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김사범, 유망주가 되다(2)
한공고 감독실, 이정협 감독과 코치들이 모여 핸드폰을 보고 있다.
[자신감에 가득 찬 한공고 김사범. “메이저리그 기다려라!”]
[김사범, 김병헌과의 마지막 승부에 대해 입을 열다. “팀을 믿었다”]
[김사범의 한마디. “김병헌을 제외하고 신경 쓰는 투수는 없습니다.”]
[김사범의 타격 비결을 물었다. “잘 보고 세게 치면 됩니다.”]
한참 동안 보던 김 코치가 입을 열었다.
“저희의 실수인 것 같습니다. 사범이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줄은…….”
침통한 표정의 이정협 감독.
“아는 기자 없나? 일단 개인적인 인터뷰는 부상 핑계로 금지시키고 괜찮은 기자에게 인터뷰를 부탁해야겠군.”
“제가 알고 있는 기자가 있습니다. 나름 공정하고 괜찮은 기사를 쓰는 사람인데, 아마 부탁하면 도와줄 겁니다.”
“그래, 그건 그렇게 하도록 하고, 지금 중요한 건 후반기 주말리그군. 드래프트도 있는 만큼 우리가 더 신경 써야 하네.”
곧바로 이어지는 회의, 김사범의 공백을 메꾸기 위하여 코칭스태프의 머리는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다.
* * *
[김사범의 타격 비결을 물었다. “잘 보고 세게 치면 됩니다.”]
└ 백중원이 말합니다. “물 잘 맞추고 간을 잘 하면 손님이 늡니다.”
└ 엌ㅋㅋㅋㅋㅋ 골목ㅋㅋㅋ
└ 손흥민이 말합니다. “한번 접고 세게 차면 들어갑니다.”
└ 페이커가 말합니다. “잘 보고 피한 다음 맞추면 됩니다.”
└ 아아…… 갓상혁……
└ ㅈㄴ 거만하네 ㅋㅋㅋ 얘 원래 이런 애냐?
└ 잘 보고 잘 치면 된다는 게 왴ㅋㅋㅋㅋ 정답인뎈ㅋㅋ
└ 안 맞는다구요? 잘 못보시는군요. 야구 접으세요.
└ 김사범은 거만하지 않습니다. 이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기자ㄱ_
“동작 그만. 너 뭐하냐?”
어느새 모여든 동기들이 내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본다.
“크크크큭, 야 얘 자기 기사 악플에 댓글 달고 있다.”
“야, 그게 더 비참해! 그냥 보질 마!”
민수야, 한길아. 너희가 프로세계의 언플을 몰라서 그래.
보자마자 빵 터져서 웃던 김태연이 말을 보탠다.
“아, 개웃기네. 그거 해 봤자 소용없어 인마. 그냥 받아들여.”
“효과 있다. 모르면 가만있어.”
“네가 어떻게 아냐?”
“……효과 있대. 도와주지 않을 거면 가라.”
내가 해 봤다고, 내가. 이걸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다들 연습하러 떠난 뒤, 혼자 남겨지니 괜히 서글프다.
‘후. 차라리 못할 때 달리던 악플이 낫군. 그건 이해라도 되지.’
나는 오후 내내 핸드폰과 함께했다.
그렇게 지쳐 돌아온 집, 씻고 눕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몸이 나른해지며, 잠에 빠져들어 갈 듯 말 듯한 그 순간.
“오빠! 오빠 기사 봤어?”
봤다 이 화상아. 나 잠 좀 자자. 나 그 사람들하고 싸우느라 힘들어.
어느새 내 방까지 찾아와 핸드폰을 들이미는 김하별. 동생만 아니었어도…….
“봐봐! 완전 전쟁터라니까? 내가 오빠 실드치려고 들어갔는데 이미 사람들이 난리가 났어! 개꿀잼!”
그거 내가 싸운 건데.
몽롱한 눈으로 화면을 보고 있다 보니, 갑자기 잠이 확 깬다.
└ ㅈㄴ 거만하네 ㅋㅋㅋ 얘 원래 이런 애냐?
└ 잘 보고 잘 치면 된다는 게 왴ㅋㅋㅋㅋ 정답인뎈ㅋㅋ
└ 안 맞는다구요? 잘 못보시는군요. 야구 접으세요.
└ 김사범은 거만하지 않습니다. 이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기자가 이상하게 쓴거 같네요.
└ 너 김사범이냐?
└ 맞는듯 ㅋㅋㅋㅋ
└ 근데 맞는 말 아니냐? 야구 잘 보고 잘 치면 되는 거 아님?
└ ㅇㅇ 맞음. 꼭 야구 모르는 것들이 와서 저러더라.
└ 프로도 안 간 고등학생이 저렇게 말하는 건 문제있지 ㅇㅇ
└ 이미 탈 유망주 완전체 선수인데? 쟤 수비 스탯도 죽이던데.
└ 타율은 이미 괴물이고, 단타보다 장타개수가 많은 놈인데 뭔 프로니 뭐니를 들이댐 ㅋㅋ
└ 같은 팀에 김태연이라고 외야수 있는데, 걔도 잘 치드라.
느낌이 온다. 이 전투민족이 누군지. 특히 마지막 사이어인은 확실하다.
그렇게 몇 개의 기사를 둘러보자. 전방위적으로 적의 공격을 방어하고, 반격하고 있는 사이어인들.
그 모습에, 새삼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왜?”
“내 폰 보면서 그렇게 웃지 마, 기분 나빠.”
미안.
그 시각, 한공고 기숙사. 몇몇 학생이 모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
“야, 여기 이놈 말빨 장난 아니다. 나 넘어가서 추천 누를 뻔.”
“거기 애들 빡세, 그냥 여기 와서 같이하자.”
매우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각자의 핸드폰, 노트북을 만지는 선수들.
“야! 김태연! 네 이름 달지 말고 좀!”
“야, 이런 거라도 해야 좀 덜 지루하지. 근데, 우리가 이러는 거 사범이가 알까?”
“걔가 알겠냐? 야구 말고는 관심도 없는 앤데, 좀만 더 하고 자자. 슬슬 이것도 지겹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 * *
새로운 하루, 열심히 훈련하고 있는 이한길에게 괜히 다가가 말을 걸어본다.
“좀 맞냐?”
“뭐냐? 오늘 좀 기분 좋아 보인다?”
“나? 그대론데. 그나저나 곧 후반기 주말리그 시작하는데, 컨디션 어때? 나도 뛰고 싶다.”
“알아, 너 뛰고 싶어 하는 거. 저기 코치님 눈 봐라. 부담스럽다.”
이한길이 말한 방향을 쳐다보니, 뚫어져라 날 보고 있는 코치님이 보였다.
‘하. 과보호야, 과보호.’
재빨리 나와서 딴청을 부리다 보니 좀이 쑤셔 눈에 들어오는 몇몇 애들에게 찾아가 조언을 해 주기도 했다.
“팔을 조금만 더 들어 보면 좋을 거 같은데.”
“수비 때, 너무 정면에 집착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아. 빠른 타구는 한 걸음 더 딛는 사이에 외야로 나가 버리거든.”
“송구는…….”
[‘기분 나쁜 선생님’이 발동됩니다! 대상자의 습득력이 증가합니다! 활력이 떨어집니다!]
아, 스킬. 제발!
테러 아닌 테러가 끝난 후, 병원에 들러 많이 나아졌다는 소리에 기분 좋게 집에 왔다.
‘오! 이번엔 벤츠?’
새로운 선물이 나를 기다리는 것 같다.
“안녕하세요. K&G 스포츠의 김기덕 팀장입니다. 반갑습니다.”
내게 손을 내민 깔끔한 외모의 중년인. 기대했던 푸른 눈이 아니라 조금 실망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마주 손을 잡았다.
“하하. 손이 아주 좋네요. 좋은 선수는 손만 잡아도 티가 나죠.”
“감사합니다. 앉으시죠.”
사람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제 소개는 아까 했죠?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저는 K&G 스포츠라는 에이전시의 팀장입니다.”
“아, 에이전시요.”
“네. 야구 쪽은 사실 FA를 앞둔 선수들이 알음알음 계약하는 것 빼고는 드러나게 계약하는 일이 없어 조금 생소하실 겁니다.”
5년? 6년쯤 후에야 국내 야구도 에이전시에 문을 개방했다. 물론 난 상관없는 선수였지만.
‘그런데 K&G는…… 생소한데?’
“그렇지만 해외 유수의 회사와 협업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내실 있는 회사입니다. 김사범 선수의 메이저 진출을 충분히 도와드릴 수 있을 겁니다.”
“아…… 네…….”
열심히 기억을 뒤져 본다. K&G. 신고선수 딱지를 떼고 2군에 있을 무렵, 혹시나 나에게 계약을 건넬까 여러 사람에게 이것저것 정보를 얻었던 적이 있다. 그것도 얼마 안 가서 그만뒀지만.
“물론 김사범 선수의 성적이라면 보라스 코퍼레이션이나 베벌리 힐즈 등 해외 유명 에이전시와도 계약이 가능할 겁니다.”
아무리 고교야구라도 8할 타자가 흔하진 않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한국 사람은 한국회사에서 케어받는 게 편할 겁니다.”
응? 뭔가 대화의 초점이 이상한데?
“성적에 신경 쓰기 바쁜데 이것저것 신경 쓸 거리가 많아지면 안 되죠. 거기다 저희 회사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
“일단 알겠습니다. 부모님과 충분히 상의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자세한 조건은 추후 계약 시 설명 드리죠.”
구수한 이름을 가진 김기덕 씨를 돌려보낸 후, 부모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이건 웬 과일이야? 저번 장 볼 때 과일은 안 샀잖아?”
“오늘 온 김길덕? 그분이 주시더라고요. 참 사람 좋아 보이던데.”
이미 다 드시고 궁금해하면 이상해요 아버지. 그리고 김길덕이 아니라 김기덕입니다, 어머니.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다 내게 묻는 어머니.
“넌 계약할 거니? 엄마는 찬성이다. 멀리 나갈 건데 잘 챙겨 주는 데하고 계약해야지. 들어보니 외국회사들은 잘되는 선수만 챙겨 주고 조금만 못해도 신경 안 쓴다더라.”
이미 마음을 정하고 물어보시면…….
“어허. 사범이도 다 컸는데 알아서 잘 선택하겠지. 도장 찍기 전에 먼저 알려 주기만 해. 아빠도 이것저것 알아보마.”
적절하게 어머니의 말을 커트해 주시는 아버지. 그러시면서 냉장고에 있는 과일을 찾아 깎으신다.
“알겠어요. 저도 이것저것 알아보고 결정할게요. 저 들어가요.”
좀 더 현명하게. 나는 기분 따라 행동하는 19살이 아니다.
* * *
“안녕하세요, 시민일보 스포츠기자 김영섭입니다.”
“안녕하세요, 한공고의 김사범입니다.”
학교 앞 조용한 카페에서 나는 오랜만에 단독 인터뷰를 하고 있다.
‘태길 선배 연속경기 안타 기록 막았을 때 이후로 처음인가?’
“하하, 압니다. 요즘 고교아구를 취재하는 기자들 사이에서 김사범 선수 모르면 간첩이죠. 반갑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제가 조금 잘 치긴 하지만…….”
의도된 멘트에 빵 터지는 김영섭 기자.
“하하. 그렇죠? 잘 치죠! 거기다 잘 막기도 하구요.”
“감사합니다. 방금 전 멘트는 제가 생각해도 재수 없네요, 하하.”
나도 이젠 능숙하게 인터뷰를 할 수 있다. 사람은 실패에서 배우는 법이니까.
……
“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원래 마지막 질문이 제일 중요한 질문인거 아시죠?”
“네, 각오하고 있어요.”
“그렇게 대단한 질문은 아닌데, 긴장 안 해도 돼요! 흠흠. 메이저 진출,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이걸 왜 안 물어보나 했다.
“아직 명확하게 결정된 건 없어요. 대신 하나 확실한 건, 저는 메이저에 도전할 생각입니다.”
“아 그렇군요. 사실 국내 야구 팬과 구단들이 엄청나게 궁금해했거든요. 그분들의 궁금증을 풀 수 있는 답변인 것 같습니다.”
1라운드 1픽과 관련된 거니까. 국내 구단들이 궁금해하는 건 당연하다. 흠흠.
“자, 이제 인터뷰는 끝났고, 개인적으로 이야기 좀 해도 되죠? 팬으로서 궁금한 게 많거든요, 하핫.”
“물론이죠. 저도 맛있는 음료 얻어먹은 값은 하겠습니다.”
팬이라니……. 의례적인 말이어도 항상 듣고 싶은 말이다.
“어떻게, 에이전시는 정해졌나요? 이제 곧 프로야구 드래프트고, 구단들 사이에서 메이저와 조율하려면 빠르게 정해야 진행이 착착 될 텐데요.”
“묻지마 식으로 지명하는 걸 걱정하시는 거죠? 안 그래도 요즘 몇몇 에이전시로부터 연락이 와서 고민 중입니다.”
“아 그래요? 기사엔 안 쓸 테니 말해 줄 수 있어요? 그래도 굴러먹은 짬이 있어서 제법 알거든요, 제가.”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김 기자.
“외국 에이전시는 말씀드리기엔 좀 그렇고…….”
없거든.
“국내에서도 접촉했나요? 잘됐네요. 그쪽은 제가 잘 알죠.”
“음…… K&G 스포츠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잠시 후.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카페를 나섰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김 기자의 말.
‘K&G? 제가 알기로는 거기 야구 쪽은 손 안 대는 곳인데?’
‘일단 저도 알아보죠, 음. 그래도 좀 이상한데. 그렇게 규모가 큰 회사가 아니거든요. 연락 드릴게요.’
왜 나에게 접근한 거지? 그냥 단순히 가능성이 보이는 유망주라?
그래도 이렇게 쉽게 밝혀질 이야기를 거짓말을 하면서 나에게 접근할 이유가 있나?
떠오르는 상념들.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안녕하세요. 김사범 선수이신가요?”
길을 가던 중, 웬 잘생긴 흑인이 나에게 말을 건다.
유창한 한국말로.
“네?”
“갑작스럽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락네이션의 짐이라고 합니다.”
아. 뭔가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