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김사범, 고민에 빠지다(3)
돌아오기 전, 과거의 한공고는 타자들의 빠른 기동력과 준수한 타격 능력을 이용해서 초반 득점 후, 그 점수를 지켜서 승리를 쟁취했다.
“투아웃! 하나만 더 잡자!”
뛰어난 투수도, 압도적인 타자도 없는 신생팀의 단점을 수비 조직력과 면밀한 분석을 통한 시프트로 메우는 이 방법은 효과를 거둬 단숨에 한공고를 권역에서 강팀으로 발돋움하게 해 줬다.
“아웃!”
‘이겼다. 이제 4연승인가?’
하지만 내가 돌아온 이후, 한공고는 경기당 7점 이상의 점수를 내는 공격적인 팀으로 변화했다.
“오늘도 수고했다. 이제 전기 리그도 절반을 돌았다. 이 기세를 몰아 남은 경기도 힘내자.”
“네!”
“오늘 연습은 따로 없으니 학교에 도착하면 각자 알아서 해치도록. 이상.”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미동도 없이 전달하는 감독님. 신기하다.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또 다른 변화. 아직 데면데면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래도 조금씩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
‘정작 중요한 녀석들은 아직 다가오지 않지만.’
나는 기숙사로 들어가는 무리에 섞여 자연스럽게 실내 연습장으로 향했다.
‘발렌 사가를 기반으로 한 시스템이라면, 곧 뭔가 올 거다. 내 경험이 말해 주고 있어.’
오늘도 100만 번의 스윙을 채우기 위해 난 몸을 푼다.
* * *
깔끔한 인테리어의 방 안.
편한 의자에 두 명이 앉아서 대화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어떻게 시작하면 되는 거죠?”
“아,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그냥 저하고 이야기하러 왔다고 생각하고, 하나하나 얘기해 보죠.”
건물 밖, 심리상담소란 간판에 불이 켜질 때쯤,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사내는 조금 멍한 표정을 한 채, 거리의 사람들과 섞여 사라진다.
* * *
“아, 진짜! 내가 완벽하게 하랬지! 그걸 그렇게 하면 내가 뭐가 돼!”
움찔.
“아니, 들어봐. 걔랑 잘 되고 싶어서 그런 작전을 짰으면, 완벽하게 성공해야 의미가 있는 거라니까? 완벽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꿀꺽…… 꾸ㄹ, 푸흡!
“아 오빠! 옆에서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저리 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전화하는 하별이의 기세가 무서워 말을 걸 수가 없다.
‘내가, 완벽주의자라고?’
내 안의 뭔가가 비틀려 있다는 것을 느낀 뒤, 나는 내내 찝찝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육체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훈련과 몸을 만들기 위한 운동으로 바쁜 나날을 지내다 보니 또다시 마음의 상처를 망각하고 있었고, 용기를 내 오늘 스포츠 전문 심리상담사를 찾아갔다.
“완벽주의자란, 바꿔 말하면 성취에 중독된 사람이에요. 지금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고 싶어 하죠.”
음,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래서 스포츠를 하는 선수들이 이런 문제를 많이 안고 있죠,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상담사는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는다.
「성취욕 → 칭찬 → 더 큰 성취욕 → 스스로 불만족 → 아쉬움, 실망」
“간단하죠? 성취가 뒤따라 올 때는 상관없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을 때죠.”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떡여졌다.
“문제는, 이 과정이 타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거예요.”
“이런 사람은 타인에게도 높은 기대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는 타인은 엄청난 피로함을 느끼는 거죠.”
“방법이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단 이 방법을 먼저 써 보는 게 어떨까요?”
그저 현실에 절망해서, 힘들어서 꼬였을 줄 알았는데.
‘내 마음은 그 옛날부터 꼬이기 시작한 거였군.’
그래도 원인을 찾았다. 모르면 모를까. 원인을 안다면 해결하는 방법은 쉽지.
* * *
한공고의 야구부 그라운드, 오늘도 배팅 연습이 한창이다.
“아 씨!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맞냐?”
“낄낄, 너 원래 못 치잖아.”
“아니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지. 오늘 뭐 이상한 거 없냐?”
“없다. 아 있네, 실력!”
슬그머니 다가서는 한 사람.
“큼큼.”
“안녕하십니까.”
“그래, 뭐 문제 같은 거 있나?”
“아, 아뇨. 없습니다.”
“그래? 알았다.”
축 처진 등을 가지고 돌아서는 그, 유니폼의 뒤에는 김사범이란 이름이 마킹되어 있다.
어제 상담소 안, 두 남자가 이야기하고 있다.
“간단합니다. 유치원생에게 알려 준다고 생각해 보세요.”
“유치원생이요?”
“네, 유치원생은 아직 모르는 게 많죠, 그래서 하나부터 열까지 차례대로 알려 줘야 합니다.”
“음…….”
“그런 느낌으로. 하나하나 알려 주는 겁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네. 해 보겠습니다.”
뭔가를 알았다는 듯, 김사범의 눈이 불길하게 빛난다.
다시 그라운드.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스윙연습을 하는 김사범의 눈에 아까 그 후배가 혼자 스윙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보인다.
“승엽아. 무슨 문제라도 있니? 아까부터 고민이 많아 보이는구나.”
“아, 선배님! 그게 사실……. 요즘 배트가 너무 안 맞아서요.”
“그래? 그건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문제 같은데, 내 앞에서 스윙해 볼래?”
“네? 네. 해 보겠습니다.”
후배의 스윙을 보던 김사범의 눈이 번쩍하며 빛난다.
“기본이 되는 하체가 충분하게 돌아가지 않네? 이러면 못써요.”
“네?”
“하체가 잘 받쳐 주지 못하니까 몸통이 회전할 때 중심축이 앞으로 쏠리는 게 보이는구나. 이건 기본 중에 기본이란다.”
후배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져 간다.
“아……. 그런데 운동은 그대로 하는데……. 갑자기 이럴 수도 있나요?”
“아, 물론이지! 너의 육체는 날이 갈수록 커 간단다. 고등학교 1학년의 성장을 얕보면 안 돼요. 그러니 그 배트를 내려놓고 어서 가서 스쿼트를 하렴. 런지도 아주 좋은 대안이 될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하체 운동은 몇 가지 루틴이…….”
그렇게 한참을 서서 이야기를 듣던 후배의 얼굴이 거의 다 썩어 갈 때쯤, 사범의 말이 끝난다.
“내 말 알아들었니? 네가 내가 말한 대로만 하면 곧 공이 잘 맞을 거야.”
“네. 감사합니다. 당장 가서 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재빨리 사라지는 후배.
‘음, 간단하군. 역시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전문가의 조언을 듣는 게 정답이었어.’
그렇게 사범은 스윙연습을 하는 틈틈이 몇 명의 후배, 동기들을 잡고 조언을 해 줬고, 모두 만족(?)하며 돌아갔다.
공식적인 모든 연습이 끝난 저녁, 조언하느라 채우지 못한 연습량을 차근차근 채워가고 있던 사범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띠링!
“드디어!”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함성. 그렇게 기다리던 스킬 습득 소리다.
‘긴장되는군, 이왕이면 명중 보정이 있는 스킬이 생성됐으면 좋겠어. 이쯤이면 생성될 때도 됐지.’
[지속적인 기술전수를 통해 스킬 ‘기분나쁜 선생님’을 얻었습니다.]
이게 뭐야.
[기분나쁜 선생님
-좋은 지식을 기분 나쁘게 전달한다. 상대방 기술 습득속도 +3%, 활력 -10%]
아. 이건 아닌데.
* * *
스포츠 채널, 목동 구장의 모습을 뒤로하고 캐스터와 해설자의 모습이 보인다.
“TV를 시청하고 계시는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캐스터 김민수.”
“해설위원 안경태입니다.”
“오늘 경기, 고교야구 전기 주말리그 왕중왕전, 황금사자기인데요. 이번 황금사자기에는 몇몇 눈여겨볼 선수들이 있죠?”
“네 그렇습니다. 여러 선수가 있지만, 투수에는 제주공고의 김병헌, 타자에는 한공고의 김사범 선수를 뽑을 수 있겠네요.”
TV 화면 아래에 두 사람의 성적이 나온다.
“두 선수, 정말 대단한데요. 김병헌 선수는 주말리그에서 4게임 4승 0패, 평균자책점이 무려 0점대입니다.”
“네 맞습니다. 노히트 노런도 했었죠?”
“그야말로 소속 권역을 압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김사범 선수는 어떻습니까?”
“7경기에서 타율이 6할에 육박합니다. 이것도 놀라운데 때려낸 홈런이 10개예요. 경기당 1개 이상씩 때려낸 거죠.”
“사실 마지막 경기에는 전 타석 고의사구라는 희귀한 경험도 했었죠?”
“정말 ‘재앙 수준의 타격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빨리 이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두 팀 모두 32강부터 경기를 합니다. 물론, 중계는 저희 NBC 스포츠가 합니다.”
“하하, 정말 기대가 되네요. 핫한 두 선수의 이야기는 이쯤 하고, 오늘 황금사자기 첫 경기를 살펴볼까요?”
TV를 보며 웃고 있는 사범에게 누군가 베개를 던진다.
“아, 재수 없어. 저걸 또 보냐?”
“이 경기 재미있어. 너도 봐봐.”
“그럼 경기를 봐. 앞부분만 무한 반복하지 말고!”
사범은 자신이 나온 부분을 계속 돌려보고 있었다.
“왜~ 나도 저 부분이 제일 재미있는데, 넌 재미없니?”
“엄마까지 왜 그래! 또 쟤만 좋아한다! 내가 그거 하지 말라 그랬지!”
“너 또! 오빠한테 쟤라고 하지 말랬지!”
“아 됐어! 나 들어갈 거야!”
화가 났는지 쿵쿵대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하별. 남아있는 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아들, 한 번 더 볼까?”
“그럴까요?”
* * *
황금사자기 32강.
경기 전, 조용한 한공고의 덕아웃에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린다.
“우리가 몇 번 이기면 결승에 올라가는지 아는 사람?”
“부전승 빼고, 4번?”
목적이 있는 질문. 주장 김태연의 노림수다.
“5번만 이기면 우승이네.”
“쉬운데?”
“쉽지. 지는 게 어려운 거지.”
“크크큭, 맞네. 맞아.”
아직 어린 고등학생들이라 덕아웃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오른다.
“이번에 우승하면 첫 우승이다!”
“다 먹어치워 버리지 뭐!”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선수들을 보며 코칭스텝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10개 때릴 거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다시 찾아온 정적.
“나, 딱 경기당 2개씩. 홈런 10개 때릴 거야. 반드시.”
요즘 이상하고 재수 없는 말투에서 다시 자신의 모습을 찾은 김사범. 이를 가는 그에게 누구도 쉽게 말을 걸 수 없었다.
황금사자기 32강.
한공고 VS 천안고
13:3, 한공고의 승리.
황금사자기 32강 [VS 천안고]
4타석 1타수 1안타 1홈런(4타점) 3볼넷.
* * *
한공고 감독실, 코칭스태프들이 회의에 한참이다.
“32강은 무난하게 이긴 것 같습니다.”
“그렇군. 특히 민수가 잘해 줬어.”
“맞습니다. 타순을 변경하고 슬럼프가 찾아오면 어쩌나 했었는데, 주말리그부터 계속해서 상승셉니다.”
“다행이야. 덕분에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겠어.”
“한길이 말씀입니까?”
“이걸 보게.”
모두 책상의 기록지로 시선을 돌린다.
VS 신이 고등학교
4타수 1안타 2삼진
VS 동방 고등학교
3타수 무안타 1볼넷 2삼진
VS 천안 고등학교
4타수 1안타(2타점) 3삼진
“확연한 하락세입니다.”
“그동안은 앞에서 사범이, 뒤에서 민수가 잘 받쳐 줘서 티가 나지 않았습니다만, 조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네, 그래서 말인데. 지금이 그때 말한 타순변경을 할 시기인 것 같아.”
“사범이를 4번으로 올리실 생각이십니까?”
“음. 그 외에도 조금 변경을 할 생각이네, 한번 보지.”
「1번 2루수 김현석
2번 우익수 최지원
3번 중견수 김태연
4번 유격수 김사범
5번 좌익수 신민수
6번 1루수 이한길
7번 3루수 김준섭
8번 포수 정협
9번 투수 ……」
“이건……. 16강을 앞두고 너무 큰 변화를 주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사범이는 4번을 쳐야 하네. 그렇다면 상대방이 딴생각을 못 하도록 앞뒤로 확실한 타자를 배치하는 게 나아.”
“분명 이렇게 하면 쉽게 사범이를 피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파격적인 변화는 선수들이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습니다.”
이종협 감독은 피곤한 듯 마른세수를 하며 말한다.
“그건 어쩔 방도가 없어, 그저 애들이 우리를 얼마나 믿는지, 거기에 달렸지.”
다음 날. 야구부실 앞 게시판.
“이거 뭐야? 타순이…….”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한길 선배가 6번이라니, 잘못 쓰신 거 아냐?”
“태연 선배가 3번, 사범 선배가 4번. 이러면 투수 입장에서 고민되긴 하겠다.”
“그렇긴 하지…….”
“오늘 선배들 늦지? 3학년만 따로 뭐 한다고.”
“그럴걸? 야, 알아서 사리자. 내가 볼 땐 오늘 위험해.”
모여 있던 후배들이 재빨리 사라진다.
그리고 얼마 후, 3학년들이 들어온다.
“야, 16강 라인업 떴나 보다!”
“그래? 요즘 뭐 크게 안 바뀌잖아?”
우르르 몰려온 선수 중 한 명이 달려가 라인업 용지를 본다.
“어? 야! 한길아!”
“아 왜! 또 뭔 헛소리 하려고!”
“너 6번이다.”
“뭔 소리야?”
“김사범이 4번으로 올라가고 넌 6번으로 내려왔다고!”
소란이 예상되는 가운데, 드디어 4번타자 김사범의 전설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