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김사범, 유망주가 되다(3)
프로는 돈으로 자신의 가치를 말한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돈이 움직이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모두 보이지 못하고 사그라드는 선수들 또한 존재한다.
돈이 움직이는 시장은, 차갑고 냉혹한 곳이다.
이젠 멍하니 현실을 즐길 때가 아니라 냉정해져야 할 때다.
우리 집 근처의 작은 커피숍.
나는 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저희 락네이션은 특별한 선수와만 계약을 맺습니다. 축구, 농구, 야구, 격투기. 종목을 가리지 않죠.”
“특별함이요?”
“네, 특별함. 리그를 지배하던가. 적어도 자신의 포지션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 선수를 말합니다. 바로 김사범 선수처럼요.”
특별함. 사실 나와 같은 특별함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물론 대중에게는 음반회사로 알려져 있어 걱정하실 수도 있지만, 소속 선수들을 알려 드리면 놀라실 겁니다.”
“누가 있죠?”
“일단 축구 선수 중에는 바이이른 뮌헨의 제롬 보아탱 선수가 있습니다. 아시나요?”
“아뇨, 축구는 잘…….”
“하하, 제가 바보 같은 소리를 했네요. 음. 메이저리그 선수를 예로 들자면, 로빈슨 카노 선수가 있네요.”
정말 소속 선수가 특별하긴 하다.
몸을 기울이고 도전적인 시선으로 짐에게 묻는다.
“카노면…… 지금 약물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르고 있지 않나요?”
“흠흠…… 단순한 이뇨제입니다.”
“금지약물이던데……. 이뇨제가 보통 다른 약물을 숨기기 위해 사용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사실 카노가 약물을 한 건 아무 상관없다. 개인의 일탈은 개인의 잘못이지, 에이전시의 잘못이 아니니까.
‘다만, 자기 사람을 얼마나 챙기는지 알아볼 순 있지.’
잠시 우물쭈물하던 짐은 이내 입을 연다.
“후, 그 녀석이 멍청한 건 사실이지만 자신의 위치를 버리면서까지 약물을 복용하진 않았을 겁니다.”
“위치를 지키려고 한 게 아닐까요?”
“적어도 락네이션은 그를 믿습니다. 본인 입에서 아니라고 했어요. 우린 다른 건 보지 않아요. 단지 우리 고객만 보죠.”
합격. 갑자기 찾아와 번지르르한 이야기를 하는 에이전시보다 차라리 이렇게 뻔뻔할 정도로 자신의 고객을 감싸는 에이전시가 믿음이 간다. 적어도 내 판단엔.
자세를 바로하고 태도를 고친다.
“일단, 죄송합니다. 카노 이야기는 그냥 떠본 겁니다. 빠른 시간 내에 최소한의 신뢰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이해합니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갈 수 있겠군요.”
다행히 부드럽게 넘어가는 분위기.
“다른 회사는 김사범 선수의 과거 성적과 올해 성적의 차이를 보고 망설이고 있을 겁니다.”
“아.”
“플루크 시즌, 좀 더 들어가면 약물이 아닐지 우려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거겠죠. 하지만 우린 다릅니다.”
검은 얼굴, 유난히 하얀 눈동자가 반짝인다.
“방금 전에 말했다시피, 우리는 ‘진짜’를 알아보거든요, 그게 우리의 능력이고, 사업입니다.”
나도 모르게 그의 말에 빠져들었다.
“우리의 분석 팀이 이미 결론을 내렸어요. 김사범 선수는 ‘진짜’라고.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목이 타는지 물을 마시는 짐.
“후, 단순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뭘 원하시죠? 돈? 우승? 아니면 메이저로 향하는 빠른 길? 우리에겐 뭐든 가능합니다. 그럴 능력이 있어요.”
“뭐든지?”
“뭐든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단어죠.”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는 짐.
“여기 계약서입니다. 집에 가서 살펴보시고, 상의하시고, 연락 주세요. 수정? 필요 없을 겁니다. 그 계약서는 그런 조건이에요.”
숨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에 조금 압도된 것 같다. 그만큼 에너지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좋습니다. 집에 가서 상의하고 연락 드리죠.”
“김사범 선수는 머리가 좋아요. 방금 전에 느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리한 선수들은 우리를 선택하죠.”
“하하,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가시죠.”
같이 커피숍을 나와 헤어지기 전, 짐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내게 다시 말을 걸었다.
“아, 그리고. 최근에 이상한 사람이 접근했죠?”
“이상한 사람이요?”
“네, 잘 생각해 봐요. 뭔가 이상한 게 생각날 겁니다.”
이상한 건 있다. 꽤 많이.
“아직 계약관계가 아니라 말씀드릴 순 없지만, 조심하세요. 그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떠나는 짐.
‘이상한 게 한두 개여야지, 일단 지금 내가 이런 연락을 받는 거 자체가 이상한 일 같은데…….’
과거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상황, 너무나 큰 변화.
하지만 변화에 함락되면 안 된다. 타석에 서 있다는 느낌으로. 내 중심을 잡고 나아가야 한다.
* * *
후반기 주말리그, 나는 덕아웃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
“하나 더 치자! 할 수 있어!”
옆에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배트를 들고 팀원을 독려하는 김태연이 서 있다.
‘도대체 왜 배트를 들고 응원하는 거지?’
머리에 떠오르는 쓸데없는 의문을 날린다. 그것 말고도 신경 쓸 게 산더미니까.
아, 경기에 나가고 싶다.
원사이드로 진행되고 있는 경기. 그 중심엔 드래프트를 앞두고 있는 3학년들이 있지만.
“하나 더.”
같은 3학년인 나는 응원만 하고 있다. 익숙한 듯 어색한 기분.
“수고하셨습니다!”
경기 후, 마무리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분주히 오늘의 기록을 정리하고 있는 김 코치님이 보인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오, 사범. 경기 못 뛰니까 아주 죽겠지?”
“네, 좀이 쑤셔서 죽을 거 같아요.”
시무룩하게, 최대한 기운 없는 모습으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안 돼. 감독님이 지정한 병원에서 완치 판단 날 때까진 금지다.”
“네…….”
야구선수가 아니라 연기자를 했으면 100번을 다시 돌아와도 실패했을 거다.
“아, 그리고, 김 기자하고 인터뷰는 잘 했지?”
“아, 네. 좋은 분인 거 같던데요.”
“음, 알지. 내가 선수로 뛰던 시절에 알던 사람인데 기사도 그렇고 참 좋은 사람이다. 알아두면 나쁠 건 없을 거야.”
김 코치님하고 아는 사이였나? 혹시 그럼?
“저도 그러면 좋을 거 같아요. 아 혹시 김 기자님 연락처 좀 받을 수 있을까요? 그날 경황이 없어서 명함도 못 챙겼거든요.”
“그래? 이거 정리만 끝내고 보내 주마. 먼저 들어가라.”
“감사합니다.”
지금 내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뿐이다. 김 기자.
잠시 후, 핸드폰으로 온 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김 기자님. 김사범입니다.”
“아~ 김사범 선수. 야, 이럴 때마다 기자 되길 잘했다니까요.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선수에게 전화라니!”
다행히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는다.
“하하,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
“아, 네. 물론이죠. 없는 시간도 만들게요. 하하, 무슨 일이죠?”
“저번에 말씀드렸던 에이전시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요.”
잠시 기억을 되살리는 듯, 말이 없는 김 기자.
“아. K&G! 내 정신 좀 봐, 연락한다는 걸 깜빡했네.”
“네? 연락이요?”
“네, 그때 그렇게 헤어지고 아무래도 이상해서 좀 알아봤거든요? 갑자기 그렇게 다른 분야로 발을 넓히는 것이 쉬운 게 아니니까.”
“네, 말씀하세요.”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하는 김 기자.
“알아보니까, 누가 접근을 한 거 같아요. 김사범 선수의 에이전시가 되어 달라고. 누군진 알아내지 못했는데, 아무튼 좋은 의도는 아닌 거 같아요.”
“누가 의도를 가지고 저에게 K&G를 접근시켰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렇죠, 제 생각은 K&G와 계약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일처리 자체도 깔끔하지 못하다는 평도 많고. 괜히 그런 거에 발목 잡히면 안 되잖아요?”
대체 누굴까. 왜 나에게 그러는 걸까. 떠오르는 의문을 뒤로하고 전화를 종료했다.
‘정보가 부족해. 경험도 부족하고. 아, 생각 없이 야구만 하고 싶군.’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이렇게 빨리 연락을 줄지 몰랐습니다, 김사범 선수.”
“도대체 저를 두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 * *
예의 그 커피숍. 짐이 내 앞에서 눈을 빛내고 있다.
“흠, 정보는 때론 아주 큰 가치를 갖죠.”
“계약서, 검토해 봤습니다. 제 사인은 들어가 있어요. 부모님의 동의만 있으면 됩니다.”
가져온 계약서를 꺼내놓는다.
“그리고, 제 부모님은 제 의사를 존중해 주시죠. 이제 말씀하시죠.”
씨익 웃는 짐.
“좋아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너무 큰 대어가 얕고 작은 웅덩이에서 발견돼서 문제가 생긴 겁니다.”
“네?”
“야구적으로 보면, 한국은 작은 팜입니다. 물론 개개인의 수준은 높지만, 딱 그 정도죠. 모두가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 유망주는 많지 않아요.”
갑자기 한국야구 유망주에 대해 말하는 짐.
“하지만 모두가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거대한 유망주가 나타난 겁니다. 그것도 두 명이, 동시에.”
김병헌과 나를 말하는 것 같다.
“모두가 욕심을 내고 있는데, 어떤 구단이 둘 모두를 잡으려고 한 거죠. 상도덕 없이. 그래서 누군가가 수작질을 부리고 있어요. 김사범 선수의 과거 성적을 뿌리고, 의도적으로 약물의혹을 부풀리는 방법으로.”
둘 다 합당한 의심이다. 나조차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적의 변동이 크니까.
“거기다 당사자인 김사범 선수는 연락이 안 되죠. 어차피 약물 의심을 가지고 있는 선수니 자연스럽게 다른 한 명에게 모든 관심이 모이겠죠?”
“그렇겠군요.”
“그 순간에 접근하는 사람이 바로 그 누군가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주의하라는 말을 한 겁니다. 하하, 그게 저희는 아니니까요.”
순간 누군가가 스쳐 지나간다. 김 기자의 말 또한.
‘날 호구로 본 거군. 날 가지고 아주 재미를 보셨겠어.’
품에 있는 명함을 꺼내 짐에게 보여 준다.
“아하! 빙고! 역시, 예상이 틀리진 않았네요. 하하”
“누군지 아십니까?”
“그럼요. 하지만 일단은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아직 한 배를 탄 게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다. 아직은, 하지만.
낮은 음성으로, 내 의지를 전한다.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복수를 좋아하죠.”
“복수는 짜릿하죠. 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 거예요.”
나는, 다가온 손을 맞잡았다.
* * *
서울, 메이슨의 집.
오늘도 어김없이 두 개의 핸드폰으로 쉴 새 없이 통화하는 메이슨.
“그래, 접근했다고? 반응은 어때?”
“좋아. 동양인 유망주는 부모님 의사를 잘 거스르지 못해. 그쪽 위주로 계속 진행하라고 해.”
일이 잘 진행되는 듯, 입가엔 미소가 번진다.
“자, 목표한 한 마리는 거의 어항 안에 들어왔고, 나머지 한 마리는…… 일단 보자고. 끊지. 그래, 수고하게.”
전화를 끊자마자 어디론가 다시 전화하는 메이슨.
“오, 이런. 시차를 계산 못 했네, 미안.”
“……네가 옆에 있었으면 지금 내 샷건이 동물 사냥용이 아닌 걸 증명할 수 있었을 거야.”
“하하, 농담은. 내가 말한 건 생각해 봤어?”
“우리 사정에 갑자기 200만 달러를 추가로 만드는 게 쉬울 것 같아?”
“상황이 바뀌었어. 이젠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야. 그 정도 총알이 아니면 말을 꺼낼 수도 없어. 선발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이번 시즌에 겪어 봤잖아?”
전화기 반대편, 상대방이 잠시 침묵한다.
“그래도 우린 방법을 찾아냈지.”
“그렇지, 그 방법이 다음 시즌에도 통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잘 하면 둘 다 잡을 수 있어.”
“둘 다 노릴 건가?”
“당연하지. 리그 탑급 실링이 보장된 유망주들이야. 그중 타자는 심지어 센터라인이지. 도박할 가치는 충분하지 않나?”
“빌어먹을, 내일 구단주에게 가서 최대한 비벼 보지. 확신은 못 해.”
“내년에 중계권 계약도 있잖아. 그걸로 잘 말해 보라고. 끊지, 좋은 밤!”
“네가 아니었…….”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끊는 메이슨은 와인 셀러에서 와인을 꺼내 마개를 땄다.
“결국 멍청이들을 제치고 대어를 손에 넣는 건 나야.”
누군가에게 하는지 모를 혼잣말. 서울의 야경을 배경으로 메이슨은 한 잔씩, 한 잔씩 와인을 비운다.