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히알락을 떠나 전장으로 향하다 -- >
두 번째 전사 시험은 파란을 일으켰다.
자히알락의 전사 시험 응시자 23명 모두가 무기에서 흐릿한 빛을 끌어내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것은 이변이었다.
그런 실력이 되자면 적어도 20대 후반이 되어야 했다.
그것도 꽤나 재능이 뛰어나서 전사 시험에서 아슬아슬하게 탈락한 사람들이 그 정도 나이가 되어야 겨우 오를 수 있는 경지였다.
그렇지 않은 경우 재능이 없으면 평생을 살아도 오르지 못하는 경지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경지에 모든 아이들이 올라 있었다. 당연히 자히알락의 족장과 원로들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족장과 원로들을 계획대로 세진의 존재와 그의 수련법에 대해서 장황하게 떠들었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그런 것이 있으면 진작 공유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쉰 개가 넘는 의자가 놓은 자리에서 고성이 오고 갔다.
하지만 자히알락의 젊은 족장은 그저 끝까지 웃는 얼굴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원로들이 그에게 꼭 그렇게 하라고, 어설프게 대꾸하다가 덤테기 쓰며 곤란하다고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시킨 탓이었다.
꼭 핏줄을 따라서 족장을 정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히알락의 족장이지만 그래도 현명한 원로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재주는 있었다. 그 덕분에 자히알락의 위기는 무사히 넘어가게 되었다.
곧바로 쉰 개의 의자가 놓은 자리에서 세진 가족의 수련법을 모든 부족들이 공유하고 함께 나누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대신에 자히알락 부족에겐 수련법을 공개한 공을 인정해서 3년 동안 최고의 초지를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전리품 아닌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온 이들은 23명의 전사들이 마을을 떠난 슬픔을 그것으로 채우려는 듯이 크게 잔치를 열었다.
그리고 그 후로 며칠 지나지 않아서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다음 전사 시험에 응시할 아이들을 인솔해 온 각 부족의 전사들이었다.
아이들은 수련법을 익혀서 다음 전사 시험에 참가를 하게 될 것이고, 인솔자들은 수시로 세진의 수련법을 자신의 부족으로 전할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아직 머리도 묶지 않은 여자 아이들이 잔뜩 있었다. 그 아이들은 결혼 적령기를 몇 년 남긴 아이들로 자넷과 어리에게 교육을 받을 아이들이었다.
여자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서는 부족들 모두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여자들은 수시로 약탈혼을 통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 때문에 딱히 어떤 부족의 소속이라는 소속감 같은 것을 따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수련법을 익힌 여자들이 신부로서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될 테고, 그래야 다른 부족에서 서로 여자를 바꾸지는 요청이 많이 들어올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마을 총각들이 결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여자 아이들을 서둘러서 자넷과 어리에게 보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뭇 남자들이 욕심낼 신붓감을 만들어야 부족의 남자들도 결혼을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또 1년이 더 흘렀다. 그 사이에 세진은 자그마지 12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련법을 가르쳐야 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 대부분이 익스퍼트에 오르거나 혹은 경계에 도달했을 때, 부족 전체가 모이는 전사 시험이 열렸다.
그리고 이 자리에 세진은 처음으로 참관을 허락받았다.
아이들을 가르친 사람이 세진인데 그를 시험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부족의 족장과 원로들이 세진의 시험 참관을 허락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세진은 자넷과 어리를 동반했다.
물론 시험장에는 오지 못하지만 외곽에서 시험을 돕는 이들 사이에서 기다리게 했다.
이번 시험이 끝나고 나면 세진은 어머니의 전사로 뽑힌 아이들과 함께 전장으로 향할 결심을 한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자넷과 어리도 함께 한다.
둘을 떼어 놓고 혼자만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 전사 시합은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시합이었다.
기마술, 궁술은 기본이었고, 특히 마가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기운의 사용이 중요한 것이 전사 시험이었다.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가스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등급이 높은 마가스가 몸에 두르고 있는 보호막을 깨기 위해서는 전사도 기운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니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마가스와 싸워서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아이들은 모두가 이전에 뽑혔던 아이들 수준의 능력을 보였다.
거기서 상위 30%를 뽑아놓고 보니 전부가 무기에서 빛을 뽑아 내는 경지다. 더구나 어떤 아이들은 그 빛이 완연해서 경지에 확실히 들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아이들도 있었다. 세진은 그 아이들이 익스퍼트 중급에 가까워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사실 그것은 세진의 수련법이 뛰어난 이유도 있지만 그 전에 집안의 비기로 익힌 것이 꽤나 좋은 수련법이고 거기에[ 재능도 뛰어난 아이들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익스퍼트 중급에 가까운 실력을 이룰 수가 있을까.
아무튼 그렇게 전사를 뽑는 시험은 무사히 끝이 났고, 결국 360명의 전사가 뽑혔다.
매년 이 초원에서 360명의 아이들이 하늘 어머니의 전사가 되어서 전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전장에서 인솔자가 나오고, 이쪽 부족들에서도 아이들의 지휘자를 세운다.
아이들은 이후로 그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서 전장을 누비게 되는 것이다.
세진은 우여곡절 끝에 이번 아이들의 지휘권을 받았다.
사실 하늘 어머니의 전사가 되어서 전장으로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주 큰 공을 세우면 잠시 마을에 들러서 그 전공을 자랑하는 기회가 있지만 그래도 다시 전장으로 가야 한다.
전장에 간 아이들이 얼마나 살아남고, 또 얼마가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장에 대한 소식은 밖으로 알려지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 아내와 여동생까지 데리고 가겠다는 세진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세진의 실력이 뛰어난 것을 알고 있던 부족의 족장들은 의자 회의를 거쳐서 세진에게 이번 기수의 아이들을 맡기기로 했던 것이다.
"잘, 가."
울렉치가 짧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언젠가, 하늘 어머니가 땅의 어머니를 물리치면 그 때에 보자."
세진이 울렉치의 등에 대고 그렇게 인사를 했다. 그 인사는 고래로 이곳 판겐에서 이어지던 인사였다는데 언제부턴가 사람들 사이에서 쓰이지 않게 된 인사였다.
전장의 상황에 변화가 없고, 승리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묻혀버린 인삿말인데 그것을 세진이 쓴 것이다. 반드시 승리하고 돌아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울렉치가 돌아서서 붉어진 눈으로 세진을 봤다.
그 사이에 정이 깊어진 것을 세진은 세삼 느꼈다.
"안다. 너는 나의 안다다."
세진이 말했다.'안다'는 몽골어로 친구, 벗, 동료, 의형제란 뜻이다. 울렉치는 그 뜻을 몰랐지만 그냥 웃었다. 뭐가 되었건 울렉치는 세진의 '안다'가 되어 줄 생각이었다.
"나는 너의 안다다. 그럼 너도 나의 안다인가?"
"당연하지. 안다."
세진은 울렉치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괜찮아?"
자넷이 세진에게 물었다.
오랜만에 세진이 마음을 열고 깊게 사귄 사람이 울렉치인 것이다.
딱히 무엇을 하지도 않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에게 젖어들어 어우러진 두사람이었다.
세진의 섭섭함이 어느 정도일지 자넷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넷 역시 자매나 딸같이 지내던 여자들과의 이별로 가슴이 먹먹하였다.
"엉엉. 어리는 슬픈 것이에요. 어리의 추종자들은 모두 슬퍼서 울고 있었던 것이에요. 엉엉엉."
어리는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고 있었다.
"이제 출발을 하지."
세진이 그렇게 말하며 말에 올랐고, 자넷과 어리는 나란히 마치의 마부석에 올랐다.
마차는 이곳 초원에선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었다.
이곳 초원에는 다른 것은 다 있어도 바퀴가 없었다.
바퀴가 없으니 당연히 마차가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짐들은 말이나 가축의 등에 지우고 이동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세진이 초원을 떠나면서 준 선물은 우연찮게도 바퀴가 되었다. 아마 자히알락에 몇 대 만들어 놓은 허름한 수레가 이후로 이들에게 큰 문화의 변화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봐야 나무가 귀한 곳이라 그런 수레를 만드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일 테지만.360명의 아이들은 십인대와 백인대, 그리고 60명의 직할대로 편재를 나눴다.
아홉 명을 지휘하는 십인대장, 십인대장 아홉을 지휘하는 백인대장, 그리고 직할대의 대장까지 지휘 체계는 명확하게 나눠졌다.
"이 명령 체계는 언제나 확고하다. 잘못된 명령이라도 무조건 따라야 한다. 다만 이후에 잘못된 명령을 내린 것이 확인된 지휘관은 그 잘못의 경중에 따라서 처벌을 받게 된다. 심한 경우에는 추방도 있을 수 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럼 십인장의 명령에 나머지 아홉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겁니까?"
새로운 체계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이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 내가 모두를 지휘하겠지만 때로는 내가 내린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다가도 판단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는 백인장이 판단을 한다. 백인장이 판단할 일이 아니고 십인장이 해야 할 일은 십인장이 내 명령과 백인장의 명령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율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소리다. 알겠냐?"
"..."
아이들은 대답이 없었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모르겠으면 직접 경험으로 알아야지. 지금부터 전장까지 이동하는 동안에 수시로 실전을 염두에 둔 훈련을 한다. 상황이 떨어지면 그 상황에 맞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 결정은 언제나 백인장과 십인장이 한다."
세진은 그렇게 결정을 했고, 이후로 아이들은 수시로 마가스의 습격을 가정한 모의 훈련에 시달려야 했다.
"흐음. 흥미로운 훈련이오."
그 모습을 전장에서 나온 인솔자가 지켜보다가 세진에게 처음으로 사적인 말을 걸었다.
"흘락치님께서 어쩐 일로 제게 말을 다 걸고 그러십니까?"
세진은 흘락치라는 인솔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홀락치가 처음부터 딱딱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인 이유도 있지만 어쩐지 세진과 아이들을 무시하는 느낌을 준 이유도 있었다.
홀락치는 거의 마스터에 근접한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런 실력으로 세진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당랑거철이나 다름이 없었다. 세진은 이미 마스터의 경지를 밟은 상태인 것이다.
물론 너무 속성으로 올라간 것이라 아직 기운의 양이 많이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스터의 증거인 강기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성공을 했다.
비록 반쪽 마스터라서 오래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것은 수련 기간이 짧아서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여하튼 세진 입장에서 홀락치는 실력도 되지 않는 놈이 세진과 아이들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고깝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홀락치는 전사 시험에는 참관도 하지 못했다. 시험이 끝나고 도착을 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홀락치가 조금씩 아이들의 수준을 확인하면서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커엄. 미안하오."
홀락치는 의외로 삐딱한 세진의 반응에 사과의 말로 응대했다.
세진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홀락치와 눈을 맞추었다.
예상 밖의 반응이 세진의 흥미를 끈 것이다.
"전장은 정을 쌓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오. 하늘 어머니의 전사로서 명예로운 죽음이겠지만 그래도 죽음을 슬프오.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가까운 사람을 두지 않게 되오.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그 슬픔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전사로 맡은 임무를 다할 뿐이오. 그러니 세진 당신이 이해를 하시오."
세진은 훌락치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친인의 죽음을 경험하다가 결국에는 친인을 두지 않기로 한 사람.
그에게 뭔가 인간적인 것을 기대하며 그것을 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세진이었다.
"어린 전사들의 실력이 출중하오. 사실 초원 지역에서 모이는 아이들이 제법 있지만 다들 실력이 별로 대단치 않소. 다른 곳에서 오는 아이들과 비교해도 평균 이하요. 물론 말을 잘 타고 또 활을 잘 쏜다는 특기 때문에 아주 쓸모가 없다는 평은 듣지 않지만 그래도 막상 등급이 높은 마가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니 하급 마가스를 상대할 때에나 위력을 보인다는 평이 지배적이오."
세진은 익스퍼트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라면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다르오. 지난 해에도 제법 실력이 있는 이들이 많았다고 들었지만 올 해는 정말 놀랍소. 그래서 궁금해서 그대를 찾아 온 것이오. 어떻게 된 것이오?"
훌락치의 질문은 굉장히 포괄적이었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세진은 지난 3년의 자히알락 생활을 훌락치에게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