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김사범, 고민에 빠지다(2)
전지훈련이 끝나고, 어느새 3월이 되어 새 학기가 시작했다.
정말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반 친구들. 고3, 여기 있는 친구들도, 나도 힘든 시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야구부의 수업은 단순하다.
잠, 아니면 더 깊은 잠.
힘든 훈련을 하는 야구부엔 수업이란 꿀 같은 낮잠을 자는 시간일 뿐이다.
머리가 복잡한 나만 빼고.
‘4월이 되면 주말리그 시작이다. 그 전까지 내가 채울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힘 : 999(현재 적용 : 231)]
[999999번의 스윙(비활성화)
- 활성화까지 49000/999999]
‘힘은 갈수록 빠르게 오르네. 점점 가용 출력이 늘고 있어.’
‘스윙은…… 시간이 답인가. 분명 중간에 몇몇 스킬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침내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던 주제에 닿는다.
‘실력으로 잠재운다고? 실력, 인정하지. 근데 그것만 가지고 애들이 널 따를지 모르겠다.’
곤란하다. 빨리 프로에 가고 싶다.
* * *
야구부의 훈련시간.
타격 연습을 위해 배팅 케이지로 들어섰다.
공이 배트에 맞고 하늘로 사라지는 순간, 이 순간이 너무 즐겁다.
그렇게 잠깐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배트를 더 휘두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타석을 나와 몇 번의 스윙을 하며 폼을 점검하고 있을 때, 뜻밖의 인물이 날 찾아왔다.
“선배님. 혹시 시간 되십니까?”
최원표, 2학년 1루수. 청백전 때 날 대놓고 무시했던 놈이 사뭇 정중하게 말을 건다.
“어, 말해라.”
“그…… 죄송합니다! 제가 좀 말을 생각 없이 하고 또 무시하는 경향이, 아니 선배님을 무시한다는 게 아니라! 제가 아니라 제 뇌 속의 고양이가…….”
“됐고, 본론만.”
“……타격 좀 봐주시겠습니까?”
요새 잘 안 맞는 거 같더라니.
“그런 건 코치님하고 말해야지. 내가 할 건 아닌 거 같다.”
“코치님하고 상의하고 온 겁니다. 폼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 타이밍도 똑같은데 공이 안 맞습니다.”
“음?”
“코치님이 한번 선배님에게 도움을 받아 보라고 하셔서……. 이런 부분에서는 한 번 극복한 사람이 더 도움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 뻔히 보인다. 누가 설계한 거지? 설마 감독님?
“후……. 내가 봐줄 순 있는데,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네! 괜찮습니다!”
‘팔자에도 없는 타격 코치라니.’
예전 프로 시절에도 종종 이런 경우가 있었다.
‘그땐 몇 마디 던져 주면 장비라도 얻어 쓸 수 있었지…….’
“케이지 들어가서 보여 드릴까요?”
“아냐, 필요 없다. 봤어.”
“네?”
원표를 데리고 운동장 구석으로 간다. 코치의 지시지만 이런 건 알려지지 않는 게 좋다.
가져온 공을 몇 군데에 놓는다.
“여기가 배터박스, 공이 온다 생각하고 휘둘러 봐라.”
“네? 오른발 쪽에 공이 있는데요?”
“그거 안 밟겠다고 생각하고 그 전까지만 뻗어.”
문제는 단순하다.
“너무 스탠스가 좁아지는 거 아닌가요?”
장타자의 자질이 없는 놈이 강하게 치려고 하니 타이밍이 어긋나는 거다.
“일단 해 봐.”
후웅!
“어때?”
“네?”
“그게 원래 네 스윙이야.”
“어……. 잘 모르겠는데요…….”
어려운 문제인가? 아닐 텐데.
“웨이트-시프트를 이용해서 칠 거면 레그킥 이후 중심이동을 더 능숙하게 하는 걸 목표로 해라. 괜히 세게 친다고 스탠스만 넓히지 말고.”
“아!”
“그리고 너, 그렇게 해도 비거리는 크게 늘지 않을 거다. 차라리 타구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생각해라.”
표정이 오묘해진다.
“됐지? 간다. 나도 훈련해야 해서.”
“선배님!”
“왜?”
“왜 제가 장타자가 될 수 없죠?”
“약한 손목, 둔탁한 힙턴. 과도한 어퍼 스윙, 그리고…….”
“잠깐…… 잠깐만요!”
당황하며 말을 끊는 녀석. 모르고 있었나?
“선배님이 하신 말씀. 확실한가요?”
미국, 일본, 한국. 시중에 출판된 모든 타격이론서를 다 읽었다.
“어. 거의.”
“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제점이 해결됐는데도 기운 없이 돌아가는 녀석. 역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학생을 교육하긴 힘들다.
* * *
“훅…… 훅…….”
체력이 떨어져 간다. 방망이 끝에 실리는 힘이 내 몸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후에 프로에 진출하고, 시즌이 끝날 때쯤이 되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거다.
익숙해져야 한다. 힘 자체에 먹히면 언젠가 그 반동이 나를 덮칠 거다.
“김사범! 집에 안 가냐고!”
“어? 언제 왔냐?”
나 혼자 있던 실내 연습장에 어느새 몇몇 애들이 보인다.
“언제 왔지? 오늘 훈련량이 좀 부족해서. 좀 더 해야 한다. 너는 안 가냐?”
“나 기숙사 산다. 관심 좀 가져라.”
김태연이 툴툴댄다.
“나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말해, 짧게.”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냐?”
“응?”
“지금 정도면 이렇게 무리하는 것보다 몸 관리를 잘하는 게 중요하지 않아? 드래프트도 있고, 지금 다치면 말짱 꽝이잖아.”
“……또다시 후회하긴 싫거든.”
“다시? 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른다. 녀석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감정이지만, 굳이 설명하진 않는다.
“아무튼, 몸 좀 아끼라고. 너 이제 우리 팀에 있어 큰 전력이야.”
“그래, 더 할 말 없지? 아직 좀 남아서.”
“큭, 알겠다. 방해 안 할게.”
다시 시작한 스윙. 정해 놓은 훈련량을 끝내고 주변을 둘러보자 아까보다 더 많은 애들이 와서 훈련 중이다.
‘기숙사 살면 편하긴 하겠네. 야간훈련도 이렇게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다른 녀석들과 노크 배팅을 하는 김태연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 * *
한공고 감독실.
“요즘 애들이 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나도 봤네. 너무 무리하지 않게 잘 지켜봐야 해.”
“네, 안 그래도 오기 전에 들여보내고 오는 길입니다.”
“잘했군.”
“근데 저…….”
“이걸 노린 거냐고 물어볼 셈이지?”
“네, 원표도 그렇고, 이걸 노리고 사범이를 주전으로 세우신 겁니까?”
“부수적인 거지. 기본은 실력이네.”
싱긋 웃으며 말을 잇는 이종협 감독.
“덩치가 산만 해도 애들은 애들이야. 프로선수들처럼 강한 프로의식을 갖기는 힘들지. 그럴 땐 위기의식과 목표를 잘 설정해 줘야 해.”
감독은 모여 있는 코치들을 쓱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로 하는 이야기들이 애들에게 얼마나 와닿을 거 같나? 고교야구 지도자라면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그리고 이런 방법도 아주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지.”
“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자네도 곧 감독직을 맡게 될 텐데, 이런 꼼수를 잘 이용해야 팀이 잘 돌아갈 거야.”
“아닙니다. 아직 배울 게 많습니다.”
“하하, 듣기엔 좋군,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4명의 시선이 책상으로 모인다.
“항상 일정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한공고가 저 멀리 강원도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음, 서울은 항상 격전지긴 하지. 그래도 자주 만나서 그런지 이제는 이 강팀들이 그렇게 무섭게 보이진 않는군.”
「2018 고교야구 주말리그
(서울A)
경환 고등학교
덕소 고등학교
배지 고등학교
신린 인터넷 고등학교
성북 고등학교
신이 고등학교
동방 고등학교
한공 고등학교」
“다른 팀들을 살펴보았지만, 그렇게 큰 변화가 있는 팀은 없었습니다.”
“그래? 신린이나 동방고는 어떤가?”
“약점이었던 투수력을 보강하기 위해 중학 야구의 에이스라 불리는 몇 명을 영입하긴 했는데, 실전에 내보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 일단 작년에도 투수진의 주축이 2학년 투수였으니 긴장을 할 필요가 있겠어.”
“자세한 자료는 곧 준비하겠습니다.”
계속해서 타 학교에 대해 분석하던 감독과 코치들은 한번 기지개를 쭉 폈다.
“그럼 상대 팀 분석은 이 정도로 하고, 우리 팀을 봐볼까?”
“주전 라인업입니다.”
「1번 중견수 김태연
2번 2루수 김현석
3번 좌익수 신민수
4번 1루수 이한길
5번 3루수 김준섭
6번 유격수 김사범
7번 우익수 최지원
8번 포수 정협
9번 투수
선발 정한수
.
.
.」
“잠깐 의논을 해야 할 거 같은데.”
“무슨……?”
“사범이를 4번에 놓는 건 어떤가.”
“……물론 지금까지 성적을 보면 4번에 놓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시즌 시작 전 갑자기 타순을 조정하면 나머지 애들이 반발할 수도 있습니다.”
“한길이나 준섭이는 어떨 거 같나?”
“애들 성격상, 아마 싫어할 겁니다.”
“그래? 흠……. 그래도 사범이는 4번에 가는 게 맞아.”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밤이 깊어 간다.
* * *
하루하루를 연습하고, 고민하며 지내다 보니, 어느새 주말리그 개막일이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 모두 긴장하며 라인업이 적힌 종이를 보고 있다.
‘고교야구 특성상 한번 정해진 라인업이 바뀌는 경우는 많이 없으니까.’
「라인업(VS 덕소고)
1번 중견수 김태연
2번 2루수 김현석
3번 유격수 김사범
.
.
.
6번 좌익수 신민수
.
.
.」
“뭐야? 민수가 6번이야?”
“김사범이 3번?”
“요즘 치는 거 보면 뭐 이해는 가는데…….”
“아, 저 새끼 저거 또 잘난 척 엄청 하겠구먼.”
신기하다. 지금 나에겐 3년 만이지만, 또 15년 만의 클린업이기도 하다.
나에게 다가오는 신민수.
“여, 축하한다?”
“고맙다.”
“잘해라. 간다.”
쿨한 사람은 정말 멋있다.
그리고 시작된 첫 경기.
한공고의 덕아웃.
“목동 구장이 소문대로 참 작긴 하네.”
“3년째 오는 건데 그걸 이제 알았냐?”
“저렇게 쉽게 넘길 만큼 작았구나, 싶어서.”
그들의 시선은 유유히 홈플레이트를 밟고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김사범을 향해 있었다.
첫 번째 타석에서 초구 직구를 때려 2점 홈런.
두 번째 타석에서는 2-1에서 실투였는지 존 정중앙으로 몰린 슬라이더를 받아쳐 2루타.
‘투수도 놀라고, 너무 쉬운 공에 나도 놀라고. 아직 멀었다.’
그리고 조금 전 타석에서 교체된 투수를 상대로 1-0에서 직구를 받아쳐 쓰리런.
애들을 상대로 기분을 내는 거 같아서 좀 미안했다.
「주말리그 경기(VS 덕소고)
5타석 3타수 3안타 2홈런 2볼넷(5타점 3득점)」
* * *
뉴스의 스포츠 코너.
고교야구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오늘, 고교야구 주말리그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열린 28경기 중 대기록이 나와서 화제인데요, 보시죠.”
“여기는 제주 구장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주공고의 선발투수로 나온 김병헌 선수가 무사사구 노히트 노런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1회부터 3회까지 단 28개의 공으로 돌려세웁니다. 최고 158km까지 나오는 직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 가끔 던지는 커터와 체인지업 또한 일품입니다.”
화면에 나오는 김병헌.
“시즌 시작 전에 좋은 경험을 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거 같고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걸 보고 있을 그 녀석에게…….”
“아쉽게도, 9회 유격수의 송구 실책으로 퍼펙트게임은 놓쳤지만. 앞날이 기대되는 선수입니다.”
다시 화면은 스튜디오를 비춘다.
“아, 거의 퍼펙트게임에 근접했었군요. 참 아쉽습니다. 그 외에도…….”
툭.
꺼지는 TV화면.
“팀장님, 제가 말했죠?”
“뭐, 뭐?”
“제주공고…… 투수…….”
팀장은 갑자기 일어나 주머니를 뒤진다.
“아, 담배. 담배가 어디 있지? 아, 담배가 피고 싶네. 나 담배 사러 간다!”
“네. 전 조용히 시킨 거 하고 있겠습니다.”
뭐, 누군가의 대기록에 웃는 사람도, 우는 사람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 * *
“좋겠네?”
“뭐.”
“그 투수 인터뷰 풀 영상 보니까 아주 오빠에게 고백할 기세던데?”
“걔, 나 별로 안 좋아해.”
“오빠랑 같은 팀이었지?”
“응. 어떻게 아냐?”
손을 뻗어 내 중학교 앨범을 가리키는 동생.
“중학교 때 봤지. 그때는 키도 작고 공도 별로였던 거 같은데.”
“응, 수술하더니 잘 던지더라.”
“전반기 왕중왕전 결승에서 만나는 거 아냐?”
“황금사자기?”
“응. 오빠가 4번 타자. 그 투수가 선발투수. 운명의 라이벌끼리의 격돌!”
아서라, 걔 메이저에서 150승 넘게 한 투수야.
“라이벌 아니라니까.”
“어라? 반응 봐?”
“뭐?”
“오랜만에 보는데? 오빠 긴장하는 거?”
긴장했다고? 내가?
“긴장 안 했는데.”
“긴장했어. 난 알 수 있어. 지금 오빠의 반응은 둘 중 하나야. 완전 승부하고 싶거나, 완전 피하고 싶거나. 어느 쪽이야? 오빠?”
그야 당연히……
깨부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