 못하는 허공에 띄워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지. 이 디퀴피드는 기본적으로 행성의 기운도 사용을 해야 하지. 그래서 땅 속으로도 1Km 이상 파고 들어가 있어."
"아무튼 정화 기능이라는 거 그거 마음에 드는군. 몰려오는 몬스터만 막을 수 있다면 충분히 쓸모가 있지 않은가 말이지. 그도 아니면 그걸 만들어 놓은 행성에서는 행성 코어가 발생하지 않겠군. 적어도 에테르가 그 행성에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있다는 소리지."
"오호? 그런 식의 이용은 나도 생각을 못했군. 몬스터들이 없는 행성에 설치한다는 것은 말이야. 좋은 방법이 될 것 같군. 말대로 설치하고 유지만 한다면 행성에 에테르 기반 생명체가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지."
"흠. 그런데 여기 있는 것이 짝퉁이라고?"
"짝퉁이라니 그건?"
"그러니까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고 흉내 낸 것이라서 기능이 떨어지는 것을 말하는 거야."
"커엄."
노인은 세진의 신랄한 비판에 목에 걸리는지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여기 있는 것은 어떤 기능까지 가능하지? 역시 지금 쓰고 있는 감지기 역할 밖에 하지 못하는 건가?"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하지만 새로 만든다면 다른 기능들을 살려서 만들 수 있을 거네. 아무렴."
"그거 확실한 거야? 만들고 나서 흡수는 되는데 정화는 안 된다는 그런 소리 하는 건 아니고?"
"크으음."
노인은 세진의 말에 확답을 하지 못했다.
"이봐. 솔직히 말해.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 거야?"
세진이 추궁하듯 물었다.
자넷은 처음부터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다.
"아까도 이야길 했지만 그게 제대로 된 물건이면 수 많은 연방의 행성들이 혹시 모를 행성 코어의 등장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안 그래? 그건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커어엄. 솔직히 지금까지 내가 연구한 결과를 놓고 보면 정화는 아직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을 것 같네. 동결이나 흡수는 거의 자신할 수 있네."
"그거 말이야. 저 쪽에 있는 덱터의 디퀴피드를 제대로 살피면 좀 나아질까?"
세진은 그럴 수 있다면 노인을 끌고 덱터에그로메까지 쳐들어갈 생각도 있었다.
"휴우, 그게 사실은 필요 없는 짓이네. 그 쪽에 있는 것도 자네 말대로 하면 짝퉁이거든."
"뭐?"
"맞아. 원본과 다르지."
"그럼 원본은 어디에 있다는 거지?"
세진이 물었다.
"말하지 않았나? 함께 죽자고 했다고 말이야."
"그, 그럼?"
"그렇지. 그 때, 박살이 났지. 그 후로는 다시는 제대로 된 디퀴피드를 복원하지 못했던 거고."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우리 종족이 그랬으니까."
"뭐라고?"
노인의 말에 세진은 깜짝 놀랐다.
"우리 종족만이 디퀴피드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사실 여길 구경시켜 주는 것이야 어려울 것이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디퀴피드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 만들어도 가동이 되지 않아. 우리가 있어야 하지."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는 이런 거지."
세진의 말에 노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세진과 자넷은 그 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